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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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장 승규
묵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어진다는 건데
아프리카에 산 지 35년
아직은 검지 않고
인주와는 40년 남짓
붉은 입술에 살 부비며 그리 오래 살아도
아직은 붉지 않고
제 색에 멀쩡하게 살아왔다는 건데
요즘은 하루하루
인주 입술에서 터지는 붉은 잔소리에
고분 고분
이 남자, 멀쩡하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건데
이제
말씀으로 들린다는 건데
(잠실에서 2023.4.09)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근묵자흑 近墨者黑
근주자적 近朱者赤
묵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어진다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감상문: 서서히, 그러나 깊게 물들어가는 사랑 – 장승규의 〈인주〉를 읽고
장승규 시인의 〈인주〉는 일상 속 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유쾌하면서도 정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는 색에 대한 은유—‘묵’의 검정, ‘인주’의 붉음—를 빌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래된 동행, 그중에서도 부부 관계의 섬세한 풍경을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겉으로는 익살맞지만, 속에는 사랑과 세월, 수용과 변화에 대한 성찰이 있다.
“묵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어진다는 건데”
이 유명한 속담은 ‘환경에 물든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과연 오랜 세월 곁에 있었다고 해서 정말 물들었는가를 반문한다. 아프리카에서 35년을 살았지만 “아직은 검지 않고”, 인주와 40년을 함께했지만 “아직은 붉지 않다”고 말하는 시인은, 자기 색을 지켜내며 살아온 당당한 자부심과 동시에, 조금은 웃음 섞인 자기 방어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의 정조는 곧 바뀐다.
“요즘은 하루하루 / 인주 입술에서 터지는 붉은 잔소리에 / 고분고분”
여기서 ‘인주’는 실체를 갖춘 인물이 된다. 아내 혹은 곁에 오래 머물러온 동반자—말 많고 강단 있는, 그러나 삶의 소리로 가득 찬 인물. 시인은 더 이상 색에 물들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분고분”, 조금씩, 그리고 멀쩡하게 물들어간다. 여기에 담긴 유머는 사랑의 표현이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수용하며 닮아간다는 은근한 애정의 방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 말씀으로 들린다는 건데”
이 한 줄은 시 전체의 결을 정리하는 정직한 고백이다. 이전엔 잔소리였던 말들이 이제는 ‘말씀’처럼 들린다는 변화. 이는 단지 귀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다. 오래 함께한 삶의 무게가 그 잔소리를 지혜와 돌봄, 삶의 진리로 바꾸어놓았다는 의미. 누군가의 말을 ‘말씀’으로 듣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깃든 존재가 된다.
마무리
〈인주〉는 ‘물들지 않겠다’는 자의식에서 출발해, ‘물들어간다’는 수용으로, 그리고 마침내 ‘말씀으로 들린다’는 존중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 여정은 한 남자의 사랑의 방식이자, 관계에 대한 철학이다.
이 시는 우리에게 말없이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물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물듦이 잔소리처럼 들리나요, 아니면 말씀처럼 들리나요?”
한인애님의 댓글

정말 오랫만에 들어왔네요.
장시인님,
멋진 마음 잘 읽었습니다.
행복이 화안하네요!~*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한인애 시인님
울산에 갔을 때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교장선생님도 은퇴를 하셨지요?
요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이시향님의 댓글

시의 향기 채널로
7700 여분께 포스팅합니다.
매일 좋은 시 한편 읽을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시향님
포스팅 소식 들으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