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3 > 소설·수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소설·수필

  • HOME
  • 창작의 향기
  • 소설·수필

☞ 舊. 소설/수필   ♨ 맞춤법검사기

 

 

모든 저작권은 해당작가에게 있습니다.무단인용이나 표절을 금합니다

[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3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00회 작성일 15-10-20 05:03

본문


은서는 괜스레 심란한 마음을 달래러 책방에 들렀다.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책방에서 죽치고 앉아 탐독하곤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베스트셀러의 재미에 흠뻑 빠져 뒤숭숭한 심사를 정화하고 나자 어느새 저녁 6시였다. 다행히 약속 장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종각역 부근 대형서점이어서 이십여 분 남은 시간을 맞출 수 있을 시각이었다.

 

 

은서는 서점에서 나와 빠른 걸음을 옮겼다. 꽃샘바람이 불어서 추위가 약간 느껴지는 날씨였지만 걷는 기분은 그 여느 때보다 상쾌했다. 빈우에게 반격한 언사 때문에 착잡하던 마음도 달아나고 없었다. 면접은 그녀의 손을 떠났고, 결과는 걱정한다고 해서 좋아지거나 나빠질 리 없을 것이다. 은서는 빈우 외의 면접관들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위로삼으며 오늘은 홀가분한 기분에 도취되어 보자고, 걱정될 리 만치 들뜨는 자신을 애써 통제하지 않았다.

사실 강혁에게 선약이 있다고 말은 했지만 면접 결과가 나쁘면 도현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베스트사옥을 나오면서 저녁 약속 시간까지의 기다림이 지루하게 느껴졌었다. 책 내용에 심취되지 않았다면 심란함과 지루함을 어떻게 견뎠을지 몰랐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털어내고 번역 일에 몰두했을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은서는 내심 당혹스러웠었다.

도현의 무엇이 자신을 끌리게 하는지, 그와의 만남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은서는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저 괜찮은 남자가 대화 상대로 만나고 싶어했고, 그의 제안이 뜻하지 않게 싫지 않았으므로, 그냥 만나보는 것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켰을 뿐이었다.

 

 

은서가 막 카페 ‘향기’로 올라가려는데 뒤쪽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도현이 차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짙은 회색 싱글 양복에 밝은 줄무늬 넥타이를 맨 그는 불안한 기색이 사라진 탓인지 처음 본 날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살짝 헝크러놓자 그가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와줘서 고마워요.”

도현이 다가와 서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은서가 나온 것에 고무된 듯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의 즐거움에 전염성이 있는지, 반기는 그를 보며 은서도 기분이 고조되었다. 행여 그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 한켠으론 불안했었다.

“아, 뭘요…….”

 

 

은서는 미소 지으며 호응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침착한 톤으로 대꾸했다. 전엔 몰랐는데 바로 코 앞의 그에게서 남성미가 물씬 풍겼고, 심장이 주책없이 쿵쿵 뛰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그리웠거나 밤잠을 설치며 갈등했다면 성급히 반응하는 열정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퇴근하는 길에 잠깐 들리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날 만날 생각은 있었잖아요.”

도현은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소탈하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하는데요?”

“그냥 이곳에서 먹으면 안되나요?”

은서는 카페에 들어가지도 않고 자리를 옮기자는 도현의 말에 의아해 했다. 저녁이야 향기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가능하죠. 하지만 더 맛 있는 것을 대접하고 싶은데요? 설마 날 경계하는 건 아니죠?”

“아니요. 전 아무거나 잘 먹거든요. 아무데서도 잘 먹고요.”

“내 마음이 안 그래요. 내 마음을 받아준 감사의 표시로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요. 멀리 가진 않을 거예요. 내 차로 모실게요.”

은서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도현의 제의를 약간 갈등한 후 수락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앞을 응시하자 도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 둘만 식사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도 괜찮을까요?”

“예? 무슨 말이죠?”

도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 호텔 레스토랑으로 모실까 하고요? 거기엔 날 아는 사람들 뿐이라서 은서 씨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묻는 겁니다. 괜찮겠어요?”

“글쎄요…….”

은서는 이제 겨우 두 번 만나는 도현이 자신의 직장으로 데려간다는 말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둘의 만남을 의미 깊은 관계로 발전하자는 어떤 암시도 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오해는 사절일 것이다.

