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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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고희를 넘어도 봄바람이 불면 마음이 동하는 게 참 신기하다. 젊었을 때는 쉰만 넘었다면 마을에 노인들을 다 안방노인 취급을 하고 명절이 되면 세배를 받으려고 집 밖에 안 나오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기사 이순 언저리가 되면 으례히 집집마다 초상이 이어지는 그런 때 였으니 당연히 어른 행세를 하고 담뱃대를 고된 세월처럼 길게 물었으리라.
내가 아는 60초반의 그 여자가 있다. 체구가 아담하고 얼굴이 귀염상이라서 늘 여동생처럼 이무로워 무시로 어깨를 감싸고 친근감이 넘친다. 옛날 같으면 다 저 세상 사람인 데 좀 떨어져서 보면 뒷모습이 허언을 가미하여 아가씨 같다. 단정한 올림머리에 서글서글한 눈매. 이 따금씩 웃어주는 보조개,사실 60넘은 여자의 보조개는 처음 본다. 그리고 통통한 엉덩이는 압권이다. 걸을 때 엉덩이로 걷는 아장걸음이 하도 귀여워서 하마터면 손바닥으로 짤싹 때릴 뻔 했다.
가끔 라운딩을 같은 조가 되어 나가는 날은 간식으로 대추차나 그 여자의 얼굴을 닮은 호떡 같은 것을 나누어 먹기도 해서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는 데 늘 고마운 마음씨에 더욱 그 자태가 귀엽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딱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 녀의 말투가 좀 거칠다. 부산이 고향인 그 녀의 말투가 나는 늘 옥의 티처럼 마음에 거슬렸다. 말하는 톤도 좀 남성적이다. 내가 농담을 잘 하는 편이라 가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이따금 농담이라도 장난삼아 던지면 반색을 하는 경우가 가끔있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농담의 내용을 새겨 들어 미소로 승화 시켜 주어야 그 농담이 분위기를 즐겁게 해 주기도 하는 데 그렇지 못 하면 발설자가 난감해진다. 한 번은 '미스강은 아담해서 참 여성스럽다고' 하자 대뜸 '내 키가 작아서 평생 그 것을 아킬레스건으로 살아 왔는 데 듣기 좀 그렇네예' 해서 사람을 일시에 무안하게 만들어 버린다. 변명이 민망하기도 해서 그져 벙어리가 된다. 넷이 라운딩을 하다가 다른 파트너가 홀인원이라도 하면 내가 농담으로 '아 속 시리네! 파도 못하고, 무슨 복이야!' 하면 '아 사람이 일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홀인원이라도 하면 축하를 해 조야지 무슨 말씀이라예 ' 하며 조롱을 놓는다. 그래서 내가 '미스 강! 노인 한 테 대들면 노인 희롱죄로 고소 합니다!' 하면 ' 나도 할매라예! 손자 손녀도 있는 할맨께 고소를 하던지 알아서 하이소!' 하며 ' 회장님도 지 한테 성희롱성 발언 수첩에 다 새겨 놨으니 마음대로 하이소!' 하며 더 이상 입을 달싹거리지 못하게 자물쇠로 채워 버린다. 내가 소망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긴 그녀의 말대로 나이 든 초로의 할머니임에 틀림 없고 사위 며늘 거느린 한 집안의 노인임에 가차 없기 때문에 내가 농담을 가려서 하는 게 맞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오래 만난 지인도 아니고 이제 만난 지 두어 달 남짓이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은 되지만 같이 늙어가는 해거름의 노인들인 데 좀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경칩에 꽃샘추위가 귀가 시려운 라운드에 하얀 털모자를 쓴 미스강이 걸어 간다. 그 옆을 노인 셋이 비틀거리는 걸음마들이지만 봄을 향해 잘들 걸어 간다. 다시 돌아 오지 못할 그 길을 용감히 걸어 간다. 문득 미스강이 돌아 보며 웃는다. 할머니라 부르면 싫어하니 나는 일부러 미세스강도 아닌 미스강으로 부른다. 우리들의 화사한 봄날이 저 만치 걸어 온다.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봄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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