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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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세월
세월의 바람을 이길 수 있을까. 세월의 바람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시대를 거슬러 가며 옛 것을 지킬 수 있을까. 옛정서가 다 그렇게 나쁜 것일까.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나는 늘 대응하는 것이 느린 것 같다. 몸이 대응해 나가는 것이 느린게 아니라 정서가 따라가지 않으려고 뒷걸음을 치는 것 같다. 몸은 이 나이에 하고 싶은 것들은 구석구석 찾아 다니면서 다 한다. 하지만 마음은 늘 옛것을 찾아다니고 고리타분하다. 마음이 젊게 살아야 한다는 데 나는 마음이 늘 늘그막에 서 있는 것 같다.
문회에서 올해 묘제의 제수와 제향의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가운 데 가장 주목할 이슈가 축문을 한글로 쓰자는 안이 나왔다. 제안한 석계종친이 동의를 구하자 종친들이 서로의 얼굴을 두리번거리며 뜻밖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 방안을 맴돌았다. 늘그막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흠칫 홍조를 띈 80이 훨씬 넘은 종친 몇분이 고개를 돌렸고, 기다렸다는 듯 반색의 미소를 띈 6,70대의 얼굴도 얼핏설핏 보였다. 문회라는 것은 늘 우리네 정치처럼 수구보수와 개혁진보로 나뉜다. 그 결과의 판관역활을 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성향은 늘 수구보수의 편에 서면서도 넌짓이 진보개혁의 언덕을 넘본다. 어쩌면 개혁의 쪽에 마음이 더 솔깃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고유 전통정서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수구쪽은 한마디로 제향의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고래로부터 해 오던 유세차 갑진,,, 하면서 한자로 읽어야 제사의 품격이 올라가고 도포깃이 빳빳이 선다는 말씀이셨다. 반대편의 입장은 우리글로 풀어 읽어야 참배하는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고 내용도 감동적으로 바꿔야한다는 옹골찬 주장이 거침 없이 나왔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죽고나면 풀어쓰던지 매어 쓰던지 맘대로 하라고 장로측은 최후의 언사를 던졌고, 제발 시대변화에 수긍하고 따라오는 후손들이 문회에도 참석하고 싶고 묘제에도 참여하고 싶도록하는 정서변화를 수용해달라는 푸른 불꽃이 맞불을 놓고 있었다. 한참을 턱을 괴고 고심에 빠져있던 내게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준엄한 칼날이 나를 노리고 달겨 들었다. 느닷없는 칼 끝에 흠칫 정신이 깨어났지만 이 순간에 내 말 한마디로 다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함부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창밖의 금오산의 소나무숲에서 바람소리가 잦아들 즈음에 목구멍으로 파고드는 소리로 "나이드신 어르신들께서 양보를 하시지요 " ...."시대가 많이 변했지 않습니까? 일단 한 번 해보시고 제향의 격이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라면 다시 복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 찬물을 끼얹은 듯 아무도 말이 없었다. 실망한 장로들의 눈빛을 보면서 의자에 기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변화의 큰 강물은 거스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신 것일까. 노종친들의 실망의 눈빛이 바닥을 스물스물 가라앉을 때 " 여기 계신 종친들이 일 이십년후에 몇 분이나 살아 계실까요, 어차피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정서로 문중과 참배행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젊은 종친들이 많이 참여해야 하는 데 옛날의 형태로 간다면 문중이라는 단체가 이어지겠습니까? 혼란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변화를 한 번 가져 보시지요!"
지금까지 우리 고유문화인 혈족문화를 지켜온 노종친들이 눈물겹고 존경스럽다. 이 시대에 빛바랜 소리 같지만 그들이 있어 후손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국가에 헌신하면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후손들을 위해 기원하고 응원할 것이다. 선조가 거기 계셔 오늘 우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선조의 제례행사에 옛날의 법도를 쫓아가느냐 현실적 정서로 변화해 가느냐의 시대적인 문제인 것이다.
올해 축문은 한글로 쓰기로 했다. 세상은 자꾸 변해 간다. 해마다 한 번씩 올리는 歲事, 올해는 새로운 각오로 선조님을 영원히 사모하는 글을 지어 올리고 싶다. 맑은 술 한 잔을 올리며 곧 찾아뵈올 그날을 위하여 붉은 피로 흠모의 축문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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