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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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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06회 작성일 15-10-28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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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회사 건물에서 나와 반대편으로 가는 미애에게 손을 흔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아침부터 산통이 깨진 하루였다. 일찍 나와 사무실 청소를 하며 하루 일정을 머릿속으로 계획하는데, 제 시각에 딱 맞춰 출근하던 영주가 이른 시각에 사무실에 들어서더니, 자기 방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한은서 씨? 헤픈 여자 쪽이예요?”

“옛? 무슨 말씀이신지?”

다짜고짜 헤픈 여자 쪽이냐는 질문에 영문을 모른 은서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아무에게나 팔 잡히는 여자인 것 같아서요?”

그제야 어제 일이 떠오른 은서는 영주의 황당한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말씀이 지나치세요, 팀장님. 그 사장님께서도 그런 여자로 보고 제 팔을 잡은 건 아니었고요. 할 말이 남아서 절 부르는 제스처였다고 해명 드립니다.”

“그런 여자로 보고 잡은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옛?”

 

 

“난 헤픈 여자와 같이 일 못합니다. 처신 잘 하세요.”

“팀장님, 그건 제 의지와…….”

“그만 나가 보세요!”

영주가 책상 위의 작은 집기들을 탁 탁 소리나게 옮겨 놓으며 자기 감정을 드러냈다.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는 영주를 물끄러니 바라보다 은서는 물러나와야 했다. 하던 청소를 마무리 짓는 데 분통을 억제하길 없어 결국 눈물이 솟구쳤다.

“팀장 재수땡이가 울렸니?”

미애가 부어오른 은서의 눈을 보고 자기 일마냥 분노하자, 은서는 어설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계집애 혼자 엘리베이터 탄 날, 층 중간에서 고장이나 나버려라. 그리고 24시간 못 고쳤으면 원이 없겠다.”

그러면서 은서 귀에 대고 영주에게 열여덟이라는 욕을 해 주었다. 씨팔, 팀장 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은서 앞에 차 한 대가 달려와 멎었다. 낯이 익은 차라고 생각하는데, 차 문이 열리며 빈우가 성큼 내렸다.

 

 

빈우를 보자 아침 일이 되살아난 은서는 기분이 단박에 다운되었다. 영주와 애인 사이로 유추되는 빈우였다.

영주 모시러 가는 길에 날 본 모양이지. 그냥 가지 왜 또 아는 체 하려는지 몰라. 내일 아침에 또 깨지라고. 

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회사 쪽을 살피는 스스로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내 차를 버스로 이용하시죠, 은서 씨?”

빈우가 싱글거리며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가던 길이나 가세요. 팀장님, 아직 사무실에 계세요.”

“영주 데리러 온 거 아닙니다. 내가 밥 한 번 산다고 했었죠? 그 약속 지키고자 일부러 시간내 여기까지 왔습죠, 후후. 안 봐도 영주 심통 받아주랴 힘들었을 거 알거든요. 영주가 한 성깔 하잖습니까. 그 생각하니 미안해서 가만 있을 수가 없더군요. 자, 타세요? 원하는 거 사 드리죠!”

 

 

별 싱거운 남자 다 있네. 은서는 제 멋대로 한 약속을 지키고자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는 빈우의 해명에 기가 탁 막혔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주 눈에 띌 것이 겁나 어디서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원하는 거 없어요. 그리고 팀장님이 심통 부릴 일이 뭐가 있을까 모르겠군요. 넘겨 짚지 마시고 어서 가세요. 곧 버스가 올 거예요.”

빈우 앞에서 영주를 씹는다는 것은 미친 짓 일것이다.

“일부러 왔는데, 그냥 가라고요! 후훗, 농담도 심하시네요, 은서 씨. 같이 밥 한 번 먹는 것이 뭐 그렇게 힘들까 싶기도 하고 말이죠.”

“자꾸 이러면 팀장님께 일러바칠 거예요.”

