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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와 고승의 영혼이 같이하는 신륵사(부처ㅡㅡ41회)ㅡㅡ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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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22회 작성일 15-09-2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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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와 고승의

영혼이 같이하는 신륵사

 

 원효대사가 어느 날 여강나루를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흰옷을 입은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연못을 가리키며 이곳 구룡지는 대가람이 들어설 신성한 자리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꿈이었지요. 멀지 않은 곳에 정말 구룡지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습니다. 바위절벽 아래로는 남한강이 연못을 감싸고 도도히 흐르는 형세가 가히 명당이었지요. 대사는 7일간의 기도 끝에 아홉 마리의 큰 용을 연못에서 승천시키고 신륵사를 창건하였다는 전설입니다.

 

 나옹화상의 당호를 따라 지은 육각정자 강월헌에 오르면 천리 굽이의 남한강 자락이 넉넉하게 보입니다. 절벽의 기암들, 바위틈으로 솟아난 소나무와 작은 활엽수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진경산수를 그려내고 있더군요. 다른 사찰과는 차별되는 신륵사만의 아름다움이지요. 그러나 신륵사가 경치만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닙니다. 고승 나옹화상과 고려말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 있어 신륵사는 빛을 더했습니다.

신륵사는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대대적인 중창으로 사세가 확장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 말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입적함으로서 사격이 상승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고승이 입적한 곳이라 하여 이렇듯 사격이 높아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요. 그만큼 나옹의 위상이 크고 덕이 깊었다는 반증입니다.

나옹화상의 입적소식을 접한 우왕은 매우 슬퍼하여 유학자인 목은 이색을 불러 비문을 짓게 했습니다. 목은과 나옹이 생전에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전해지는 바로는 한 번도 상면한 적이 없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이 비문을 짓는 과정에서 이색은 나옹을 존경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비석이 조사당 뒤편의 소나무 숲 속에 조용히 자리한 [보제존자사리석종비]입니다. 이 비석은 사리탑의 오른쪽 뒤편에 서있습니다.

 

 선사의 부도는 다른 대덕들의 그것에 비해 매우 크더군요. 명성만큼이나 부도의 형태도 격을 갖추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종모양 부도로 인도와 우리 능묘양식을 조합해 독특한 부도를 조성했다는 평가입니다. 부도 앞에 장명등을 세운 것 또한 흔한 일이 아닙니다.

부도를 모신 곳은 풍수의 요건을 두루 갖춘 명당입니다. 올라보면 봉미산의 맥이 요동을 치며 정기를 모은 범상치 않은 터전이지요. 높지 않은 이곳에 이만한 명당을 고른 것을 보면 죽어서도 역시 나옹입니다. 한양천도를 주관할 만큼 풍수에 일가를 이룬 무학 대사의 스승이고 보면 음택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옹선사가 세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고려 말의 불교는 이미 부패하여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예견한 것 같습니다. 선사는 왕실 중심의 종교에서 대중적 종교로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지요. 일종의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언어들을 한자의 음을 따서 우리말 가사로 개사한 것입니다. 왕은 물론 권신대가와 무식한 천민에 이르기까지 우러러보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가 입적했을 때 신륵사는 물론 생전에 주석했던 양주 회암사까지 추모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강월헌 위에 자리한 전탑 뒤에는 조그만 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심하게 파손된 비석 하나가 힘겨운 듯 서 있더군요. 고려 말 유학자이며 한때는 대표적 배불주의자였던 목은 이색에 대한 비문입니다.

비문의 내용대로 보면, 대학자인 이색이 대장 각을 짓고 대장경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었지요.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상총선사였습니다. 부친 이곡과도 각별한 사이였던 선승 상총이 부친의 뜻을 알리면서 대장경 제작을 독려 하여 나옹선사의 제자들 도움으로 대장경 제작을 완료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렵게 찍은 대장경은 지금 신륵사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현재는 일본으로 방출 된 상태지요.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은 일본의 풍속은 불법을 숭상하기 때문에 존경하고 믿는 것이 여기의 배가 될 것, 이라며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보내도록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팔만대장경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아예 원판을 달라고 수차례 사신을 보내왔던 터였지요. 제일 오래된 판본이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를 인연으로 이색은 이곳 여강에서 마지막 세월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색은 나옹에 관한 글을 읽고 쓰기를 시작했지요. 나옹과 인맥이 닿았던 승려들과는 가리지 않고 교유하였습니다. 소싯적에는 줄기차게 상소를 올려 불교를 탄핵하고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장본인이었는데 말입니다. 목은이 남긴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서 나는 본래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현릉이 이분을 스승으로 모셨기로 경모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였지요. 비록 왕명이긴 하나 비문을 지으면서 나옹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늦게나마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는 탄식에 가까운 글을 남긴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사람과 글을 보내 벼슬을 내리고 입조하기를 수차례에 걸쳐 재촉했습니다.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여 개국의 정통성을 얻고자 함이었지요. 이색이 조정에 들어가지 않자 이에 분노한 태조는 죽이기로 했습니다. 이를 예견한 이색은 이곳 여강 나루에 배를 띄워놓고 시를 지으며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내는 태조가 하사한 독주를 선상에서 마시고 죽어서 내려왔다 하더군요. 이색이 죽은 곳은 정확히 말하면 약간 하류에 있는 제비여울이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신륵사는 목은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입니다.

결국은 흠모하던 나옹이 입적한 신륵사에서 이색도 생을 마감한 셈이지요. 당대의 최고 선승과 최고의 대학자가 뼈를 묻은 유일한 사찰은 이곳뿐일 것입니다. 신륵사는 나옹화상과 목은 이색을 빼고는 역사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길을 걸어온 당시의 대유학자 이색과 대선승인 나옹이 죽어서나 신륵사에서 조우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인연이었습니다.

