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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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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81회 작성일 15-10-22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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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아!”

옥탑방은 옥상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고, 나머진 마당처럼 사용하고 있어 작은 평상 하나를 갖다 놓았다. 강혁이 그 평상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은서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한은서, 좀 일찍 다녀라!”

강혁이 짐짓 야단치듯 말했다. 강혁이 집에 와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했는데, 굳이 사전에 통보할 필요가 없이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너 와 있는 줄 알았다면 좀 일찍 들어왔을 텐데, 헤헤.”

은서는 잠겨 있는 문을 따고 들어가 밖에 난 백열전구 스위치를 올렸다. 옥상에 환한 밝혀지자 평상 한켠에 검은 봉지들이 눈에 띄었다.

“뭐야?”

“삼겹살하고 소주, 그리고 상추야! 상추는 내가 씻어놨어.”

옥상 구석에 파란 호스가 꽂힌 수도 꼭지 하나가 있었다. 그 곁에 깨끗이 씻은 상처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내일 고객이 지방 내려간대. 할 수 없이 오늘 왔다.”

낮에 강혁이 저녁 먹자고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은서는 눈을 흘겼다.

 

 

“약속 못 지킬 수도 있지. 넌 나하고 약속하면 목숨 걸더라.”

두 평 남짓한 부엌에서 휴대용가스렌지를 꺼내오며 은서가 나무라자 강혁이 그것을 받아 평상에 놓으며 대꾸했다.

“기분 좋을 걸 보니 면접 잘 본 것 같다. 맞아?”

“그럭저럭. 실수를 조금 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떨어질 것 같진 않아.”

“그럴 줄 알고 오늘 온 거야. 축하해 주려고. 그리고 목숨은 아무데나 거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니까 지키는 거지.”

“고맙다 이강혁. 내 소중한 친구야!”

“천만에. 난 고기 굽는다? 넌 술이나 한 잔 해?”

은서가 밥상을 가져와 놓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강혁은 한쪽에 신문지를 펼쳤다.

“뭐? 너 언제 온 거야?”

은서는 냉장고에서 반찬그릇을 꺼내다가 놀라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밥 안 먹었다고 둘러대고 같이 먹어 줄 생각이었다.

 

 

“너 바쁘다고 누구 만나도 금새 들어오곤 하잖아. 그래서 좀 일찍 왔었어. 이제 오는 걸 보니 저녁은 먹었을 테고, 그냥 돌아가자니 나 혼자 가서 밥 먹어야 될 거 같고. 그러니 네가 식사 친구해 주라. 알았지?”

“알았어, 알았는데. 너 여태 거기서 기다렸어? 안 오면 가지 않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놀래긴. 빨리 밥 가져와라. 배 고파 죽겠어.”

은서는 반찬을 가져다 놓고 꼴밤을 한 대 강혁의 이마에 매겼다.

“바보 놈! 또 한 번 무작정 기다려 봐. 그 땐 꿀밤 두 대야! 끼니 놓치면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 몰라. 명심해? 알았어?”

“너나 놓치지 말고 잘 챙겨 먹어. 제발 살 좀 쩌라. 말랑갱이야!”

 

 

“돈 주고 살 빼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더러 살 찌라니! 이 정도면 섹시하지 말랑갱이냐?”

은서는 뱅그레 한 바퀴 돌았다.

“내 눈엔 너 말랑갱이야. 어서 밥이나 퍼 와. 고기 다 익었어.”

강혁이 마땅치 않은 듯이 말하며 고기를 뒤집었다. 사실 은서는 좀 야윈 편이었다. 궁핍해서 마른 것은 아니었고, 체질이 아무리 먹어대도 살이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러나 강혁의 눈엔 하루 한 끼는 굶고 사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들리는 날에 행여 냉장고가 비워 있으면 혼자 나가 이것저것 잔뜩 사와 챙겨 놓았다. 

“찬밥이야. 괜찮지?”

“그럼. 술 잔도 가져와라. 삼겹살엔 소주가 최고잖아.”

 

 

은서는 강혁이와 간혹 술잔을 기울였다. 여기 집에서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 가지고 둘이 나눠 먹었다. 집에선 삼겹살이었고 포장마차에선 어묵이었는데, 안주거리보다 둘이 회포를 푸는 재미가 술맛을 돋구었다.

