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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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제막식
서각집에 맡겨 놓은 현판을 찾으러 갔다. 한 달 전에 맡겨둔 서각이 완성 되었다는 소식을 그저께 듣고 오늘 현판 상량식이 있는 날이라 아침 일찍 들렀다. 80도 넘은 백발노인이 낑낑거리며 현판을 누른 압력기를 풀고 작업대로 어렵게 밀어낸다. 그 위에 하얀 광목을 쫙 찟더니 이불처럼 덮고 양쪽 모서리에 흰 노끈을 질끈 묶더니 길게 주욱 뽑아낸다. 현판 제막식 때 종친들이 양쪽에서 이것을 끌어 당기면 엄숙한 현판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수고하셨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고 서각집을 나섰다.
永慕齋, 他門에도 수많은 영모재라는 재실이 있지만 우리 門에도 400여년 전 지은 재실이 古川에 있었다. 광해조 때 선조의 산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작은 재실이 고천재라는 당호로 출발은 했지만 해가 갈 수록 노후해져서 몇 번의 중수를 거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훼손 되어 근세에 와서 1900년대 초에 영모재라는 이름으로 개칭을 하고 새롭게 重修를하여 지금의 건물에 이르렀다. 청을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고 축담 위에는 길게 마루가 놓여 있다. 재실의 주변은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고 산새가 절경이라 산 속에 안겨 있는 형국이라 언제나 그 터에 서면 조상처럼 포근하다.
그런데 1900년초 부터 조선의 기울기가 시작 되자 한 때는 문화재 도굴이 기승을 부렸다, 수많은 왕릉들이 도굴이 되고 사찰의 금동불상들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 무거운 삼층 석탑마져 들어 옮기는 기괴한 일들이 있었다. 겨울에 연못의 얼음판을 타고 들어와 정자마당의 연화석도 들고 가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 나라 꼬라지에 문화재 관리는 언감생신 꿈도 못 꿀 그런 시절이었다. 그 당시 우리선조의 영모재 현판도 도난 당했고 해방이다 전쟁이다 산업화다 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문중의 모습도 옛날과 달리 정년을 한 베이비 부머 세대가 속속 들어오고 새로운 정서와 가치관으로 문사를 보기 시작했고 간혹 보이는 80대들의 모습은 어느새 노인으로 밀려나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알량한 시대가 왔다. 허무할 손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신노인 세대들을 보면서 선대로 부터 물려 받은 지혜와 정서때문에 이런 상황이 복잡하고 답답할 것이었다. 나야 경계인의 어중간한 위치라 늘 양시론적 입장을 견지하지만 때로는 애매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민주적 절차를 중시한다. 그져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하지만 혈족의 모임이란 게 나이 많은 종친들의 의견을 무시하기가 참 힘든다.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현판의 글씨체 때문에 한바탕 논쟁이 있었다. 노장층은 鄕中에 저명한 서예가에게 부탁을 해서 당호의 품격을 고양하자는 주장이고, 소장측은 컴퓨터에 문교부에서 추천하는 수많은 서체가 있는데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 그럴 필요가 있는냐는 것이었다. 그냥 현실적으로 간편하게 하자는 논리였다. 서예가의 명성에 따라 금액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고 문중에도 몇 분이 계시니 눈치를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인 건 분명해 보였다. 소장층은 또 컴퓨터에 한석봉체도 나와있고 궁서체니 흘림체니 하면서 제법 전문적지식으로 응대를 하니 이것도 결국 다수결의 결정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결과는 언제나 소장파의 승리로 귀결 되고 만다.
보슬빈지 장맛빈지 몰라도 우중충한 날씨에 노장들의 눈치를 보며 종친들이 트렁크에서 현판을 정성스럽게 내린다. 벌써 고유제에 쓰일 돼지머리가 상 위에서 미소짓고 있었고 수박 한 덩어리가 무엄하게 뒹굴고 있었다. 땅땅땅! 현판의 못질 소리가 정적을 깨고 선조들의 영혼이 우루루 내려 오시듯 산야에 메아리가 낭낭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양쪽에서 줄을 잡은 종친들이 비장하게 도열 했고 소장파의 대표인 집사의 소개대로 당기세요 하니 광목이 양갈래로 좌악 갈라지면서 검은 옻칠 바탕에 하얀 회칠의 영모재라는 서각이 선명하게 들어났다. 박수가 한 동안 산야를 뒤흔들고 있었다. 선조들의 음덕이 향기로 온 산야에 퍼지고 있었다. 뒤이은 선조님께 올리는 한잔 한 잔 술에 혈연의 영원을 빌며 쌓여가는 정성들을 보면서 오늘 죽어도 떳떳한 후손으로 열선조님들을 뵐 수 있겠구나 하는 주인의 마음이 가볍기만 한 것은 기분 탓일까.
음복으로 시원한 수박을 한 입씩 베무는 정겨운 얼굴들. 형제지정의 선연한 핏줄들.이들을 보며 내내 드는 생각은 본향에 살아야 참혈족이구나 하는 생각에 지나간 50여년의 객지생활이 슬며시 부끄러위 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한 말씀 하시겠습니다라는 소장파 종친의 마이크를 잡고 힘겹게 일어서는 하루였다.
댓글목록
안박사님의 댓글

#.*계보몽* 詩人님!!!
"계보몽"任은 眞正한,子孫의 道理를 多하시는..
"靈墓齋"의 顯板`製幕植을,嚴肅하게 擧行하시구`如..
末年에 故鄕의 先靈을 지키시는,"계보몽"詩人을 尊敬요..
"계보몽"詩人님!本人은 "順興`安"씨,鄕里의 "種親會長"으로..
"울任"의 精誠스런,祖上섬김에 感伏합니다!"울任"!늘,康寧해要!^*^
(P`S:祖上섬기는 同質性에,感動하며 感謝하고..글句,늘 봅니다`如)
계보몽님의 댓글

안박사님은 성리학자안유(안향)의 후손이셨군요
고려후기의 명신이셨지요
순흥안씨는 귀성의 반열에 있는 명문귀족이였습니다
제 인생의여정은 제 숙명의 길이라 생각하고
선조숭봉의 업을 천직으로 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문중의 일들이 많군요
그져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습니다
늘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