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누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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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누워* 외 6편
이명윤
물새가 된 적 있다
나는 어부의 그물에 순순히 잡히지 않고
훌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안녕, 강의실의 물고기들아
이제 찬란한 눈부심은 나의 것
거친 물살의 깊은 속은 항구의 것
세상은 온통 물결로 흘러넘치고
나는 캠퍼스에 누워 띱띱띱
흔들리는 돛대에 앉아 띱띱
설익은 햇살을 타고 띠디띠디띱
흑백 간판 비스듬한 건물들 사이
사람들이 빠르게 밀물로 움직이고
최루탄 가득한 하늘이어도 좋았다
더없이 높은 음자리로 넘실대는
푸른 파도는 나의 것
검은 눈물은 항구의 것
태양이 지고 노을이 지고
청춘보다 사랑했던 구호가 지고
마침내 외로운 얼굴로
바다에 깊게 누워 잠들 때까지
천방지축 딥딥딥띠리,
세상 물정 모르는 물새라서 행복했다
한쪽 날개 꺾인 내가
찬 바닥에 누워있던 젊은 날,
엄마는 오랫동안 항구였다
* 1985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높은음자리의 노래.
땅 파는 개
개가 땅을 파고 있다
궁둥이를 하늘 높이 전투적으로 세우고
주둥이를 땅속 깊이 묻고 있다
점점 맹렬한 기세로 땅을 갈라치는 앞발,
밥 먹자고 불러도 돌아보질 않고
냉큼 다가가 궁둥이를 딱, 딱, 때려도
막무가내다
요지부동이다
호기심은 생쥐가 후다닥 숨어 버린
사소한 구멍에서 출발했지만
마당 깊이 묻어둔 지난겨울과
비밀과 욕망의 내음이 모두 화들짝
놀란, 흙이 되어 춤추고 있다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며 펑펑
황홀하게 흩날리고 있다
절박한 궁둥이 위에 철석철석 빛나는
당당하고 힘찬 꼬리,
물러서지 않는 저 거룩한 자세와
치열한 구멍의 확장을 보며
나는 슬그머니 웃는 얼굴로
어느 혁명가의 낭만을 떠올린다
어느 시인의 집념을 생각한다
꽃말
누군가에게 꽃을 준 적 있다
말없이 두고 온 지삼십 년이 지나
시골에 집을 짓고 마당에 꽃을 심으며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른 봄 담벼락에 수선화 옷깃 세우고
개나리 코웃음 치는 울타리 옆
페튜니아 큰 입으로 깔깔거린다
마당이 소란해지는 건 순식간
영산홍, 넝쿨장미, 금잔화, 개양귀비, 튤립...
색깔만큼 산만한 아이들도 물뿌리개 흔들면
이내 감정이 차분해지고
연약해 보이던 목울대도 허공을 당기며 팽팽해졌다
자, 따라 해봐,
처음부터 다른 태생의 악기들처럼
대답하는 말이 제각각 달라
봄날마당엔 빨주노초파남보,
목소리로 만든 무지개가 떴다
어떤 말은 눈망울만 반짝이고
어떤 말은 입술이 선명하다
무지개를 목에 건 나의 모습을
어디론가 전송하고 싶었다
하루는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마당의 눈빛들이 깊은 침묵에 들었다
그때 나는 서럽다는 말이 얼마나
여린 잎과 향기로 바닥을 뒹구는지 보았다
세상의 허공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의 무덤이 가득하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오후
사무실로 배달된 물망초 한 다발에
여직원이 그만 책상 위로 얼굴을 묻는다
꽃이 뭐라고 말했을까,
고장 난 라디오
우연히 중고 라디오를 얻었는데
도무지 주파수가 맞춰지질 않았다
서로 다른 목소리로 앞다투어 쏟아지는 세계를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치지직, 치지직,
연신 신음 소리만 내는
멍청한 라디오를 한참 바라보다
