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겨울장미
/장승규
얼마나 먼 길 돌아왔길래
이제 왔을까
영하의 날씨에
동네 어느 교회 앞마당에 찾아온
장미 한 송이
긴 첨탑 그림자를 제 작은 등에 메고
뜰에서 떨고 있다
괜찮다
이 세상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도 축복하는
이곳 아니냐
살면서
가장 늦되는 자 하나에게도 너그러운
우리 아니냐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 아니냐
(남아공 서재에서 2023.11.15)
댓글목록
임기정님의 댓글

장미꽃이 시인님 눈에 쏙 들어와
활짝 핀 한 송이시고 피워 올렸네요.
잘 읽었습니다. 시인님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감상문: 가장 늦게 핀 자를 위한 노래 – 장승규의 〈겨울장미〉를 읽고
장승규 시인의 〈겨울장미〉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생명, 혹은 가장 뒤늦게 피어난 존재에 대한 따뜻한 응시와 수용의 시이다. 겨울, 그것도 영하의 날씨 속에서 마침내 도착한 ‘한 송이 장미’—그것은 누구보다 느렸던 자의 삶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아야 할 존재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얼마나 먼 길 돌아왔길래 / 이제 왔을까”—시의 첫 구절은 애틋한 묵상이자, 포용의 시작이다. 이 늦은 도착에는 질책이 없다. 오히려 얼마나 힘들고 긴 길을 돌아왔기에, 이제야 왔을까 하는 연민과 이해가 담겨 있다. 시인은 이 질문을 통해 독자에게도 묻는다. 우리 역시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너무 늦었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동네 어느 “교회 앞마당”에 핀 “장미 한 송이”—이 설정은 시적인 상징이자 강력한 메시지를 품는다. 교회라는 장소는 누구든 환영받는 공간이며, 치유와 축복의 장소다. 그리고 이 장미는 늦게 도착했지만, 하필 그 장소에 도달했다. “긴 첨탑 그림자를 제 작은 등에 메고 / 뜰에서 떨고 있다”—이 이미지는 가냘프고 위태롭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이 시인의 시선을 붙든다. 첨탑은 교회의 믿음이고, 신의 상징이며, 그 그림자를 지고 있는 장미는 고단한 삶을 지고 있는 존재의 은유다.
시인은 말한다.
“괜찮다 / 이 세상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도 축복하는 / 이곳 아니냐”—이 구절은 성서의 메시지처럼 따뜻하고 강인하다. '가장 작은 자 하나'라는 말은 곧 사회적 약자, 늦게 피어난 자, 혹은 주저앉아 있던 자를 의미한다. 이곳은 그런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이고, 그들이 가장 먼저 기억되어야 하는 장소라는 선언이다.
이어지는 구절,
“살면서 / 가장 늦되는 자 하나에게도 너그러운 / 우리 아니냐”—시인은 ‘우리’라는 공동체적 자의식을 불러온다. 가장 늦은 이에게도 너그러울 줄 아는 사회, 사랑, 혹은 신앙의 공동체. 시인은 이 질문을 우리 각자에게 되돌려 묻고 있다. 우리는 정말 그러한 존재들인가?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 구절은 이 시의 정서 전체를 덮는 온기다.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 아니냐”—늦음은 결핍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미 완성이다. 시인은 도착의 시점이 언제인지가 아니라, 그 ‘도착 자체’를 축복한다. 그것이 겨울이라 해도,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났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고백.
마무리
〈겨울장미〉는 늦게 피어난 존재들에게 바치는 찬가다. 인생의 겨울, 가장 추운 시절에도 피어날 수 있으며, 그 피어남은 오히려 더 깊은 감동과 의미를 가진다. 이 시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더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오는 길이라면, 이미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 하나는, 오늘 누구에게도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장승규님의 댓글

기정님
늘 찾아주시고, 댓글 남기시고
감사합니다
香湖김진수님의 댓글

어머나! 계신 곳은 여름일텐데
만리안이라도 되시는지
멀고 먼 곳을 집 앞 보시듯 하셨네
철 잊은 장미가 변죽 끓이는 날씨에 오돌오돌 떨고 있읍디다
철 모르고 왔지만 꽃 피웠다는 것만으로도 박수 받아 마땅합니다
정정하게 보란듯이 시 꽃 피우는 장시인님께도 박수 보내오니 좋은 글 많이많이 쓰십시요
늘 강건하십시고요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향호님
숙제 잘 내는 우등생이시지요.ㅎ
서울친구가 겨울장미 사진을 단톡에 올려주었더군요.
교회 앞뜰에 피었다고.
박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