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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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이명윤
대숲 사이로 화약 냄새 풀풀 이는 밤을 지나
군대란 모름지기 나라 지키고 국민 지키라고
밥도 주고 옷도 주는 곳이여
벅수골 샛길 가득 메운 행진에 놀라
허겁지겁 달아나는 경찰을 지나
구봉산 지나 한재 넘어
여수역 가는 길,
운명의 10월 19일이 없었더라면
국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출병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훈련 다녀오듯 무심하게
방아쇠를 제주로 향했더라면
그 순한 손가락이 끔찍한 총이 되고
평화롭던 교실 바닥
풀벌레 소리 가득한 뒷마당이
흥건한 비명으로 춤추지 않았을 텐데
막내가 삼촌이 이모부가
장롱 속 꼭꼭 숨긴 사진이 되고
무서운 빨갱이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고무공장이 주차장으로 바뀌고
식량 창고가 편의점으로 바뀌고
장작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죽음들도
무심한 관광 안내판으로 바뀌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병사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네
군인이란 무엇인가
검고 푸른 여수의 밤바다 위로 휘영청,
순백의 달이 뜨면
검은 복면을 쓴 반란의 얼굴들
저들끼리 뚜벅뚜벅 여수역 가네
앞날도 모르는 순진한 촌놈들,
웅성웅성 어깨까지 걸고 가네
*1948년 10월, 당시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여순 10·19 사건은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ㆍ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여 발발하였으며, 이로 인한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처참하게 희생당했던 현대사의 비극이다. 그로부터 70년이 훌쩍 지난 2021년, 대한민국 21대 국회에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아직도 원활한 진상규명과 희생자 확인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웹진『같이 가는 기분』 2025년 봄호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여수 밤바다에 달이
왜 순백이었을까?
빨갱이는 빨간 색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

주차장 지나 편의점 지나 슬쩍 본 관광 안내판도 지나 여수역도 지나 반란의 어깨동무들이 순백의 달을 길잡이 삼아 가네 가네 가네 가네 가네 아주 가네 아직 가네
임기정님의 댓글

참 마음아픈 시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