가만히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라디오의 귀를 만졌다
손끝에 밀물처럼 와닿는,
고장 난 귀의 말들이
무척 따뜻하고 슬펐다
그 집 칼국수
그 집은 유턴을 해야 갈 수 있다
길게 돌아가야 하는 거리만큼
육수는 펄펄 뜨거워진다
그 집 칼국수를 생각하면
나는 속도를 버릴 수 있다
모락모락 칼국수와 붉은 깍두기를 내놓는
여자의 고운 손을 생각하면
까짓것 기름을 낭비할 수 있다
무심하게 돌아서서 그릇을 닦는 중년 여자의
단정한 머리 곱창을 보면
이렇게 슬프도록 맛있는 칼국수가
왜 홀로 변두리 해안에 사는지 몰라도 좋다
가끔 나는 식당 벽에 걸린 빛바랜
사진 속 남자가 되기도 한다
먼바다에서 돌아온 그의 얼굴로
여자의 등을 안아주는 상상도 잠시,
빈 그릇에 수북한 바지락 껍데기는
칼국수의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칼칼 눈물을 우려내야 칼국수다
한없이 쓸쓸한 얼굴로 살아가도
품격을 잃지 말아야 칼국수다
잘 먹었습니다, 우리는
차가운 갯바람 부는 날에도 당당한
칼국수로 돌아갈 수 있어 고맙다
칼국수와 사랑은
유턴을 해야 만날 수 있다
질문
누더기 개는 왜 누더기가 되었을까
질문은 종종 길가에 무방비로 피어 있다
누더기에 놀란 가슴들
일제히 브레이크를 밟고
지그재그로 멈추어버린 오후
꼬리를 흔들며 눈망울을 굴리며
위험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누더기가 따라올 때, 우리는
천천히 구르는 바퀴처럼
슬픈 눈을 얻었다
너무 오래 아팠거나 갑자기
키가 자라 버렸을까
이것은 누더기처럼
누덕누덕 해어진 질문
멈춰 설 듯 말 듯 주저하는
낯선 행성을 보며
도로 한복판에 납작 엎드린
그림자가 꼬리 친다
어느 날 문득
쓰레기처럼 투기된 계절이
너덜너덜 무거운 옷을 걸친
미련이 꼬리 친다
온 힘이 다 빠지고 가까스로
꼬리만 남은 질문이
털썩, 털썩, 자꾸만
반갑게 꼬리 친다
제 이름은 형제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함께 사는
125명의 이름도 모두 형제입니다
서러운 죽음은 그만 잊고 형제처럼
오순도순 지내라고 비석에 새겼다지요
시신마저 뒤엉켜 화형 당한 슬픔
서로 도닥이며 감싸주라 그랬다지요
이마 위로 비스듬히 걸쳐진 무릎뼈가
그날 몇 층 장작더미에서 죽은 형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무어 그리 서러워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서걱
울음을 뒤척이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우릴 여기 두고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뜬 눈의 밤을 보냈을지 알아요
얼마나 많은 눈물이 우리의 마지막을
기억할지 알아요 걱정 마세요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죽은 사람
죽어서 다정한 형제가 된 사람
그래도 아주 가끔 궁금해져요
죽은 지 칠십 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이름이 아직도 형제여서
너무 많은 가면들이 컴컴한 독에 갇혀 있어
기억나지 않는가 봐요
해질 무렵이면 언덕마루에 올라
손짓하며 부르던 이름, 멀리서도
다정하던 입 모양이 생각나요
어머니, 살았을 적 제 이름은 뭐였을까요
* 여순 사건 당시 희생되어 만성리 형제묘에 함께 묻힌 민간인들을 추모하며.
-계간 <신생> 2025년 여름호, 특집시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누더기 개는 왜 누더기가 되었을까
투기된 계절이,
온 힘이 다 빠지고 가까스로
꼬리만 남은 질문이,
내게도
꼬리를 친다.
임기정님의 댓글

어머나
역시나
맛난 시 읽는
땅을 파는 개의 집요함처럼
저 역시 평범한 시라도 썼으면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