“뭐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서약을 한 사이도 아닌데요 뭐.”
“정말 저 화 내요. 그리고 저 아무하고나 밥 안 먹어요.”

 

“좋습니다. 그럼 식사는 관 두죠. 여기까지 왔으니 모셔다만 드릴게요. 아까 농담이 진담이 되네, 이거 참. 설마 이렇게까지 읍소했는데, 내 차를 버스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진 않겠죠. 동네 정류장까지만 모실게요.”

은서는 왠지 능글맞아 보이기 시작하는 빈우를 쓱 쳐다보곤 고개를 까닥 숙였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은서가 자리를 피해 버리려 하자 빈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사실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어요. 영주가 왜 은서 씨에게 그토록 민감한 지 궁금해 죽겠더군요. 다른 뜻 없으니, 집에 가는 동안만 우리 얘기 좀 하죠.”

“정말이세요?”

 

 

“예, 정말입니다. 내가 은서 씨에게 다른 볼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렇다고 해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어요. 사실 나도 잘 모르거든요.”

“그래요……? 난 영주가 은서 씨에게 피해 의식이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 타세요? 가면서 얘기하죠. 괜찮죠?”

은서는 영주를 의식했지만, 빈우가 차 문을 열고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다. 거절할 명분이 약해져서 일 것이다. 또한, 빈우의 궁금증이 곧 은서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영주의 히스테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어쩌면 빈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지 몰랐다. 피해 의식? 빈우의 진단이 터무니없이 생각됐지만, 얘기를 하다보면 영주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은서는 영주에게 시달리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은서의 사는 동네를 물은 빈우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빈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빈우는 연결된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퇴근 시간쯤이면 늘상 전화를 넣어 주었던 빈우였다. 그러나 오늘은 깜박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퉁명한 음성은 영주의 목소리였다. 가뭄에 콩 나듯이 먼저 전화하던 영주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건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긴, 사무실이지!”

실제로 이 시각이면 빈우는 회사에 있는 것이 맞았다. 어젠 영주의 백화점 사장 딸 친구가 생일이라고 해서 일찍 퇴근해 영주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빈우의 퇴근 시각은 8시였다.

[그래?…… 알았어.]

 

 

“퇴근하는 길이니?”

빈우의 말은 영주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영주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매일 오던 전화가 오지 않아 그냥 걸어본 것 같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영주입니다. 우리가 같은 차에 탄 것을 본 것 같은데, 어쩌죠?”

빈우는 괜히 골려 주게 만드는 은서를 보고 짓궂게 말했다. 다소곳이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은서의 모습이 새삼 눈길을 끌었다. 소년도 아닌데, 물결 하나없이 잔잔한 호수를 보자 돌을 집어 수제비를 뜨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 호수가 은서였다.

 

 

“뭐, 뭐라고 했어요?”

은서는 도현의 차에 앉아 있을 때, 그 설레고 두근대던 기억을 음미하고 있었었다. 낮에 통화한 도현은 새벽에 출발해 해운대 세르비아호텔에 와 있었다고 했었다. 용무를 보고 올라가면 늦은 밤일지 모르지만, 그 전에 도착하면 은서 동네로 잠깐 들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서는 옆에 남자가 있자, 도현이 생각이 물씬 났고,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영주 전화였다고요? 문제는 영주가 우릴 본 것 같다는 겁니다?”

 

 

“넷? 정말이에요?”

은서는 낭패감에 사로잡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빈우 눈에 그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

“거 봐? 영주가 분명히 어제 일로 은서 씨에게 뭐라고 한 거야. 대체 영주하고 은서 씨 사이에 어떤 비화가 있는 겁니까? 영주는 분명히 은서 씰 경계했어요.”

“경계가 아니라 미운 털이 박혀서 그런 거에요. 미운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올라오잖아요. 아마 제가 팀장님께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속내가 발각된 것 같아 은서는 원통한 심정을 살짝 털어놓았다. 영주가 빈우 차에 탄 것을 목격했다면 헤픈 소리 이상의 악담을 듣게 될 것 같았다. 빈우가 중재를 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속내를 내비치는 은서의 마음속을 스쳐갔다.   

