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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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장승규
남도
늦가을 장독대에 저 항아리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익어가는 일상을 담고 있을까
매운 맛일까
짠 맛일까
아니면 비었을까
오래 묵힌
내 나이를 찍어 먹어보면 어느 맛이 날까
갈수록 텅 빈 일상으로
오늘도 어제처럼 살고 있으니
늦가을 장독대에선
아무것도 찍어 먹어보지 않기로 했다
(남아공 서재에서 2023.11.09)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세월이 참 빠릅니다.
벌써 11월도 중순
한 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보람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감상문: 묵은 항아리 속 인생의 맛 – 장승규의 〈장독대〉를 읽고
장승규 시인의 시 〈장독대〉는 한 그릇의 삶, 또는 한 항아리의 나날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하는 묵상의 시다. 남도의 늦가을이라는 풍경, 장독대라는 오래된 일상의 이미지 위에 시인은 인생의 익음과 공허, 기억과 무맛(無味)을 은근히 풀어낸다. 이 시는 전통과 시간의 상징인 ‘장독’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거울이다.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시의 도입부는 장독을 앞에 두고 있지만, 곧 그것이 단지 항아리가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나이 들며 익어가는 시간, 겉으로는 단정하고 둥글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인생의 그릇이다. 이 항아리 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시인은 말한다.
“익어가는 일상을 담고 있을까 / 매운 맛일까 / 짠 맛일까”—이 세 가지 맛은 삶의 삼색감정을 상징한다. 익음은 지혜와 수용, 매운맛은 고통과 분투, 짠맛은 눈물과 회한. 그것은 모두 나이가 쌓이며 한데 섞여 장처럼 발효된 삶의 풍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도 묻는다.
“아니면 비었을까”—이 짧은 구절은 이 시의 정조를 전환시킨다. 삶이 그저 익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비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쌓일수록, 삶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텅 빈 무엇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나이 들수록 알게 되는 깊은 공백의 자각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
“오래 묵힌 / 내 나이를 찍어 먹어보면 어느 맛이 날까”—이 물음은 자조적이면서도 시적이다. 나이를 장처럼 찍어 먹어본다는 이 발상은, 시간을 맛본다는 비유를 통해 나이 든다는 행위에 물질적 감각을 입힌다. 하지만 “갈수록 텅 빈 일상으로 / 오늘도 어제처럼 살고 있으니”—이 구절은 답을 말한다. 맛보다도 무미(無味), 시간보다도 반복, 존재보다도 공백이 더 짙어지는 인생의 구간. 시인은 지금, 그 무맛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늦가을 장독대에선 / 아무것도 찍어 먹어보지 않기로 했다”—이 결말은 단념이자 해탈이다. 맛보지 않겠다는 선언은 곧 무언가를 따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살아온 인생의 맛을 분석하거나 평가하지 않겠다는, 나이든 자의 조용한 체념 혹은 관조다. 이는 슬픔이라기보다, 쓸쓸하지만 평온한 결심에 가깝다. 때로는 되씹지 않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마무리
〈장독대〉는 삶을 장처럼 숙성시키며 살아온 한 존재가, 그 속의 맛을 굳이 확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담백한 시다. 이 시는 인생을 '맛'으로 표현하면서도, 결국 모든 것은 '비워짐'으로 귀결된다는 사유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비워짐은 포기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또 하나의 채움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장독 속엔 지금, 어떤 맛이 익어가고 있습니까?”
“혹은, 이미 비워진 채 햇살만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는 그렇게, 고요히 묻는다.
임기정님의 댓글

예전 같으면 빈 항아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담겼는데
요즘에는 대형할인점이나
시장에 가면 편리하게
사 먹을 수 있으니
날로 빈 항아리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요즘 빈 항아리들이
한숨만 내쉰다 합니다
시인님 귀한 시 잘 읽었습니다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기정님
나부터도 그러하니 어쩌 겠습니까?
안녕하시지요?
서피랑님의 댓글

장독대, 항아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련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서피랑님
감사합니다.
통영도 춥지요?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