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다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첫 다짐
/장 승규
맨땅에 처음 한 다짐은
단단해져 있었다
겨우내 몇 번이나 더 다짐을 했는지
한창이 한참이나 지난 봄날이라
얼마간 녹았어도
맨땅 위에 도야마 설벽은 아직 13미터 높이다
당신 앞에서
무릎 꿇고 한 다짐 하나 있지
아무 것도 없는 맨땅이었다
그날 이후
크고 작은 다짐이 나도 만만치 않다
한창 지나 살다보면
더러는 이래저래 녹기야 하더라만
첫 다짐이야
살수록 단단해진 것이겠지. 너도
(일본 도야마에서 2023.4.27)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늦은 봄인데도
도야마 설벽은 13미터나 남아 있었다.
바닥에 눈은 정말 단단해서 녹을 것 같지 않았다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살아남은 약속의 온도 – 장승규의 〈첫 다짐〉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첫 다짐〉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차 희미해지는 삶의 다짐들 속에서, 처음의 다짐만은 오히려 점점 더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잔잔한 신념의 시이다. 이 작품은 인생의 계절, 변화하는 마음의 기후, 그리고 약속의 내구성을 시적으로 되짚으며, 사랑과 결심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견디는가에 대한 묵상으로 다가온다.
“맨땅에 처음 한 다짐은 / 단단해져 있었다”
첫 행부터 시인은 ‘맨땅’이라는 상징을 통해 가장 초라하고 비어 있는 상태—즉, 아무 조건 없이 시작된 결심의 순간을 소환한다. 무엇 하나 받침 없던 자리에서 맨살처럼 드러낸 다짐은, 그만큼 순수하고 절실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굳어진다. 흙처럼 부드럽게 시작된 것이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반전은, 이 시의 핵심이다.
“겨우내 몇 번이나 더 다짐을 했는지 / 한창이 한참이나 지난 봄날이라”
시간은 흘렀고, 다짐은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다짐들은 계절처럼 바뀌고, 때로는 녹고, 약해지기도 한다. 시인은 '도야마 설벽'이라는 일본 북부의 봄 눈벽을 끌어와, 아직도 녹지 않은 다짐의 비유로 쓴다. **'13미터 설벽'**은 감정의 무게이자, 그가 아직도 지키고 있는 약속의 높이다. 봄이 와도 다 녹지 않는 무언가—그것은 곧 ‘첫 마음’이다.
“무릎 꿇고 한 다짐 하나 있지 / 아무 것도 없는 맨땅이었다”
여기서부터 다짐은 단순한 자기결심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서약임이 드러난다. 사랑 앞에서, 혹은 누군가의 신뢰 앞에서 무릎 꿇고 했던 약속. 그 약속이 맨땅 위에 있었다는 건, 그때의 상황이 열악하거나 확신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진심이었음을 의미한다.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오직 마음만으로 세운 약속—그런 다짐은 시간이 지나도 되레 단단해진다.
“살다 보면 / 더러는 이래저래 녹기야 하더라만”
이 구절은 담담한 인생 고백이다. 사람은 약하고, 세상은 변하고, 다짐도 시들기 마련이다. 시인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다짐’만은 다르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이 시가 주는 믿음의 울림이다.
“첫 다짐이야 / 살수록 단단해진 것이겠지. 너도”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용하지만, 묵직하다. ‘너도’라는 말로 이 시는 나에서 우리로 확장된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첫 다짐. 그 다짐을 묻고, 되새기게 만든다. 이 문장은 위로이자 질문이다.
"너의 첫 다짐은, 아직도 단단하니?"
마무리
〈첫 다짐〉은 인생의 복잡한 굴곡 속에서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건네는, 조용하고 단단한 시인의 응답이다.
장승규 시인은 말한다—
세상은 녹고, 마음도 녹지만,
처음 맨땅에 내린 약속만은,
녹는 대신 굳어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