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들이 좋아 산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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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이 좋아 산동입니다
ㅡ여순사건 희생자, 故 백부전 님을 추모하며
이명윤
장롱에서 발견한 한 장의 가족사진에는
맨 왼쪽 다소곳이 손을 모은 내가 있고
오빠들은 정답게 오른쪽에 서 있습니다
큰오빠 일제 징용으로 죽고
작은오빠 여순사건으로 죽고
막내오빠마저 부역 혐의로
집안의 대가 끊길 지경이 되자, 어머니
어둠 속에서 차마 못할 말을 꺼내었지요
순례야, 네가 가면 안 되겠느냐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나이에 처형장 가며 불렀던 노래
무서워서 한 소절 서러워서 한 소절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진 노래
아무도 몰래 깊은 산 속 꽃씨로 남았다지요
입 밖에 내면 빨갱이로 잡혀갈 것 같아
모두가 쉬쉬하며 인적 끊긴 돌담길에
바람 부는 풀숲에 꼭꼭 숨겼다지요
사진 한가운데 바위처럼 앉은 어머니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저를 봅니다
어머니 슬퍼 마세요, 산이 좋아 산동입니다
오빠들이 좋아 산동입니다
산동 산동 들녘마다 산수유꽃 피면
노래는 마법처럼 다시 시작될 걸 알아요
우리 순례 입술이 이렇게나 이뻤구나,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 부르면
산동 산동 바람 따라 꽃잎이 흔들리면
아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지리산 만복대 억새를 타고 두둥실
구름 따라 전해질 걸 알아요
아직도 그때 세상이 진압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랏줄에 묶여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마다 고인
열아홉 눈물 닦아줄 걸 알아요 어른들이
정말 미안했다고, 모두가 입을 모으고
제 이름 부르며 제 노래 들으며
바람처럼 함께 울어줄 걸 알아요
ㅡ시집『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걷는사람, 2024)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긴 서사가 다시 시가 되었군요.
지리산 만복대 억새를 타고 두둥실
구름 따라 전해질 걸 알아요
임기정님의 댓글

집안의 대를 위해
딸을 보내야 하는 어미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여집니다
참 가슴아픈시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

그토록
주머니에 꼬불친 게 바늘이었나요?
이토록 아픈데 아름다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