은서는 밥과 국을 퍼 오고, 마지막으로 술잔을 가져와 강혁이 맞은편에 앉았다. 강혁이 술병을 따서 은서 잔에 채웠고 은서는 강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우리 축하하자.”

강혁이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래, 고마워 강혁아!”

은서가 그의 잔에 술잔을 부딪치려 하자 강혁이 피하면서 큰 기침을 한 번 했다.

“흠!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왜 이래?”

“뻔한 얘기잖아. 나 쑥스러우니까, 그냥 짠 하고 잔이나 부딪치자. 그리고 아직 합격 통지서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거지만 축하해 줄 일이 또 있거든.”

강혁이 뭔가 즐거운 듯이 입 가득 미소를 물었다.

“그래? 내가 너 축하해 줄 일이냐?”

“아니!”

“그럼?”

“내가 너 축하해 줄 일. 고아원 친구로써 진심으로 축하해 줄 일.”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난 축하받을 일 또 없다니까!”
“엉큼하긴! 너 진짜 실망했다! 난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건 없는지 알았거든. 사귀는 남자가 생겼으면 이 오빠한테 소개시켜 줘야지! 뒷북치듯이 이제야 축하해 주게 만들어! 앞으로 또 그랬다간 꿀 밤 세 대다!”

은서는 창피해서 얼굴이 귓불까지 빨개졌다. 강혁이 도현의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옥상에서 차 안은 안 보일테지. 그런데도 도현에게 당한 키스 장면을 강혁이 죄다 본 것처럼 낯뜨거웠다.

 

 

“봤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창피스럽니?”
“한두 살 먹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 생긴 게 뭐가 창피해! 다음부턴 비밀 없기다! 자, 축하해!”

강혁은 자기 동생이 혹은 절친한 동성 친구가 애인이 생긴 것처럼 흐뭇해 하며 축하를 해 주는 얼굴이었다.

“축하까진 아니고! 하여간 고마워! 무지 창피하긴 하지만!”

은서는 강혁의 잔에 건배를 하고 술을 쭉 들이켰다. 소주의 쓴 맛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혁이 상추에 삼겹살을 싼 쌈을 내밀자 은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똑같은 쌈을 만들어 강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어서 둘 다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만난지 오래됐니? 꽤 고급차던데?”

“이제 두 번!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야. 호텔 기조실장인데, 만나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 더 만나봐야 알겠지만. 기회가 되면 소개시킬게. 됐지?”

 

 

“반드시 소개시켜야지 무슨 소리야. 내가 네 보디가드라는 거 잊었니?”

강혁이 짐짓 언짢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하자 은서는 지금껏 의지해 온 그에 대한 고마움이 물씬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항상 내 곁에 있어 줬지. 고마워하고 있고.”

“고마워할 것 까진 없어. 따지고 보면 너도 항상 내 곁에 있어 준 거니까. 그런데 솔직히 좀 걱정이 된다, 은서야.”

“왜?”

“그냥 친구라면 개의치 않을 일이지만, 행여 너 상처받게 되는 건 아닌지 싶어서 말야. 물론 네가 판단하고 알아서 하겠지만 돌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고, 조심스럽게 호텔 기조실장이란 사람 만났으면 한다.”

 

 

강혁은 예리하게 은서의 마음을 읽어냈다. 은서가 도현을 이성으로서 끌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은서는 그가 고급차라고 말했던 점을 상기했다.

“잘 알았어 강혁아. 무슨 뜻인지 잘 알았어.”

형편이 엇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차후에 문제 발생 소지가 적다는 것을 강현이도 알고 은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오면서 몸소 체험한, 무시할 수 없는 편견의 벽이었다.

“그런데 도현 씬 열린 사람 같았어. 내 형편에 대해 전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거든. 하지만 안심하지 않고 네 말 염두해 두면서 만날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강혁아.”

“고맙긴, 당연한 거지. 너도 나 염려해 주잖아, 항상. 자 술이나 한 잔 더 하자.”

강혁이 도현에 대해 염려스러운 점을 다 말했다는 듯 얼굴을 펴고 잔을 들었다. 은서는 그의 잔에 건배를 하면서 이렇게 간섭해 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강혁이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은서는 아까처럼 술을 쭉 들이켰는데, 이번엔 쓰지 않고 달짝지근했다.

“강혁아, 나 오늘 엄마 봤다!”

