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가 잘 어울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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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나는 아내와 둘째 딸과 함께 백화점에 갔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두 여자의 운전기사를 자청하여 그곳에 갔었습니다. 가기는 갔는데 두 여인과 객장을 다니면서 나는 금방
후회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줄 알면서 왜 또 따라왔던가 하는 후회를 곱씹으며 나는 할 일 없이 점포 순례를
시작했는데 그 순례는 끝이 없었습니다. 사지도 않을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기를 수십 번, 행여 점원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하여 죄 없는 내가 다 조마조마했건만 두 여인은 눈치도 없는지 점원의 짜증스러운 시선엔
관심이 없는 듯 결국 티셔츠 한 장으로 쇼핑을 마감하고 손을 털었습니다.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아내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였습니다. 모자를 한 개씩 사 줄 테니 모자점에
가보자는 제의에 대하여 얼씨구 이게 웬 떡이냐며 반길 줄 알았는데 아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자는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지금까지 선캡 이상의 모자 쓴 걸 본 적이 없던 터라 예상은 했지만
사준다는 모자를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모자를 쓰면 헤어스타일이 망가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헤어스타일은
고치면 될 것을, 무슨 비너스상의 머리도 아닌데 왜 그토록 신경을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럼 한 번
가보기나 하자며 끌다시피 데리고 갔고 결국은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씩을 샀습니다. 그러나 끝내 모자를
쓰지 않은 채 집으로 왔습니다만 그 모자를 쓴 건 손주들과 함께 서해안 갯벌체험에 갔을 때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싫다는 아내에게 굳이 모자를 권한 이유는 아내의 취향과는 관계없이 내 기준의 멋을 느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카페 활동을 오래 하다 보니 나름의 안목이 트여서 여성회원들의 모자 쓴 모습이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물론 모든 모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맵시 있게 눌러쓴 모습은 또 하나의 멋을
연출하기에 충분하였고 게다가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은 나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멋스럽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 에서 오드리 헵번의 모자 쓴 모습을 연상했는지도
모릅니다. " 100개의 모자를 주고 여자를 거울 없는 방에 가두는 것은 너무나 심한 고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100개가 아니라 10개의 모자만 있어도 그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이 궁금하여 거울이 없으면 몸살이
날 만도 할 터인데 하물며 100개의 모자라면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모자를 쓰는 목적은 신체 보호와 장식, 그리고 신분을 표시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신체 보호라면 군인의 철모와 작업장 종사자의 작업모 등을 들 수 있겠고 신분을 표시하기 위한 용도로는 최고
권위인 왕관과 기타 신분에 따라 정해진 모자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장식용 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도에 따라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용과 한파를 막기 위한 방한용 모자도 있고 탈모로부터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가리개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건 장식용일 겁니다. 요즘은 화려한
등산복에 어울리는 각양각색의 등산모가 많은데, 이 글을 쓰는 나도 하나 둘 사모은 모자가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아내의 충고를 들은 뒤부터는 일상에서 모자를 쓰는 경우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가을 색이 점차 짙어가는 요즘, 볕을 가리는 용도가 아닌 패션용 모자를 쓴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할 것이라는
멋스러운 분위기를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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