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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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새벽 일찍 정자의 용마루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베개를 밀어내며 깊게 붙은 눈을 힘겹게 떴을 때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이 나를 기쁘게 한다. 습관처럼 유산균 한 봉을 털어 넣고 골다공증 약을 한 봉 털어 넣고 비타민 한 봉을 털어 넣을 때 그 새콤한 신맛이 내 목구멍에서 한참을 맴을 돌때 나를 기쁘게 한다. 아침이면 더욱 주파수가 높아진 이명의 소리를 죽이려고 기기에서 소리를 죽이는 새소리가 나를 기쁘게한다. 숲속에서 우는 청아한 새소리는 흡사 내가 숲길을 걷는 것처럼 상쾌하여 나를 기쁘게 한다.
폰에서 깨똑하여 손끝으로 밀어 보니 딸에게서 보낸 용돈이 찍혀 있을 때, 빙그레 미소지으며 나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지난번보다 용돈을 한푼이라도 더 보냈을 때 왠일이지 하며 더욱더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 돈을 차곡차곡 모아 손녀가 고등학교를 갈 때 선물로 폰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가족들이 함께할 때 나를 기쁘게 한다. 손녀가 고등입학을 하고 할아버지! 저 이번에 반장 됐어요 할 때 그리고 저 열심히 공부해서 학년 수석이 될게요 할 때 너무나 기특해서 나를 뛸듯이 기쁘게 한다.
창호살문에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추어지면 믹서기에 야채들이 앞다투어 부서지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익은 달걀이 그날따라 잘 까지는 아침이 나를 기쁘게한다. 야채주스잔을 기우리며 시골 한 달 살기를 실천하고 있는 안사람이 내일쯤 온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조금은 긴장이 되지만 몸이 좀 편해진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바리바리 사 들고 상기된 얼굴로 펜션을 방문하듯 들어오는 낯선 얼굴의 아내가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러다 달포나 지나 찬바람이 불 때쯤 떠나는 아내를 생각하면 더욱더 나를 기쁘게 한다. 문득 옛날의 아내를 보고 싶어 바랜 앨범을 펼쳐 놓고 기억을 살피는데 아이들 안고 찍은 사진을 보며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네 하며 울컥 나를 기쁘게 한다.
칠순이 훨씬 넘어 천신만고 끝에 며느리를 본 친구의 연락이 나를 기쁘게 한다. 죽기 전에 손자를 안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친구의 넋두리가 나를 웃음짓게 한다. 며눌이 40이 넘었다니 저으기 걱정이 되지만 그져 친구의 운수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우울하지만 요즈음이야 50에도 더러 아이를 생산하는 열혈부부들도 있으니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는 친구가 나를 기쁘게 한다. 그동안의 수모를 극복하고 손자를 안고 자랑하는 친구의 모습을 상상만해도 나를 기쁘게 한다.
정기적으로 들리는 병원에서 당뇨수치가 잘 관리되고 있네요 하는 의사의 영업적인 어투가 나를 기쁘게 한다. 몇달씩을 생명을 유예 받아 사는 삶이 임의로와 나를 기쁘게 한다. 종착역이 저기 보여도 내릴 준비는 커녕 청년처럼 살려는 노추가 나를 기쁘게 한다. 언제까지 가야할지도 모를 이 길을 새벽이면 무너진 몸을 겨우 일으켜 하루의 일과를 짜면서 과연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침이 나를 기쁘게 한다.
댓글목록
물가에아이님의 댓글

기쁘게 하는 것들이 많아서 참 행복 하시겠습니다
읽어 내려오며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한달 살이 하러 내려오시는 어부인 대환영을 하시고예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 센치한 테이트도 좀 하시길예~
" 달포나 지나 찬바람이 불 때쯤 떠나는 아내를 생각하면 더욱더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요 대목은 쪼맨 거시기 합니더예~ ㅋㅋ
두 분 행복하신 11월 되시길예)~~~~
계보몽님의 댓글

ㅎㅎ 나이드니 영혼이 자유로운 것이 제일 행복하구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본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더
새벽에 일어나면 노망처럼 넋두리를 풀어 놓습니다 ㅎ
소재가 바닥이나서 맨땅에 헤딩을 합니다
희망의 가을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