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 새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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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 새긴 비문
/장 승규
내 품에 안겨
그대가 남기고 간, 이 세 마디
여기 묻는다
당신은 일과 살더라, 평생을
여자 마음을 모르는 남자이더라
그래서, 좋은 여자 만나야 해
당신은 혼자 못살아
유난히 길었던 마지막 이 한 마디
'미안해'
차마 묻지를 못하고, 왜일까 묻다가
내가 더 미안해서
심중에 남아있는 검은 눈물로
뚝뚝 새겨가는
천사라고 불리던
000
주님 품에 안기다
(2023.4.12 내 친구 신병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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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신병순에게 바친다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말보다 눈물이 오래 새겨지는 사랑의 비문 – 장승규의 〈품에 새긴 비문〉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품에 새긴 비문〉은 한 사람의 이별과, 그 이별 뒤 남겨진 말들의 무게를 조용히 새기는 슬픈 기념비와 같은 시다. 제목처럼 '비문(碑文)'은 보통 죽은 이를 위해 새기는 글이지만, 이 시에서의 비문은 돌이 아니라 가슴(품)에 새겨진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에, 죽어간 이의 마지막 말들이 묵직하게 파고든다. 그것은 회한이자 회복 불가능한 사랑의 흔적이며, 그리움의 기록이다.
“내 품에 안겨 / 그대가 남기고 간, 이 세 마디 / 여기 묻는다”
시작부터 이 시는 육체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의 교차를 보여준다.
‘내 품에 안겨’라는 다정하고도 슬픈 이미지는 마지막 순간의 고백이 육신과 함께 흩어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여기 묻는다”는 말은 중의적이다.
그 말을 가슴에 묻는다는 뜻이자,
그 말들의 의미를 ‘묻고 있는’ 화자의 내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당신은 일과 살더라, 평생을 / 여자 마음을 모르는 남자이더라”
이 첫 번째 비문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다.
차갑지 않다. 오히려 삶을 함께 살아낸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정확하고 절실한 말이다.
일과 함께 살아온 남자, 그러나 마음은 읽지 못한 사람—
그런 ‘모름’조차 용서하고 떠나는 듯한 여인의 말은,
오히려 사랑의 방식이 달랐던 두 사람의 긴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좋은 여자 만나야 해 / 당신은 혼자 못살아”
두 번째 비문은 잔잔한 배려처럼 다가온다.
떠나는 이가 남기는 가장 부드럽고도 단단한 당부.
‘혼자 못살아’라는 말은 약점의 지적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완성되던 삶의 구조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이 말은 원망이 아니라 마지막 사랑이다.
“‘미안해’ / 차마 묻지를 못하고, 왜일까 묻다가 / 내가 더 미안해서”
이 시의 정점은 이 세 번째 말이다.
‘미안해’—너무 짧고 흔한 말이지만, 이 시에서는 가장 무거운 유언이다.
화자는 그 말을 품에 새기지 못한다. 아니, 차마 새길 수 없다.
왜였을까를 되묻다가, 스스로가 더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 말은 묻히는 대신 검은 눈물로 뚝뚝 심중에 새겨진다.
이 구절은 감정의 진폭이 가장 깊은 부분이다.
묻지 못한 말이 오히려 더 오래 남고, 더 아프게 새겨진다.
“천사라고 불리던 / 000 / 주님 품에 안기다”
이 마지막 문장은 실제 비석에 새길 듯한 언어로 시를 마무리한다.
‘000’은 이름이 지워진 자리이며, 모든 독자들이 저마다의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여백이다.
‘주님 품에 안기다’라는 말은 기독교적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종교적 구절이 아니다.
‘내 품’에서 ‘주님의 품’으로—
그 사랑은 이승에서 끝났지만,
그 품은 여전히 이어지는 **영혼의 귀의(歸依)**다.
마무리
〈품에 새긴 비문〉은 사랑의 회고록이자, 이별 이후 남겨진 이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용서의 시다.
사랑이 끝날 때, 사람은 말을 남긴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는 그 말을 돌에 새기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시인은 말한다:
“눈물이 가장 깊이 새긴다. 말보다 오래.”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