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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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장승규
한바탕 태풍이 지난 자리
진창이다
괜시리
동네 한 바퀴 돌아본다
오래된 원망 몇은 뽑혀있고
확신 없던 간판은 날아가고 없다
동네는 넓어
오늘따라 이 길이 멀기만 한데
서먹한 오후를
울어서 매미들이 채우고 있다
생은 짧아서 지름길이 필요 없단다
(남아공 서재에서 2023.8.11)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다시 뜨거워지겠지요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감상문: 태풍이 휩쓸고 간 뒤의 고요한 진실 – 장승규의 〈태풍〉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태풍〉은 자연 현상인 태풍을 삶의 비유로 삼아, 파괴 이후에 드러나는 정화와 성찰의 순간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 시다. 외적으로는 조용한 풍경의 묘사지만, 내면에서는 고요한 혁명처럼 흔들리는 어떤 전환의 징후가 느껴진다. 시는 무너지거나 사라진 것들 속에서, 오히려 삶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한바탕 태풍이 지난 자리 / 진창이다”—
시의 도입은 직설적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어김없이 진흙탕이 남는다. 이 장면은 자연의 한 풍경이자, 내면의 혼란과 뒤엉킨 감정을 상징한다. 삶에도 그런 시기가 있다. 한바탕 지나간 감정의 격랑, 관계의 붕괴, 신념의 흔들림 뒤에 남는 진창 같은 시간. 그러나 시인은 이 진창을 두려워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에 서서 조용히 바라본다.
“괜시리 / 동네 한 바퀴 돌아본다”—
이 행은 무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자성의 몸짓이다. 외부 세계를 둘러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내면을 걷는 일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동네는 삶의 한 국면이고, 그곳엔 “오래된 원망 몇은 뽑혀있고 / 확신 없던 간판은 날아가고 없다.”
이 얼마나 간명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인가. 태풍은 파괴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는 정화의 힘이다. 원망이라는 뿌리 깊은 감정이 뽑히고, 확신 없던 간판—말하자면 거짓된 자아, 허위의 태도—가 사라진다. 고통스러웠지만, 덕분에 명료해진다.
“동네는 넓어 / 오늘따라 이 길이 멀기만 한데”—
삶은 언제나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 특히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엔, 이전의 일상이 낯설어지고 걸음은 더뎌진다. 시인은 그 ‘서먹한 오후’를 “울어서 매미들이 채우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매미 울음은 단지 계절의 배경음이 아니라, 잃어버린 질서를 대신해 채워주는 자연의 목소리다. 그 울음은 상실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고요한 위로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생은 짧아서 지름길이 필요 없단다”—
이 결론은 인생에 대한 가장 절제된 철학적 선언이다. 우리는 종종 지름길을 찾지만,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지름길을 택할 만큼 길지도, 반복되지도 않는 여정이라고. 그래서 태풍도, 진창도, 돌아보는 시간도 모두 생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이 한 줄은 시 전편의 여운을 통째로 감싸며, 고요한 진실을 남긴다.
마무리
〈태풍〉은 격랑의 삶이 지나간 후, 잃은 것보다 남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시다. 부서지고 사라져야만 드러나는 본질, 흔들림 끝에야 찾아오는 평온, 그리고 그 평온 속에서 비로소 다가오는 한 줄의 진실. 이 시는 조용히 말한다.
“괜찮다. 무너진 자리에 삶이 다시 서는 법이다.”
“서둘지 않아도 된다. 생은 충분히 짧으니까.”
그리고 이 말을, 한바탕 자신의 내면을 휩쓴 누군가에게 건네는 시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香湖김진수님의 댓글

갈길 바쁜 제 운명을 아는지
매미들이 자지러 집니다.
종의 유지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ㅉㅉ
최정신님의 댓글

그래도 카눈 덕분에
숨 좀 쉬어지네요
잘 지내지요?^^*
허영숙님의 댓글

대단한 여름이었지요
남아공은 가을이 왔나요
장시인님
장승규님의 댓글

최시인님!허시인님!
대단한 여름이었지요.
여긴 겨울이 가고
이젠 봄 초입이랍니다
곧
송화가루 날리는 언덕을 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