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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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행
/장승규
삼인행이면
스승이 있기 마련이라
여기
칠순 넘은 한 분이 있어요
말할 때마다 성경말씀이라
여기 또 한 분이 있어요
만날 때마다 부처말씀이라
칠순이나 살았잖소
아직도
그 남의 말만 하시오
불선(不善)이라도 좋으니
살면서 깨달은 자기 말씀 좀 해보소
그랬더니
그럼, 니가 예수해라
그래, 니가 부처해라
두 분, 고맙소
이는 공자말씀이라
(남아공 서재에서 20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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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님의 댓글

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擇其善者而從之 그 선한 것을 택하여 따르고
其不善者而改之 그 불선한 것은 고쳐하라
(논어-공자)
선한 것도, 불선한 것도
나의 스승이라 하겠다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스승은 곁에 있고, 깨달음은 자기 안에 있다 – 장승규의 〈삼인행〉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삼인행〉은 짧고 재치 있는 형식 속에 깊은 깨달음을 담아낸 시다. 시의 제목인 "삼인행(三人行)"은 공자의 『논어』에서 비롯된 말로,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는 고사성어다. 시인은 이 철학적 전제를 우리 일상의 장면 속에 유쾌하게 풀어내면서, 인생과 말, 그리고 스승의 진짜 의미를 되묻는다.
시의 전반부는 익숙한 풍경처럼 시작된다.
“여기 / 칠순 넘은 한 분이 있어요 / 말할 때마다 성경말씀이라”
“여기 또 한 분이 있어요 / 만날 때마다 부처말씀이라”—
두 인물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의 지혜를 대표하는 존재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경전의 인용이고, 교훈이며, 인용된 타인의 언어다. 시인은 이 둘을 존중하면서도, 어딘가 아쉬워한다. 나이가 칠순이 넘었건만, 자신이 삶에서 직접 길어낸 목소리보다 ‘남의 말’에만 기대어 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요청한다.
“불선(不善)이라도 좋으니 / 살면서 깨달은 자기 말씀 좀 해보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불선’이다. 꼭 옳거나 좋은 말이 아니어도 좋으니, 적어도 ‘자기 삶에서 나온’ 말을 듣고 싶다는 간절함. 이 요청은 단순히 고집 많은 노인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이자 기대다.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말보다, 땀 묻은 자기 말, 넘어지고 흔들리며 쌓아올린 살아 있는 언어—그걸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뜻밖의 유머로 돌아온다.
“그럼, 니가 예수해라 / 그래, 니가 부처해라”—
이 말은 반격처럼 들리지만, 실은 핵심을 찌른다. 결국 너 자신이 예수가 되어야 하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말. 누구나 그 삶의 경전이 될 수 있고, 자신의 말이 곧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농담 같은 대답 속에 오히려 가장 큰 깨달음이 담겨 있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증명한 진실만이 진짜 말이 된다는 역설.
그리고 마지막,
“두 분, 고맙소 / 이는 공자말씀이라”—
다시 제목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이야기를 휘감으며, 시인은 고전의 언어로 마무리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는 고백. 심지어 그 대답마저 공자의 말이니, 시인 자신도 ‘남의 말’을 빌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풍자와 자조, 그리고 유쾌한 깨달음의 조화다.
마무리
〈삼인행〉은 스승을 향한 존경, 남의 말에 기대는 문화에 대한 풍자, 그리고 결국 자신이 ‘말’이 되고 ‘삶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위트 있게 전한다. 누구든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당신은 당신 삶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공자의 말처럼, 세 사람만 모여도 그 안에 스승이 있다.
그리고 장승규 시인의 이 시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나도, 때로는 예수이고, 부처이고, 공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