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한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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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한 노인들
며칠 전 시니어 임원회의가 있었다. 감사인 나를 비롯한 10명이 모였다. 회장까지 11명이었으나 회장이 반년이나 입원을 해 있어서 10명만 모인 것이었다. 상반기 결산을 하고 7월부터 시작되는 하반기 안건과 어떻게하면 노인들이 공을 치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잘 노느냐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모두들 가면을 벗고 만나는 자리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머리 까만 노인과 머리 허연 노인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고 내가 나이가 어리지만 머리가 하얗게 쉬었으니 나더러 어르신이라며 물을 따라주는 팔십을 넘은 어른도 있었다. 2년차인 시니어 모임이라 해도 40여명의 많은 인원이기도 하지만 모두들 운동장에 나오면 마스크에다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을 꽁꽁 감싸고 나오니 서로 얼굴을 몰라 지금까지도 서로 서먹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제일 큰 이슈가 자주 만나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고 운동후에 식사라도 하고 얼굴이라도 익히며 헤어지자는 게 부회장과 재무인 두 여자 임원들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리고 매월 셋째 목요일에 만나는 정기월례회를 하는 것 외에 번개팅으로 매주 화요일에 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희망자에 한해서 하는 것이라 부담은 없지만 어쨌던 파격적인 제안은 자명했다. 정말 여성회원들의 열정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여자들은 할머니라도 강열했다.
그리고 이튿날 시니어 단톡방에 이번 주 화요일에 서천구장에서 오전 9시에 번개팅을 한다는 고지가 떴다. 쇠뿔도 단숨에 빼려는 듯이 요즈음 매일 이렇게 폭염이 활활 타는 더위에 노인들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지 60대 다르고 70대 다르고 80대 다른데 일괄적으로다가 나오라 하면 분명 무슨 변고라도 있을 게 뻔할 일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도 알천구장에서 폭염에 쓰러진 노인을 119가 와서 싣고 갔다는 소식을 바람에 들었고 영화 "죽어도 좋아"식의 노인들의 노욕에 약골인 나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늘이 화요일이니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비장한 결기로 아침부터 마당에 나가 잡초를 솎으며 잔디밭을 어슬렁거린다.
워낙이 약골이니 체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라도 라운딩 도중에 폭염에 쓰러져 하차라도 하게 되면 팀에게 피해를 주고 그 동안 쌓았던 좋은 인상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아침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만들어 훌쩍거리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방정맞게 울어댔다. 운영이사였다. "임 감사! 9시까지 늦지 말고 1구장으로 오세요! " 팔십 갓 넘은 운영이사 형님이었다. 하도 청년처럼 팔팔하셔서 늘 약질의 로망이기도 했던 선배님의 전화에 지레 주눅이 들어 " 아이고! 형님! 저는 이 폭염에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즐겁게 운동하십시오! 다음 번엔 컨디션 잘 조절해서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목구멍에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토해내자 본래 내가 약한 체질인 걸 아는 형님이라 " 아! 그래! 다음 주 화요일에 보지 뭐! 건강관리 잘 해서 다음주 보세! " 하며 아쉬운 듯 전화를 끊는다.
요즈음은 팔십이 넘어도 청년 같은 노익장이 많다. 실제로 체력을 쓰는 걸 보면 70중반인 나는 언제나 그 체력을 보고 부러워해 마지않는다. 사람마다 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 주위에는 청년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이가 많다. 하기야 나도 마음은 청년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운동이나 작업을 하다보면 육체적한계를 금방 느낀다. 아득히 주저 앉아 격세지감을 원망하며 한숨만 내쉰다. 귀에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멀리 못 걷고 조금만 무리해도 허리가 우지끈하여 울고 싶을 때도 있다. 무너진 삭신을 안고 허망하여 우울해지는 노년이 정말 지옥처럼 싫다. 울아베가 66세에 돌아 가셨지만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다. 나도 아들이 할아버지라 불러서 아버지가 할아버지인줄 알았다. 이따금 고2인 손녀가 할아버지! 하고 전화라도 오면 공중잽이로 일어나 조손간의 정이 도탑다. 하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할아버지가 되었지 하고 생각하면 갑자기 서글퍼져서 인생이 망연해진다.
마당에 폭염이 이글이글 녹아내린다. 제발 이 폭염에 오늘 하루 노인들이 무사하길 빈다. 35도의 폭염에 비지땀을 흘리며 죽을려고 환장을 하며 공을 따라다니는 노인들이 아무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멀리서 문득 엠뷸런스 소리가 들린다. 제발 우리 시니어 회원이 아니길 느닷없이 비는 마음이 측은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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