은서는 왈칵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다. 남편과 딸을 등지고 떠난 사람의 모습치고는 너무 유복해 보였다. 곱게 나이 들어 가는 엄마의 모습 어디에도 독한 그리움은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그 지인이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짓궂은 미소와 앙탈 부리는 것 같은 얼굴 찌푸림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지, 삶의 고초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때 은서는 동화 같은 상상을 했었다. 갑부가 된 엄마가 버린 딸을 잊지 못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결국 찾아냈고, 상봉하는 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용서를 비는 상상은 은서를 동화속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건 은서의 상상일 뿐이었지, 현실은 늘 가혹했고, 기다리는 엄마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날 잊은 거야. 은서는 강혁에게 엄마 얘기를 꺼내면서 불쑥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뭐? 어디서?”

강혁이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물었다.

“우연히. 기억이 너무 흐릿해져서 내심 걱정했었어. 아무리 떠올려도 엄마의 얼굴이 뚜렷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뵈니까 알아보겠더라. 분명 엄마였어.”
“오 이런! 그래, 얘기는 나눴니?”

강혁이 제 일처럼 흥분했다.

“놓쳤어. 긴가민가하던 순간 때문에 그만…….”

은서는 도현의 호텔에서 엄마를 발견했고, 곧장 뒤쫓아 내려왔으나 엄마가 차를 타고 사라지는 뒷배경에 자신이 서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간략하게 덧붙였다.

“간발의 차이였구나! 마음이 아프지?”

 

“응, 아파 강혁아. 하지만 살아 계신 것을 확인했잖아. 또 만나지지 않을까 싶어.”

“그러지 말고 우리가 찾아보자.”

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서 그래. 외가쪽 기억이 전혀 없다니까. 엄만 날 외가에 데려간 적이 없었어. 아니, 있었을 거야. 내가 기억 못하겠지. 어쨌든 내 기억엔 외가쪽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우리 식구가 살던 아파트는 재개발되어 그 자리에 다른 아파트가 지어졌고.”

“아버지가 호텔 사장님이었다고 하지 않았니?”

“맞아. 그런데 난 그 호텔에 가 본 적이 없어. 엄마가 집을 나가고, 빚쟁이들이 집에 들이닥치기 전까지 난 아빠가 다른 집 아빠들처럼 회사에 다닌 줄 알았어. 그렇게 아빠 사업이 잘못되고, 잠시 맡아 주셨던 가정부아줌마가 나더러 아빠 호텔을 찾으라고 말해 주셨어. 이 다음에 커서 꼭 네 아빠 호텔을 찾으라고.”

 

 

“그럼, 우리가 그 아줌마를 찾아보면 어떨까? 그 아줌마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르잖아. 설령 호텔 이름만 알고 있다 해도, 그 호텔 관계자들을 추적해 보면 너의 엄마를 찾는데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
강혁은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은서가 동의만 하면 곧장 엄마 찾는 일에 착수할 것처럼 적극적이었다. 사실 은서는 가정부 아줌마 얘긴 강혁에게 하지 않았었다. 갓난아기 채 버려진 강혁은 부모의 기억이 아예 없었고, 그런 그에게 엄마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꺼낼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더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혁이 몰래 은서는 그 아줌마가 살던 동네를 찾아 헤매었다.

 

 

며칠 지냈던 아줌마 동네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에 갈 때와 아버지가 새로 얻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몇 번 버스를 탔었는지, 당시엔 경황이 없어 눈 여겨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길과 성냥갑처럼 붙어 있던 구옥들이 전부인 기억에 의존해 서울의 달동네를 뒤지고 다녔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집들과 골목들이 달동네마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은서였다. 그때가 고아원에서 나와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초창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시간이 조금만 나면 찾아 헤매던 짓을 끝내 낙담어린 한숨을 내쉬며 접어야했었다.

 

 

“그 아줌마가 어디서 사는지 몰라, 강혁아. 내가 좀 멍청했었나 봐. 도대체 아는 것이 통 없거든.”

그런 은서가 안타까운 듯 강혁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걱정 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너의 엄마가 널 찾고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나라에 고아원이 한둘이니? 우리가 지냈던 고아원만 찾게 되면 너의 엄마가 널 만나러 먼저 올 거다. 내 말 믿어? 알았지?”

“고맙다 강혁아!”

은서는 그렇게 믿어 보려고 애쓰며 대꾸했다.

강혁이 돌아가고 혼자 남겨졌을 때도 그 생각은 유지되었다.




