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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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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35회 작성일 15-10-30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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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랑을 품다




은서는 근처 식당에서 미애와 점심을 먹고 돌아와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미스 한이랑 무슨 원수진 것 같아. 팀장 년말이야?”

미애는 아침부터 홈페이지 기안 건으로 깨진 은서가 옥상에서 팀장이 보자고 했다는 소리에 자신의 일처럼 분개해 주었다.

홈페이지 개편에 오락적인 컨텐츠를 몇 개 가미했더니 영주는 회사 홈페이지이냐 아니면 게임 사이트냐면 동료들이 다 보는데서 날카롭게 질책했었다. 게임사이트에서 사라진 갤러그 같은 추억의 게임 몇 개를 한쪽 귀퉁이에다 배치해 방문객들의 놀이터로 제공하자는 취지였는데,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화를 내는 영주 앞에서 은서의 차분한 설명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다시 작성해 올리세요. 홈페이지는 인터넷 상에서 우리 회사의 얼굴이에요. 오락적인 요소로 방문객들을 끌어 보겠다는 발상, 케케묵어 썩은 냄새가 나는 아이디어입니다. 역량이 안 되면 그만 두시던가요.]

솔직히 추억의 게임은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서비스와 관련해 접속하는 방문객들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작용할 소지가 충분했다. 동료들도 그 점을 높이 사 주었었다.   그리고 다양한 컨텐츠 중에서 극히 일부인 몇 꼭지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주는 중요 사안들은 통째로 빼버리고 있으나마나 할 정도로 비중이 작은 컨텐츠로 그만 두라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은서는 업무와 관련된 질책에 토를 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순응했다. 상사로서 충분히 질책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은 떨칠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 후에 얘기 좀 하죠.]

영주가 점심 시간 직전에 인터폰으로 한 소리였다. 은서는 사직을 권고하는 미팅이 아닐까 싶어서 식사 내내 서러움과 분통과 걱정으로 식욕을 전혀 못 느꼈다.

 

 

미애가 전 번에 팀장을 만난 건에 관해 물었지만 은서는 지나치게 사적인 일이어서 대강 얼버무렸다. 그러자 네 주제를 알란 식의 충고를 한 줄 알고 미애는 더욱 광분했고, 원수 얘기로까지 비약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업무에 관해 철두철미한 영주였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부하 직원을 핍박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미애가 보기에도 영주는 공과 사를 구분 짓지 않고 은서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는 모양이었다.

은서는 회사를 사직하라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한 심정으로 옥상 문을 열었다. 이른 퇴사나 권고 사직은 다른 기업에 취직하는 데 결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은서는 도현과의 결혼이 예정되었다고 해도 식을 올리기 전까진 일을 다닐 생각이었었다. 23년 간 공부해서 갖게 된 직장을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벗어 던진다는 것은 결혼이란 전제에도 불구하고 아쉽고 허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결혼을 생각하면 도현과의 이별이 먼저 떠올랐다. 그를 떠나 보내야 할 앞으로의 시간들이 은서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으며 가슴을 찢어 놓았다. 더불어 잃어버린 엄마도.

은서는 젖어오는 가슴과 눈시울을 크게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접어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주의 뒷모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근친상간의 짓은 은서 스스로 용서하기로 했다. 용서 이외에는 해답을 찾을 길이 없는 문제였다.

아무도 모르면 된다. 나 혼자 알고 묻어 버리면. 신이 단죄를 한다면 달게 받을 것이다. 다만 더 이상 연장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인륜에 반하는 사랑임을 알게 된 이상 멈추는 것만이 신의 노여움을 가중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영주가 담배를 휙 던지고 돌아섰다. 영주의 싸늘한 눈빛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었고 대할 때마다 빈정 상했지만, 오늘은 사뭇 얼음 송곳이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오싹하게 만들었다.

 

 

“퇴사 문제 생각해 봤어요?”

역시 예상대로 영주는 그 문제를 언급하고 나왔다.

도현이 개입되기 전에는 그만 두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었다. 그와 헤어질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해 눈 앞에서 쫓아내고 싶은 것일까. 지난 기억이 자꾸 상기된다고 상사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짓은 비열한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대항할 힘이 없는 은서였다.

“저, 그만 두고 싶지 않아요, 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기회요? 기회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영주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은서 씨 하기 나름 아니겠어.”