온종일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창에 톡 톡 떨이지던 빗방울이 우두둑 쏟아지자 빈우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미운 털이 왜 박혀요? 출근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제가 모르는 잘못을 팀장님께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한은서라는 사람 자체가 눈에 거슬리는 것 같기도 하고. 휴, 팀장님과 원만하게 지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그렇습니다까…… 잠깐만요.”

휴대폰이 삑삑 진동했다.

 

 

[어디야?]

영주가 대뜸 날카롭게 외쳤다. 영주가 왜 다시 전화했을까 의아해 하며 백밀러를 쳐다보았다. 혹시 영주 차가 따라오는가 싶었다.

“왜? 저녁 같이 하고 싶어?”

[묻는 말에 대답해? 어디야?]

영주가 사무실에 없는 것을 알아냈을까. 설마 그런 짓을 왜 하겠어?

“근무 중이라니까. 회사에서 불쾌한 일 있었어?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데.”

[누가 불쾌하게 하는데!]

그러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영주였다. 빈우는 즉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빈우의 질문을 받은 비서가 대답했다.

 

 

[예, 사장님. 박영주 팀장의 전화가 조금 전에 있었습니다. 언제 나갔냐고 묻길래, 1시간쯤 됐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빈우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절로 웃음이 비직비직 나왔다. 좀체 마음속을 보여주지 않고 심드렁하던 영주가 그를 믿지 못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의심을 다 하나니. 그것도 사무실에 전화까지 걸어서 확인하는 수고를 자처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여자를 온갖 공을 다 들여가며 노심초사하지 않았던가.

빈우는 새로운 관점에서 은서를 흘끗 쳐다보았다. 원 나잇 스탠드 레벨 수준의 여자로 인식돼 그닥 관심을 일으키지 않았던 평민 한은서가 단박에 영주 급 반열에 올라서는 느낌이었다. 영주는 은서를 대등한 위치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주는 은서를 시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동기가 무엇이든 영주 눈에 은서는 경쟁 상대가 될만한 매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영주가 어떤 여자로 인해 그를 의심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도도하고 오만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외모와 배경에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더 있었다.

사실, 은서가 막강한 배경을 가진 여자였다면 단연 돋보였을 것이다. 면접실에서 알 수 없는 억하심정에 연애질이나 하는 하찮은 여자로 인식되도록 감정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은서는 결코 질리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첫눈에 반하는 미인과는 차별되는 어떤 마력이, 시원스런 눈빛과 입을 움직일 때마다 그려지는 기분 좋은 미소에서 풍겨나왔다. 하지만 빈우에게 은서의 첫인상은 중대한 면접을 앞두고 남자와 히히덕거리는 함량미달의 여자였었다. 억하심정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팀장님 같은데?”
은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맞아요, 영주예요. 별 일 아닙니다. 참, 영주가 우릴 봤다고 한 건 농담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건 여담인데, 얼굴이 참 기분 언짢게 생겼습니다, 한은서 씨?”

“옛?”

“같이 있어 보니까, 괜히 짓궂은 짓이 하고 싶어지는 것 있죠.”

은서는 기가 막혀서 한 마디 쏘았다.

“됐거든요. 그리고 내게 농담하지 말아 주세요.”

어둠이 일찍 온 거리에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은서는 익숙한 건물들이 스치는 것을 보고 집에까지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 잠깐 가리자고 우산을 사는 것은 낭비일 것이다. 옷은 세탁할 때가 되어서 젖어도 무방했다.

믄득 빈우 차를 왜 타고 왔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돌이켜보니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꼭 무엇에 홀려서 후회할 짓을 하고 만 것처럼, 동네에 이르자 기분이 찝찔했다.   

 

 

“기분 나쁘세요?”

“당연하죠. 열 뻗치네요, 정말.”

