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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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중소도시, 오래된 기차역과 시장 골목이 아직 남아있는 그곳. 준호는 그 도시의 작은 국립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후배였다. 이름은 수진. 문예창작과 1학년. 얌전한 눈빛과 조용한 말투가 인상적인 그녀는 동아리 모임에서 준호와 처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선배. 수진이에요."
"응, 반가워. 문창과 1학년이라 그랬지? 글 쓰는 거 좋아하나 봐?"
"네. 시도 좋아하고, 에세이도 가끔 써요."
그날 이후 준호는 그녀를 자주 떠올렸다.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동네 카페에서 시집을 나눠보던 시간들 속에서, 사랑은 조용히 피어났다.
준호에게는 영민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과 선배이자 기숙사 룸메이트였고,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누던 친구였다. 수진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된 것도 준호를 통해서였다.
"얘가 영민이야. 내 룸메이트."
"아, 안녕하세요. 수진이에요."
"반가워요. 준호가 자주 얘기하던데요. 글 진짜 잘 쓴다면서요?"
셋은 자주 어울렸다. 시험이 끝난 뒤엔 근처 강변을 걸었고, 방학이 되면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오늘 영화 어땠어요?" 수진이 물으면, 영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감성적이더라. 수진 씨가 울 뻔했잖아요."
준호는 그런 시간들이 좋았다. 수진이 있어서, 그리고 영민이 있어서.
졸업 후 준호는 서울의 대기업에 합격했다. 월급도, 사무실도, 전망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멀어졌다. 지방에서 서울까지는 세 시간 반, 주말마다 내려가기는 쉽지 않았다.
전화와 문자로 이어가던 관계는 점점 말라갔다. 몇 주 만에 시간을 내 수진을 만나러 내려갔던 날. 카페에서 수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민 선배가… 나 좋아한대. 며칠 전에 고백했어."
준호는 말이 없었다.
"그래? 뭐라고 했어?" "그냥… 아무 말도 못했어. 나도 혼란스러웠어."
준호는 커피잔의 스팀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수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래, 잘 가."
며칠 후, 수진은 사라졌다. 동아리방에도 나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 말로는 학교도 그만두었다고 했다.
영민도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잃은 얼굴이었다.
"수진이... 혹시 너한테 말 안 했니?"
"응, 그냥... 조용히 떠났더라."
준호는 서울로 돌아왔고, 그 이후 수진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두 남자 모두에게서 떠나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준호는 여전히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봄날 벚꽃이 피는 시기에 그녀가 떠올랐다.
카페에서 웃던 얼굴, 빗속을 걸었던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 날의 말없이 흐르던 공기.
영민과는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 일에 대해선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지내지?"
"어, 그럭저럭. 넌?"
"바쁘게 지내. 요즘도 글 써?"
"응. 가끔. 그녀 생각하면서."
준호는 수진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민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그해 봄을 잊을 수 없었다.
그해 봄, 세 사람의 이름으로 피었던 꽃은 다시 피지 않았지만, 준호의 마음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그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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