“홈페이지 개편 건은 죄송해요. 팀장님의 결재가 떨어질 수 있는 기안을 열심히 짜 보겠습니다.”

“의외네요, 은서 씨. 관 두라고 하면 당장 사표 써 낼 줄 알았어요. 사모님 소리 들을 분이 이깐 직장에 연연할 줄은 예상 밖이야.”

영주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작성된 홈페이지 기안을 보고 내심 탄복했었다. 오락성 컨텐츠도 비중이 큰 컨텐츠들과 조화를 이뤄 합당할 만한 요소로 승인되는 사안이었었다. 그러나 결점을 잡고자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영주에게 무사 통과는 있을 수 없었다. 해서 영주는 트집거리로 삼아 은서를 질책하면서 그녀와 도현의 사랑이 회사를 그만 둬도 될만큼 진행되었는지 확인해 본 것이었다. 결과는 눈 앞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직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은서를 간파하면서 영주는 좌절과 아픔의 나락에서 비상하기 시작했다.

“…….”

 

 

영주의 날카로운 지적에 은서는 도현을 보내야 하는 아픔으로 가슴속이 출렁거렸다.

은서가 아무 대꾸도 없자 영주는 그들의 사랑이 뿌리 깊지 않음을 재차 확신했다.

“사실 난, 은서 씨가 회사 그만 두는 거 절대적으로 원치 않아. 내 후배 생각이 나거든.”

“옛?”

“난 그 애에게 농락당했지. 최근에 알았어. 그 빚을 은서 씨에게 받고 싶어.”

은서는 영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파악하지 못했다.

“도현 씨와 잘 돼 가?”

“그건 저의 사생활이에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은서는 영주에게 도현과 헤어질 거란 소리는 죽어도 하기 싫은 자신을 발견했다.

“이젠 은서 씨만의 사생활이 아닐텐데. 도현 씨가 말 안 했나 보지?”

쳐다보는 영주의 눈빛이 멸시와 오만으로 가득찼다.

은서는 도현의 사랑을 굳게 믿었다. 곧 그와의 사랑이 부서지는 길을 가겠지만 아직까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영주의 자신만만한 어감에서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영주가 후배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빈우가 얘기했나. 그렇다면 빈우 씨가 말 안 했나 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사생활이 아니라는 저 오만함, 불길했다. 아까 후배에게 농락당한 빚을 내게 받겠다는 소리는 그 보복을 내게 하겠다는 소리가 아닐까.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짓밟아주겠다는 의미로 들렸으니까.

 

 

도현과의 오해가 해소될 거라는 전제 하에서 함부로 내뱉는 소리일 수 있었다. 아니다. 도현 씨가 말 안 했냐는 영주가 도현을 만났었다는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은서는 그 예감 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소리죠?”

“은서 씨와 내가 사이 좋게 도현 씰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는 없지 않겠어? 한쪽은 짓밟혀야지 않겠냐고?”

그렇구나. 둘이 만난거구나. 하지만 도현 씨가 목숨을 내던질 만큼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데, 영주에게 돌아올 리는 없잖아. 그런 희망을 줄 리도 없잖아.

“잊어는가 본데요, 도현 씬 제게 청혼한 사람이에요. 경쟁은 가당치도 않죠.”

은서는 밀리지 않겠다는 묘한 반발감에 수세적인 입장에서 벗어났다.

영주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피어났다.

“그건 인정하지. 도현 씨가 은서 씰 좋아한 것은 맞더라고.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백팔십도 달라졌어. 도현 씨에게 한이 맺힌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가 그 한을 풀게 해 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거든.”

“천만에요. 도현 씬 팀장님 잊었어요.”

“고작 한 달 전 일이야. 아니 한 달도 채 못된 것 같은데.”

영주의 비아냥에 은서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영주의 지적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도현의 증오심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낙인처럼 박힌 배반감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그를 망가뜨린 영주에게 도현이 돌아갈 리는 없지 않는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버젓이 그의 곁에 있는데.

 

 

“그 전에도 도현 씬 팀장님 그리워하지 않았어요. 그랬었다면 왜 팀장님에게 구애하지 않았겠어요. 타국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굽히고 돌아와 주기를 기다린 거지. 겉으론 날 증오하더군. 우리 만났거든. 강한 부정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알 거야? 난 도현 씨에게서 그것을 읽었어. 그리고 내가 도현 씰 오해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지. 당시엔 변명으로 들렸던 소리가 별안간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는 확신이 서더군. 우린 어리석게도 서로를 상처 입혔던 거야.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강해서 그 믿음이 깨진 순간 이성을 잃었던 거야.”