“내가 친구 한 사람 데려온다고 거기 주방장에게 음식을 주문해 놓았거든요. 어려워 말고 같이 가죠? 은서 씨와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입니다.”

 

 

사실 도현은 아침까지만 해도 은서를 직장으로 데려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 은서에게 향하는 마음이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 정확하지 않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만남을 가져 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자식처럼 그를 대하는 고모가 하와이에서 오늘 귀국했다. 호텔의 실소유주인 고모는 도통 여자에게 관심을 기우리지 않는 도현을 이참에 교화시켜 보겠다고 사진 한 장을 지참하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도현이 여자에게 마음을 닫은 이유를 알고 있는 집안 사람들은 그가 어떤 여자든 데려만 오면 만사 오케이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지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도현이 제 발로 여자를 물색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이자, 마침내 고모가 팔을 걷어 붙인 모양이었다.

 

 

“그냥 만나만 봐! 재미 교포 3세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레지던트 의사다.”

오십대 중반인 고모는 핸드백에서 명함만 크기의 사진을 꺼내 놓으며 강요성은 없다는 듯 말했다. 도현에게 강요란 곧 반항과 직결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까닭일 것이다. 그녀나 도현의 아버지 장 회장에게 대를 이를 혈통이라곤 도현이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하고 미군 장교를 만나 재혼해 하와이에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고, 두 분 사이에 자식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결혼한 장 회장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여서 자식을 여럿 두고 싶었지만 아내 민 여사가 도현을 낳은 후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아 대가족의 꿈은 접어야 했다. 장 회장의 조상대대로 자식이 귀해서 둘째를 갖지 못하는 민 여사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 고모.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뭘 알아서 할 건데? 네 아버지는 환갑을 넘겼다. 올케나 나도 머지 않아 그 대열에 들어설 거야. 우리가 너의 결혼을 바랄 거라는 생각 들지 않아?”

“결혼?”

 

 

“그래, 결혼? 물론 이 여자와 꼭 결혼하라는 건 아니야. 네가 여자와 교제하는 것 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애가 탄다, 우린. 이제 지워질 때도 되지 않았니? 자그만치 7년이다!”

도현의 고모인 장 여사는 이제껏 조심스러워했던 도현의 과거를 끄집어 냈다. 세월이 도현의 상처를 치유해 줄 거라 여기며 묵묵히 지켜 본 그녀와 도현의 부모들이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도현을 유학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그녀였다. 하와이와 뉴욕을 오가며 도현의 뒷바지를 도맡았고, 행여 나쁜 마음을 다시 갖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숨 죽이고 보낸 시간들이었다. 다행히 도현은 공부에 전념했고, 심신의 안정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십대 초반의 순수한 마음이 입은 상처는 그를 냉혈안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그는 여자를 극도로 불신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결혼이란 없다는 듯이 일에만 매달렸다. 일에 대한 그의 승부욕과 성취욕은 학업에 미쳐 지내던 유학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전해 들은 장 여사는, 그의 가슴속 상처가 아직도 오롯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방관하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꺼내지 마, 그 얘긴. 이미 잊혀진 얘기야.”

그렇게 말하는 도현의 얼굴에 서리같은 차가움이 어렸다.

“정말 잊혀진 얘기 맞아? 그렇다면 왜 여자들에게 도통 관심을 안 보이니? 모든 여자가 그 애 같진 않아. 다르단 말이야. 그것을 부딪쳐서 깨달야지, 그 상처로 모든 여자들을 보면 너에게 문제가 커. 알아?”   

“그런 눈으로 본 적 없어, 고모. 그냥 혼자가 편할 뿐이었지.”

 

 

“그럼, 이제 혼자보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경험해 봐. 이 아가씨 내가 만나봤는데, 너에게 딱 맞을 것 같더라. 음과 양의 조화라고, 너와 정반대의 성격이야. 세심하고 심성이 매우 착해. 거기다가 똑똑하고 예쁘기까지 해. 너만 괜찮다면 내일 한국으로 오라고 할 수 있어. 한 번 만나 봐라. 다시 말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만나라는 것이 아니야. 친구처럼 교제해 봐. 응?”

 

 

“그런 여자, 내게 있어 고모!”

장 여사는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소파에서 일어나는 도현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성화를 하면 저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 딴 얘긴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것은 화를 내는 도현이 아니라 그가 한 말이었다. 여자가 있다니? 오라버니 말에 의하면 사교 클럽에도 나가지 않고 호텔에서나 집에서나 일만 한다고 하지 않든가.