전탑 앞에서 굽어보는 여강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단풍에 물든 봉미산이 통째로 잠겨있군요. 노랗게 변해버린 강물 위에 오리 떼가 한가롭습니다. 마치 700년 전 목은 이색이 조각배에 몸을 싣고 시를 읊던 모습처럼 다가왔습니다. 강 건너 은빛 모래밭 위에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소꿉장난 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합니다. 오늘따라 천 리길을 숨 가쁘게 달려온 남한강의 물도 흐르는 듯 멈춘 듯 느긋해 보이는군요.

2회 회사 백일장을 신륵사에서 치르고 있습니다. 노사분규로 직장폐쇄라는 극약처방을 치르고 난 후라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때이지요. 한때는 노, 사와 노, 노의 갈등까지 겹쳐 복잡한 노사관계가 경영을 위기로 몰아갔습니다. 짧지 않은 오십여 일의 직장폐쇄는 서로의 눈빛마저 다르게 만들었고 심성마저 삐뚤어 놓았지요. 그것은 노사관계자 누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사태의 중심에 내가 있었습니다. 자의반 타의반이었지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끼고 나옹선사와 이색의 특이한 우정이 서린 신륵사를 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붉어진 눈빛과 파래진 입술, 그리고 굳어진 심장들을 풀어 경직된 혈관 속으로 따듯한 피가 흐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마치 저 강물처럼 느림의 미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슬그머니 왼쪽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더군요. 지난 노사분규 때 가장 앞장서서 지휘하던 소위 극렬분자라는 별명이 붙은 여사원입니다. 간부사원들과는 말도 나누지 않는 핵심 조합간부였지요. 그러나 노사분규 전에는 얌전하고 글도 잘 쓰는 문예부 회원이었습니다. “계장님이 지금 생각하는 것과 어쩌면 내 생각이 같을 것 같아서 데이트 하려고 한참 찾았다고 했습니다. 2회 백일장을 개최한 의도와 하필 신륵사를 정한 나의 속뜻을 그녀는 안다고도 하더군요. 노사분규, 직장폐쇄가 끝난 지 불과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아 서로 앙금이 남은 상태입니다.

나는 비조합원으로 구성된 소위 구사대 리더 중 하나였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난 조합원들이 농성 중인 여의도 야당 당사를 비조합원 대표자격으로 찾아 당 관계자와 담판을 했을 때였지요. 그들은 나라의 경제를 생각하는 정당이 아니라 이미 의식화 된 세력들을 지원하는 후원자로 순수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입구 복도에는 어느새 200여 명의 인파가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더군요. 내 친구였고 선후배였으며 내 부하직원들도 포함된 조합원들이었습니다. 그곳에 있어서도 안 되고 어울리지도 않는 얼굴들이었어요. 그들의 구호는 이상근 죽여라!” “회장은 물러나라!”였습니다.

내가 다가가서 그들 앞에 서자 대부분은 고개를 돌리더군요. 이 여사원은 맨 앞에 서서 두 주먹 불끈 쥐고 구호를 선창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럴 수 있다 해도 회장에 대한 적대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더군요. 이름 세자만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할 만큼 훌륭한 경영자였기 때문이지요. 특히 시골에서 올라온 생산직 여사원들의 애로와 의견은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으니까요. 중졸 여사원들을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시켜 한을 풀게 했더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내 청춘 돌려달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파업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10대 중후반의 소녀들이 내 청춘 돌려 달라는 외침에 자극을 받았지요. 어느 생산과장의 간곡한 권유가 아니었어도 나섰을 것입니다.

 

 올 한 해는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해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든 불행한 해이기도 했지요. 부처님처럼 무소유(無所有)란 정말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물론 무소유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요. 꼭 필요한 것만 갖으라는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 강물처럼 느림의 여유는 지닐 수 없는 것일까. 서로가 가슴을 열고 진실한 대화를 했다면 최소한 극단적 충돌은 면했을 터인데. 내가 오늘 여강을 찾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큰 마음먹고 신륵사에 왔다고 합니다. 나도 천주교 신자라고 했지요. 무소유가 부처님의 가르침만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가 사찰에 온 것이 뭐가 그렇게 생색내는 일일까 마는 예수님도 무소유를 실천한 성인이었습니다. 12제자 중에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이 가장 많은 이유는 어부들이야말로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무소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욕심 없이 그날 잡히는 고기로 만족하는 생활을 해왔지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이 나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무소유가 힘들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입니다.

분규를 일으킨 조합원들을 무조건 나쁘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에게 무소유를 강요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다만 갑자기 너무 큰 것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 지나쳤고 가진 자를 증오하고 그것을 뺏으려 하는 탐욕이 이성을 앞섰을 뿐이었습니다. 방법과 지향점이 잘못된 것이지 근본적으로 노조활동은 정당한 권리입니다. 소수의 운동권에 이용당한 순간의 결정이 사태를 키웠을 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위장취업자들이 운동권 대학생인지 알았으면서도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녀는 실토하더군요. “안정이 되면 그들을 내보낼 계획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계장님도 조심하세요, 머지않아 다칠 것 같던데요?”하면서 깔깔 웃더군요. 어느 고위급 중역이 펼친 그물망에 내가 걸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조간부인 그녀가 얻어낸 정보라며 조심하라고 간곡히 알려주는 그녀의 표정이 사뭇 야릇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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