“도현 씨가 강하게 부정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강하게 부정한 거죠. 다른 뜻이 숨겨진 것은 아니에요. 전 그것을 믿어요.”

은서는 영주의 주장이 착각하고 있거나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비춰졌다. 시기심에 눈에 멀어 증오하던 남자를 찾아간 여자가 아닌가. 은서는 영주가 도현을 찾아갔다고 확신했다. 도현이 그녀를 만나러 올 리는 없을 것이다.

도현을 향한 강렬한 소유욕이 안도감으로 정착하는 것을 은서는 느꼈다.

“그러겠지. 그래서 은서 씨가 우리 회살 그만 두는 것을 난 원치 않는다고 말한 거야. 내심 그런 소리를 해 놓고 그만 둘까 봐 조바심이 나더군. 도현 씨에게 철저하게 버림받는 것을 난 보고 싶거든.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고 갈잎을 먹으려다가 어떻게 되는지, 한은서 씨는 알아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도현 씬 내 사람이었고, 난 내 사람을 다시 찾겠어. 자신의 처지와 냉혹하게 막닺뜨리지 않으려거든 알아서 도현 씨 곁을 떠나. 도현 씬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거든. 반드시 그렇게 만들거거든.”

영주가 눈에 힘을 주고 강한 의지를 내비췄다. 그리곤 먼저 옥상을 내려가는 영주였다.

저것이 영주의 진실한 마음일까. 시기심에서 뛰어 든 소유욕이 아니고 오해가 빚은 결별을 다시 제 자리로 돌리고 싶은 것이 영주의 진심일까.

 

 

영주가 옥상으로 부른 이유는 단 한 가지로 보였다. 도현이와 헤어지라는 협박. 그 외의 소리는 그녀의 망상일 것이다. 오 그러나…….

은서는 다시 도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 그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던 느낌들. 다른 누가 도현에게서 그런 느낌들을 받고 행복해 지는 것이 왜 이다지도 질투심이 나는 것일까.

그와 난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야. 그 외의 생각은 월권 행위지.

은서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가 덮쳐오자 금방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도현이 없이 못 살 것만 같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지?”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앞 두고 도현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영주를 만나 흔들렸을 것 같지 않은, 은서에 대해 확고한 사랑이 깃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의 사랑을 여기서 멈춰줘야 하겠다, 은서야.

은서는 그의 변함없는 사랑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내 주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의 곁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용단을 못 내리게 하고 있었다.

“왜요, 도현 씨?”

“고모가 은서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해서, 내가 좋다고 했는데, 괜찮지?”

도현이 승낙했는 것은 마땅히 은서가 나와야 할 자리라는 암시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유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도현의 요구는 은서를 당혹감 속으로 빠뜨렸다.

“고모님이요?”

“응. 내일이나 모레쯤 출국한대. 그 전에 은서를 꼭 보고 싶대. 고모가 은서 편이었던 거 모르지?”

편이었다는 과거형이 은서를 더욱 긴장시켰다.

 

 

“왜, 왜요?”

“왜긴? 그날 우리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은서 자세히 못 봤잖아. 얘기도 못 나눴고. 그럴 기회를 줘야되는 거 아닐까? 고모가 웬만해서 서운해 안 하시는 분인데, 은서 그렇게 가버리자 섭섭해 하는 기색이 역력해……”

은서는 도현의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이층에서 내려올 때 쳐다보던 엄마의 눈빛이 범상치가 않았었다. 그리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데, 엄마만 아무 대꾸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땐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도현의 집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도현이 천하 태평하게 고모를 만나는 자리를 주선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엄마는 당신을 보고 혼절한 것과 흐릿하게나마 낯이 익은 듯한 은서의 얼굴을 번갈아 생각해 보면서 의혹을 품게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도현에게 만남의 자리를 마련케 한 것 같은 것이었다.  

은서는 갈등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엄마가 있는 자리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혹을 가지고 유심히 살피면 그녀를 알아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도현이와 성관계가 없는 사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오직 한 길, 엄마의 딸이라는 존재를 숨겨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도 대면해서는 안 돼!

