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꽃이 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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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꽃이 피면
팔우정 가는 길은 온통 쌀나무의 거리이다. 이팝나무라고 사람들이 흔히들 일컫지만 나는 굳이 쌀나무라고 부른다. 어감이 부드럽고 고슬하여 고봉에 담긴 밥처럼 나는 쌀나무가 좋다. 최씨 팔형제의 우애가 담긴 팔우정길은 그 도타운 형제지정이 쌀나무로 다 피었는지 온 거리가 다 하얗다. 놋그릇에 가득 담긴 밥 같은 왕릉들이 밥상에 밥처럼 탐스럽게 놓여 있고 대릉원의 둘레에도 모두가 쌀나무 천지이다. 쌀나무꽃은 언제 보아도 먹음직 스럽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두어발 걸어가다 하늘을 본다. 하얀 쌀나무꽃에 눈이 부시어 그만 그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난한 집에 제사는 월사금처럼 자주 다가왔다. 제사가 다가오면 어머니의 근심은 깊어지고 맏이의 걱정도 태산이었다. 제사상에 올릴 쌀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뉴월 보릿고개가 혹독할 때 기제사가 다가오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머니의 시집은 막막하다. 쌀이 금보다 귀했던 시절이라 오뉴월에는 쌀 한 톨을 볼 수가 없었다. 집집마다 등겨밥을 해 먹기도 하고 감자로 떼우기도 하여 마을의 개들도 뼈만 앙상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야야! 외가에 가서 쌀 한 되만 얻어 오너라! 하고 어머니가 말씀 하시면 또! 하며 미리 얼굴을 찡그리는 나는 정말 외가에 가기 싫어서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고 초등 5년생이라도 남 보기가 부끄러워 저녁에 갔다가 밤이 이윽해야 10리나 되는 길을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친정에 맏이를 보내는 것도 창피한 일이고 그리고 대갓집에 시집 갔다고 친정마을에 소문이 널리 퍼져 있으니 어머니도 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식에게 알려 준 夜行이었다.
샐쭉한 눈으로 밤 늦게 찾아온 외손자를 맞이하는 외할머니는 이내 가여운 눈빛으로 에구! 애미가 애를 잡는데이! 하며 치마로 외손자를 가리고 외할아버지 눈을 피하며 부엌으로 나를 데려 가서는 바가지로 서너번 퍼 담은 쌀자루를 내게 안겨 주었다. 그러고는 선채로 더 어둡기전에 얼릉 가거라! 하시면서 어린등을 떠밀었다. 날이 어둡기도 하지만 동네사람들이 볼까봐가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 길로 10여리길을 논길과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오면 저 만치 동구 밖까지 나오신 어머니가 흙투성이가 된 아들을 안고 한참을 울었더라.
보릿고개에 주린배를 잡고 노랗게 죽어가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인데 쌀나무는 어찌 저리 풍요로울까. 허기진 시절 오죽하면 이팝나무꽃들이 쌀밥으로 보여 쌀나무라 하였을까. 쌀밥처럼 하얀 쌀나무를 보며 옛날을 걸어간다. 지천으로 흩어진 밥풀을 밟으며 아무렇지 않게 걷는 오늘이 그리 달갑지는 않는 것이 빛바랜 세월 탓일까. 너무 많이 먹은 배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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