“진짜인 거 같네요. 미안해요. 내가 쓸데없는 소릴했군요. 사과의 의미로 영주가 왜 은서 씨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말해 주죠. 참, 어디쯤에 세울까요?”

“저기 횡단보도 건너편 아무데나 세워 주세요.”

은서는 세울 곳을 가리키고는 빈우를 쳐다보았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조합해 보니, 영주에게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어떤 요소가 은서 씨에게 있는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요,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그런 것 같아요. 영주에게 홍역과도 같은 사랑이 있었다네요. 그때 감정을 모두 소진해 버렸는지, 그 후로 남자는 내가 처음이라더군요. 영주는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 안 해요. 영주 친구가 슬쩍 알려 줘서 알았죠.”

 

 

빈우가 은서네 골목 초입 근방에 차를 세웠다.  

“그런 영주가 이유없이 은서 씰 미워한다? 이거 예전에 사귀던 남자와 관련 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 남자가 바람을 피웠었나? 은서 씬 그 상대여자를 닮았고?”

“닮았다는 이유로 보복할 심보가 생긴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됩니까?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는 소지가 있잖아요. 내가 영주의 남자친구이고, 외근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종종 영주 사무실에 들렀었는데요. 이거 재밌어 지는데요?”

“재미요? 팀장님이 여자친구라면서요? 여자친구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고통받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고요? 기분 나쁜 것이 아니고?”

 

 

“참, 그런가…….”

빈우는 얼버무리고 밖을 살피더니 은서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에, 조수석 문을 톡톡 치는 빈우의 손에 우산에 들러져 있었다.

“괜찮은데…….”

은서는 차에서 내려 우산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빈우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중에 돌려 주세요.”

빈우가 싱거운 소리를 하며 우산을 넘겨주는 순간, 불쑥 차가운 손이 침입해 은서의 손목을 낚아 챘다.             

“가자, 은서야!”

 

 

도현이었다. 도현이 왜 여기에? 은서는 서울에 일찍 도착하면 동네에 들릴 것이라고 했던 도현의 말이 스쳐갔다.

도현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를 맞고 선 도현의 양복은 빠르게 젖고 있었고, 머리를 적신 빗물이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짙은 눈썹 아래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분노와 같은 강한 빛이 이글거렸다.

“도현 씨…….”

은서는 도현의 사나운 손길에 팔목이 잡힌 채 끌려가듯 그가 이끄는 대로 종종걸음을 내딛어야했다. 골목 초입 한 켠에 도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도현은 차문을 열고 은서를 밀어넣었다. 운전석에 오른 도현이 시동을 걸고 곧 차를 출발시켰다.   




은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차를 모는 도현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긴 했지만, 그 오해의 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용납 여부를 결정할 것이었다.

거센 빗줄기는 좀체 기세가 꺾이지 않고 차창을 후려쳤다. 차는 강변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한강 둔치로 접어 들었다. 인적이 없는 둔치를 보안등이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공터를 가로지른 차는 어느 순간 거친 마찰음을 내며 급정거했다. 차 안이나 바깥이나 칡흑같이 어두웠다. 가장 가까운 곳의 보안등도 한참 떨어져 있는 깊숙한 곳이었다. 차가 정지했지만, 도현의 침묵은 몇 분 간 이어졌다.

 

 

“아니라고 말해?”

의외로 도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여태껏 울분을 삭이느라 입을 붙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은서는 도현의 첫 마디가 역시나 쪽이어서 내심 실망스러웠다.

“뭘 말이에요?”

도현이 2초쯤 가만이 있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혁이와 같은 류의 친구가 아니라고?

“그러길 바라는 거에요?”

 

 

“진실만 말해.”

“어쩔 건데요? 그냥 친구가 아니라면, 어쩔 건지 먼저 말해줘 봐요?”

도현의 숨소리가 가쁘게 들렸다. 앞 유리에 부딪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튕겼다. 은서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꼭 쥐었다. 도현이 사랑하는 것인지, 그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인지, 곧 판가름이 날 것이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내 자신을 부서버릴 거야.”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