“미안해요. 저도 고모님이 사 주신다는 저녁 먹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어디 아픈 거야?”

도현은 깜짝 놀란 음성이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도현 씨. 나부터 염려해 주는 도현 씨,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고모님께 말씀 잘 해 주세요.”

“이런, 아프면 하루 쉬지. 조퇴를 하든가. 그만 두면…… 아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퇴근하고 곧장 집에 갈 거지?”

 

 

“예. 아무래도…….”

“그래, 이따 또 통화하자고.”

통화를 마치는데 헛기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영주가 결재 화일을 들고 서 있더니, 아무 말없이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질질 끌어서 안 될 일이야, 은서야.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은서는 떠나려 할수록 그리운 도현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청혼을 수락하고 그의 집에 인사까지 다녀온 사람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도현의 입장에선 그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최대한 상처를 적게 주면서 납득시킬만한 구실이 필요했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는 이유. 대체 그것이 뭐가 있을까.

도현이와 헤어진다는 고통만으로도 버거운 은서는 그 구실이라는 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마져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도현이 마음을 돌려 떠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배반이 아닌 방법.

슬픔을 머금은 스펀지 같은 창백한 은서의 눈에 앞사람이 펼치고 있는 신문기사 보였다.


‘저출산, 장기적으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


저출산? 그 문구에 은서의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생각들이 점점 도현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꾸며 나갔다.

구체적인 계획이 서자 은서는 이별의 슬픔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일이나 모레쯤에 출국한다고 도현이 말했었다. 그 전에 다시 만나자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은서는 저녁에 전화를 할 것처럼 하고 끝었던 아까의 도현을 상기했다. 그 통화로 만남을 갖고 이별을 통고하리라.

도현이와 헤어졌다고 하면 엄마의 의혹이 커져서 출국을 미룰까.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현에게 제시하려는 이유를 듣게 되면 그녀가 가족들 앞에서 혼절한 것과 저녁 초대를 몸살이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한 속사정을 엮어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의혹은 그쪽 방향으로 치우치며 사라질 것이리라. 확신이 섰다면 직접 찾아왔어야 할 엄마일 테니까.

은서는 자꾸만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아파트 진입로를 지나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꺾어 들었다. 어둠이 스멀거리는 아파트 앞에 도현의 차가 주차해 있는 것을 보고 은서는 놀라움보다도 주저앉고 싶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별이 좀 일찍 온 모양이었다.

 

 

도현이 차에서 내리며 걱정스런 낯빛이었다.

“차에 타지. 주치의 선생님께 연락하고 왔어.”

“괜찮아요.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은서는 안타까움이 역력한 도현의 눈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

“그러지 말고 갔다 오자고. 오죽 아프면 거절할 수 없는 자리인 걸 알면서 못 나오겠다고 했겠어. 은서,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은서는 이 자리에서 준비한 이별의 말을 토해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도현을 속인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약을 사 먹었어요. 다행히 금세 괜찮아지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고모님 만날 걸 그랬어요. 미안해요.”

약을 사 먹었다는 소리에 도현의 안색이 좀 나아졌다.

“그럼, 다행이네. 이 근방에 식당 같은 거 있지? 가서 밥 먹자고. 그러고 와서 쉬어.”

그러고 나면 우린 이렇게 오붓하고 다정한 대화는 더 이상 없을 거예요, 도현 씨.

은서는 슬픔이 밀려오자 속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결혼하면 늘상 해 줄 수 있었을 일상적인 행위. 하지만 이제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도현 씨, 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밥, 식당 가서 먹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밥 해줄게요.”

“아픈 사람이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식당에 가서 사 먹으면 간단할 것을.”

“그러고 싶은 거 있죠. 이렇게 걱정해 주는데, 뭐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이해 못해요?”

은서는 슬픈 기색을 숨기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도현은 아프다고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 손으로 밥을 해 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은서를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아프기에 고모가 초대한다는 데 무례를 무릅쓰고 거절할까 싶어 안타깝고 걱정돼 주치의에게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전화를 넣고 달려온 것이었다.  

“도현 씨 보니까, 힘이 막 나요. 이 기운이면 밥 거뜬히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도현 씬, 내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은서가 대뜸 팔을 끼어오며 팔팔한 목소리로 애교 섞인 소리를 해대는데, 유추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냥 밥 해 주고 싶은 거지? 다른 이유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