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찌는 냄새가 그리운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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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농수산물 시장에 간 김에 감자 한 보따리를 사 왔다. 얼핏 보기에도 토실토실 잘 영글어 보이는 것이
비옥한 땅에서 잘 자란 햇감자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감자가 나올 시기인 것을 나는 잊고
살았는데, 몸은 도시에 살면서도 나는 저 감자처럼 아직도 농촌의 흙을 털어내지 못한 채 도시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저 감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알 같은 세월을 거슬러 고향의
여름 풍경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소 과장된 면은 있지만 방송국에서 오지 마을을
취재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곳, 도시에서 보면 첩첩산중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내가 유년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그곳은 외지로 연결되는 교통수단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를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가끔 비포장 신작로를 질주하는
뽀얀 트럭을 얻어 탈 때는 횡재를 하는 기분이었고 이런 환경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감자바위라는 조롱조의 별칭이 있을 정도로 내 고향에서는 감자 농사를 많이 지었다. 평지보다는 산이 많은
지역이지만 감자는 비옥한 토지라야 잘 자라기 때문에 우리 집의 경우 집 뒤 텃밭이나 비교적 토질이 좋은 밭에다
감자를 심었는데 족보상으로는 증조부께서 승지라는 벼슬로 기록외어 있고 조부님께서는 군 소재 향교의 전교를
지내신 전통 유교집안이며 지역에서는 비교적 대농으로 알려진 집안이라 옹색한 편은 아니었는 데도 매년 오뉴월
이맘때가 되면 비축한 식량이 부족하여 하루 한 끼는 감자나 옥수수 등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농가의 소득원은 오로지 농산물이기 때문에 식량을 제외한 농산물은 팔 수밖에 없어서
비록 농토가 많은 가정이라 할지라도 보릿고개를 면하기 어려웠던 시절로 기억된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이면 마당가 도랑 옆에서 누나와 여동생이 앉아 반달이 된 숟가락으로
감자를 긁던 모습과 우물정자 기와집 안채 마당에 큰 멍석을 깔고 한편에 모깃불을 피운 채 머슴을 포함한 10여 명의
가족이 모여 어머니가 밀어서 만든 칼국수와 감자를 먹던 저녁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모깃불의 매캐한 연기가 온
마당을 휩쓰는 데도 모기의 공격은 왜 그리도 기승을 부리는지 음식을 먹는 일보다 모기를 쫓는데 더 신경을 쓰던
매캐한 저녁이었다.
철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그때부터 나는 감자가 싫었다. 밭에서 갓 따온 옥수수는 먹을만했지만 감자는 왜 그리도
먹기 싫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아마도 감자의 푸석푸석한 식감이 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의 감자에 대한 비호감은 그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하여 좀처럼 감자를 입에 대지 않고 살았다.
어쩌다 아내가 별미라며 아이들과 함께 감자 파티를 열 때도 나는 끝내 감자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한두 개 정도 먹을 때가 있지만 별미라는 감자의 맛을 느낄 수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내려놓을
때가 믾았디. 마치 군대 시절 시큼한 콩나물국만 먹던 추억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도 콩나물국을 먹지 않던 습성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감자를 즐겨 먹는 식성은 아니지만 고향의 정서를 잊은 건 물론 아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고향집 뒤에 있는
넓은 텃밭에서 하얗게 피던 감자꽃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꽃이 그렇게 예쁜 꽃인 줄 몰랐는데 엊그제 산책로 옆
자투리땅에서 핀 감자꽃은 왜 그리도 예쁘던지, 마치 예전 소꿉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고마워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을 위해서라도 그동안 외면하며 살았던 감자를 다시 보아야 하겠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아내에게 어제 사온 감자를 쪄달라고 부탁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감자 찌는 냄새를
가슴으로 맡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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