“정말이니? 정말로 만나는 여자가 있어?”

“그렇다니까! 그러니 내 걱정은 접어 둬.”

 

 

“핑계대는 거 아니지? 정말 그런 여자가 있다면 내가 좀 보자. 믿기지 않아서 그래.”

“됐어, 고모. 믿든지 말든지 난 상관없어.”

도현은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펼쳤다. 그런 도현을 장 여사가 가만 두지 않았다.

세르비아호텔은 차로 5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도현은 은서를 직장으로 데려가면 금세 소문이 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데려 온 여자를 단순한 친분 관계로 보지 않을 것이다. 도현은 그 점을 인식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은서를 보여주기로 한 것이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야겠다는 고모의 성화에 못이겨 굴복한 짓이었다면 식사를 구실로 데려가는 은서에게 비겁한 놈일 것이다. 수연에게 조언을 구할 때부터 자신이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직장에서 가십거리로 씹히는 것을 경계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은서를 남의 일에 공연히 흥분하는 직원들의 기분 전환용으로 제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모에게 확인시켜 주겠다고 대답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은서는 휴식처 같은 호기심에서 정식으로 사귀어보자는 열정으로 바뀌었다.

 

 

도현은 자신이 고모의 요구에 응하리라곤 대답하기 전까진 예상치 못했었다. 그러나, 좋아 고모 하는 대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은서와의 첫 만남 이후 은연중에 기대했던 채워짐이 그 안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것이 고모나 직원들 앞에 은서를 드러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내 별명이 뭔지 알아요?”

호텔 진입로로 접어들며 도현이 물었다.

 

 

은서는 도현이 맛에 있어 자신이 있는 곳이 자기네 호텔 레스토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의 직장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둘의 관계를 오해할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단서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은서는 부담없이 따라가기로 했다. 거절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판이었다.

“글쎄요. 별명 같은 것 있어요?”

“예, 은서 씨! 내시 일벌레랍니다, 하하하!”

“어머나! 일만 죽어라고 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내시는 왜 붙였대요?”

“여자에게 무심한 놈이라고 붙였나 봅니다. 여사원들 사이에 그런 모욕적인 별명으로 내가 불러지는 걸 알고 내가 어땠는지 아세요?”

“따끔하게 혼내줬겠죠.”

“아니요. 그냥 내버려뒀어요. 상사 험담하는 재미가 빠지면 직장 생활이 고달플 것 같아서요. 내가 좀 못 됐거든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아니요, 좀 못 됐어요. 내가 그걸 알고 있죠. 그러니 은서 씨도 날 너무 좋게 보지 마세요.”

“저, 도현 씨 좋게 본 적 없는데요.”
“정말요?”

“예에. 정말로요.”
은서는 일부러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좋게 봤겠죠? 그래서 나온 거 아니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퇴근 길에 잠깐 들어갔다 나올 생각이었다고요. 바람 맞힌다고 오다가다 안 만나지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퇴근 길에 자주 날 봤다는 사람인데요.”

차가 호텔 현관에 이르자 도현이 차를 세우며 돌아보았다.

“그럼 퇴자 놓을 심산이었군요?”

 

 

“저기, 대답하기 좀 그렇네요. 알아서 챙겨 들으세요.”

도현이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씁쓰레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은서는 농담이 지나쳤나 싶었지만 수습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보았다. 그러나 도현은 내리라는 말도 없이 혼자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따라 왔으면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표명한 거나 다름없는데, 도현의 행동은 처음부터 그가 경솔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은서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설레던 마음이 싹 가시며 무턱대고 따라 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도어맨에게 차 키를 건넨 도현이 돌아와 조수석문을 열었다. 은서는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냉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입을 열려는데, 그가 옆으로 서며 손을 그녀 쪽으로 펼쳤다.

 

 

“우리 손 잡고 들어갈까요?

“예?”

“직장에 여자를 처음 데려온 길인데, 이왕이면 기억에 남을 인상을 심어 줘야죠. 손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죠, 은서 씨?”

“저어기…….”

“나 은서 씨에게 관심이 더 많아졌어요. 퇴자 놓지 못하게 하려면 두 배로 잘 모셔야할 것 같군요. 자, 부탁이에요. 내시일벌레한 별명 떼어 줄래요? 앞으로 이 빚 수만배로 갚죠.”

