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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스럽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 다 자라서 자기책임을 스스로 알아서 행한다는 뜻일게다. 나이들어보니까 정말 어른 노릇하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우선 귀에 거슬리는 말도 눈살 찌뿌리는 행동을 보아도 나 한테 해가 없다면 그져 참아야 한다. 요즈음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고 모든 걸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대든다. 참 무서운 세상이다.내 속을 빠져 나온 자식도 눈치를 보아가며 가려서 대화를 하는 지경이다.내가 좀 가부장적이라 대학졸업때까지는 내 말 한마디에 일사불난하게 움직이던 아이들이 40중반을 넘어 50자락을 깔더니 확연히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겉으론 네네하지만 자기들 감정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 부친다. 그러면 최첨단의 계산법 앞에 아날로그는 스스로 그 대처법을 상실하고 벙어리가 된다.
사실 이제 어른의 시대 그런 것은 없다. 오랜 삶의 경험으로 무엇이든 곤경에처하면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물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집안의 어른이 생기고 아버지의 위엄이 생겨 조화로운 질서가 저절로 정립이 된다. 윤리와 도덕이 저절로 생겨나고 그 존경심이 사회생활의 원천으로 작용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른의 역할을 스마트폰이 다한다. 옛날의 어른들보다 명징하고 가려운 데 없이 구석구석 긁어주는 요술통이 스마트폰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기제사마져도 차림새에 시비를 걸려든다. 제사란 건 한 집안의 내력이고 관습인데 가가예문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균관에서 체신 없이 근래에 발표한데로 하자는 게 아이들의 주장이다. 시대에 맞춰 하는 게 맞기는 하다. 사실상 시대정서에 성균관이 백기를 든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어른의 말씀이 효력도 없고 공허한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구구절절히 솔깃한 제안들이 폰에서 제시되기 때문에 어른들이 입을 스스로 닫는다. 어른의 설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폰이 서툰 나도 어디를 갈려면 휴대폰부터 열어 젖힌다. 그것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집을 간다던가 명승지를 찾아 간다던가 심지어 내가 살던 집도 나비를 쳐야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된다. 이렇게 첨단 정보기에 매달리다 보니 어른도 어른이기를 포기하고 폰할아버지에 매달려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간다. 이제 어른들이 없다.어른이기 이전에 그져 눈치만 보며 사는 시절이기도하다.
늘 사랑채에서 담뱃대를 물고 호령하던 할머니가 그립다. 청상의 세월을 그 칼날 같은 위엄 하나로 가문을 지켜 오셨다. 한 집안의 어른이기도 하였지만 일문중의 어른으로 서슬이 퍼렇게 가문을 다스리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없이 조아리던 그런 세월이 있었다. 할머니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승복하고 살던 그런 세월이 있었다. 모든 대소사가 할머니의 입으로 부터 결정 되었다.할머니가 다스리던 그 고택에서 어른 아닌 어른 같은 무늬만 어른으로 살아가는 세월이다.
80이 넘어도 아이 같은 어른들이 많다. 세수가 어른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이들어 거드럼을 피우고 아랫사람을 아래로 보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어른으로 지내기가 참 힘든 세월이다. 물론 아래사람이 위사람을 존경하고 따라야 하지만 윗사람도 이제는 아랫사람을 존경하고 평등한 사고를 가져야 손톱만큼의 어른 대접을 그나마 기대할 수가 있다. 물론 아내라는 사람들도 집안의 기둥이 된 지 오래지만 그 것도 평등사상의 실천이 근본이다. 그러니 어른이 되면 센스있게 세심히 눈치를 잘 봐야 하고 자기 설자리를 잘 알아서 기는 것이 이 시대 노인들의 처세술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오늘도 아이 같은 어른들을 만나는 모임이 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참 재밌기도 하지만 아이 같은 어른들이 가엾다. 가여워서 위로하고 싶다. 그들도 언젠가는 사랑 받는 아이들이었음에 틀림이 없지만 세월에 밀려서 어른노릇을 한다는 것이 힘이들 게다. 어른에 대한 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기어야 하는 데 어른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노인들이 불쌍하다. 저 무더위 속에 어른을 묻어버리고 싶다. 활활 태워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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