 

 

“도현아, 이리 와 앉아 봐!”

거실 소파에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가 과일을 먹고 있다가 도현이 들어오자 신통한 듯 쳐다보았다. 여자를 돌 같이 여기던 도현에게 교제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할 얘기 없어, 고모. 아버지 어머니 저 올라갑니다!”

도현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동승하려던 고모를 쏘아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만일 은서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을 알았다면 불쾌했을 것이다. 신뢰감이 무너지면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지 않는가. 도현은 아찔했던 그때의 감정을 털어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가방을 올려 놓았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그는 습관적으로 전원을 켜고 의자에 앉았다. 심플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그의 널찍한 방엔 더블침대와 책상, 오디오, 영화감상용 대형 텔레비전, 런닝머신, 소형 옷장이 알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도현은 바탕화면에 뜨는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서에게 키스를 하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키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밀려드는 허전함에 그녀를 불렀고, 돌아보는 얼굴에 일순 탐욕이 일어나 충동적으로 키스를 하게 되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만지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욕망이 더한 무엇인가를 원했을 것이다. 그녀를 구체적으로 느끼고 싶은 강렬한 욕망. 그것은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자신의 입술이 확연히 대변했다. 입술을 포개고 부비는 것만으로 부족해 난폭하리만치 강하게 빨아대던 자신의 입술.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주던 강한 자극. 도현은 무섭게 일어나는 또 다른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얼른 그녀를 놓아 주었다. 마약 같은 입술이었다. 지칠 줄 모르고 빨고 싶고 핥고 싶고 깨물고 싶은 중독성을 가진 은서의 입술.

 

 

도현은 그런 욕망이 아무 여자한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체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사랑도 욕망도 없는 것이다. 다부진 것도 같으면서도 연약한 구석을 숨기지 않는  은서의 솔직함에 도현은 정 덩어리 하나가 추가되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보다 더 그녀와 소통하게 된 것 같았고. 야릇한 즐거움이 마음속에 가득차 오르는 기분이었었다.

은서의 어느 모습보다 그녀가 마음을 연 그 순간이 매력적이었으며,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당혹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너무나 달콤했었다.

도현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녀에게 접근했고 끌리는 대로 행동해 마침내 마음을 녹이는 한 여자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고 만족스러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예감이 좋았다. 은서와 잘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똑 똑!

노크 소리에 도현은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나다, 고모! 들어간다!”

도현은 닥쳐올 성가실 일로 미간을 찌푸렸다. 고모가 은서를 만나보고 출국하겠다고 우길 것만 같았다. 어림없는 바람이지.

“들어 와, 고모!”

아무 꺼리길 것이 없다는 듯 고모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얼굴로 들어오더니 침대에 걸터 앉았다.

 

 

“고모, 약속을 위반했으면 사과부터 하셔. 응?”

도현은 유학 생활 내내 뒷바리지해 준 고모와 정이 많이 들어 일상적인 대화는 터놓고 지낸 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고모와 더 가깝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사과는 무슨 놈의 사과! 내가 그 아가씨 좀 보자고 가면 싫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타게 해 줘야지, 큰 일 날 것처럼 가라고 손짓하고, 그 아가씨 눈치 보고? 사내 자식이 그렇게 옹졸해 가지고 어디다 쓰겠니!”

고모는 불만을 쏟아놓으며 혀를 쯔쯔 찼다.

“앞으론 고모 믿지 말라는 소리같네.”
“내 말은 약속 지킬 것이 따로 있다 이 말씀이야. 사람을 어떻게 멀리서 보고 평가할 수 있니? 네가 평가 같은 거 내리지 말라고 한 거 기억하지만, 그것도 말 안 되는 소리인 건 마찬가지고.”

 

 

도현은 은서를 보여주겠다고 내세운 조건을 깡그리 무시하는 고모의 뻔뻔함에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호텔에선 고모가 은서를 좋게 본 것 같아 치미는 분통을 억누를 수 있었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나오는 걸로 봐서 은서의 첫인상이 고모의 눈에 차지 않은 것만 같았다.

“실망이야, 고모. 그리고 미리 말하는 데, 고모 평가 듣고 싶지 않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번 보고 이렇다저렇다 비평하지 말란 소리에요. 그만 내려 가, 고모! 나 할 일 많아!”

“호호호! 호호호!”

고모가 느닷없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너 겁 먹는구나? 내가 별로라고 말할 까 봐 두려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