은서는 문득 자신이 새침하게 군 것을 도현이 간파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 말은 저렇게 해도 믿는 구석이 없으면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여자에게 손을 잡아 달라는 소릴 못할 것 같았다. 일부러 낙담한 척 말없이 차에서 내렸을 거야.

 

 

“그 부탁 안 들어 주고 싶네요. 우리 손 잡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럼, 앞으로 그런 사이가 되도록 예행 연습 좀 하죠. 그건 괜찮죠?”

“예행 연습이요?”

“예. 은서 씨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게요. 단지 듣기 싫은 별명 떼버리자고 은서 씨 호텔로 데려온 건 절대 아니예요. 이제 내 손 잡아 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도현의 눈빛이 꽤 진지했다. 은서는 딴청을 하며 그의 손 가까이에 자기 손을 가져다 놓았다. 잘못 들은 것일까. 아무 의미없이 자기 직장으로 그녀를 데려온 것 같지 가 않았다. 직원들 핑계를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에게로 이끄는 한 방편 같았다.

그런 그가 은서는 싫지 않았다. 그의 말들도 마음에 들었다. 진솔하게 설득하려는 그의 의지가 다분했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질 것 같은 달콤함이 배어났다.

그가 살짝 손을 잡아 쥐었다. 그의 큰 손아귀에 그녀의 손이 온전히 들어갔다. 여자 손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열기가 일순 몸안에 퍼졌다. 그 희미한 흥분감에 은서는 당혹했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을 만큼 그 열기는 강렬했다.

 

 

도현은 아기 피부처럼 매끄러울 줄 알았던 은서의 손이 다소 까칠거리고 차갑자 물을 자주 접하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도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은서의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감쌌다. 곧 그녀의 손이 따뜻해 지고 수분이 피부에 스며들자 아기 손처럼 보들거리고 오밀조밀한 손가락의 감촉이 내부 깊숙이에서 희미한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도현은 낮게 숨을 들이쉬고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시간대의 로비엔 객실 손님보다 부대 시설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도현은 큰 행사가 치러지지 않는 이상 이 시간이면 퇴근을 했다.

 

 

약속대로 고모는 로비 안쪽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현이 정식 소개는 이른 관계라며 레스토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와 은서를 지켜보겠다는 것도 거부했었다. 도현은 그냥 보기만 하라고 강조했다. 어떤 평가도 매기지 말고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만 하라고. 

도현은 고모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은서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로비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기조실장이 여자를 데리고 행차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이 애인 관계가 아니라고 장담할 순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도현은 직원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은서를 먼저 태웠다. 도현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고모 쪽으로 힐끗 돌아보았다. 고모가 약속을 어기고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승차할 태세였다. 도현은 은서가 난처해 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성급히 닫힘 버튼을 눌렀다.

은서는 도현이 버튼을 누르고 비켜서는 틈 사이로 중년의 한 여인을 보았다. 누구를 보고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상대를 향해 오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그녀의 지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현이 레스토랑은 몇 층에 있다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은서의 주의력은 그 순간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문이 닫히고 있었고, 장난기어린 미소를 짓던 여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짙은 화장에 웨이브 진 단발머리의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 순간 은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억 속의 필름 한 조각이 그 여인 얼굴 위로 겹쳐졌다.

아닐 거야! 아니야!

은서는 심장이 무섭게 뛰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강력히 부인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곧 상승하기 시작했다.

 

 

“송아지 등심 요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은서 씨?”

도현은 고모의 약속 위반에 분노하면서 집에 가 있으라는 손짓을 은서 모르게 했었다. 그러자 고모가 야속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고, 곧 쪽문이 고모를 가려 버렸었다. 고모가 충동적으로 쫓아온 것을 보니 은서의 첫 인상이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 같았다. 고모라는 신분을 숨기고 은서를 가까이서 보고자 했을 것이다.

도현은 대꾸가 없는 은서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창백한 은서는 무엇에 홀린 듯이 다음 층 버튼을 세차게 눌렀다.

“은서 씨? 폐쇄공포증 있는 거예요?”

도현은 화들짝 놀라 은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은서는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겨워 눈 앞의 도현이 흐릿했다.

“그런데 왜 그래요? 그만 내릴까요?”

“아, 아니요. 레스토랑에 먼저 가 계세요…….”

“왜 그러는데요?”

띵동!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은서는 당황하는 도현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곤

 

황급히 내렸다. 곧바로 비상구로 달려 간 은서는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