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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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성지
/장승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마흔 지나
스무 살 즈음에 등 돌렸던 기원의 언덕에 오르니
언덕 너머에, 그즈음 정복하지 못한 성 하나
아직도 우뚝 선 성루엔 잿빛구름만이 무심하다
그날처럼
나는 울음을 오래 숨겼다
조금 더 거슬러 오르니
여기 지도에도 없는 어느 언덕배기에
말라 움푹 파인 그늘 하나
마른 이끼가 그늘바닥에 들러붙어 있다
이곳은
이 길이 시작된 깊은 샘이고
언제나 생의 무게중심이다
태생의 흔적을 간직한 성지이다
여기 기원의 언덕에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에게 표지석 하나 남긴다
다시는 이곳이
잊혀진 성지가 되지 않도록
(요하네스버그 서재에서 2024.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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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님의 댓글

Up the Hill
by Sankei Jang
I tried to climb back—
against the flow of time.
Past forty,
I found myself again
upon that hill I turned from
around the age of twenty.
Beyond the hill,
a castle I could not conquer—
now only clouds wander
indifferently across its tower.
Just like that day,
I held my tears
a long, silent while.
A few steps farther,
I came upon a nameless knoll—
nowhere marked on any map—
a hollowed shadow,
where brittle moss clings to the cracked bottom.
This place—
the deep spring where this journey once began,
the axis where all my life has balanced,
the shrine that bears my origin scar.
And here,
today’s self sets a marker stone for tomorrow’s self.
So that this shrine
will never be forsaken again.
(Johannesburg Study, June 12, 2024)
장승규님의 댓글

장승규 시인의 「그 언덕에 올라」를 읽고---->어느 감상문
장승규 시인의 「그 언덕에 올라」는 인생의 반환점을 지난 한 존재가, 자신의 기원과 젊은 날의 실패를 되짚는 내면적 순례이다.
이 시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서, 기억의 성지를 찾아가는 의례적 여정, 그리고 그 끝에 다시 살아가기 위한 표지석 하나를 남기는 다짐의 시로 읽힌다.
시의 시작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지”라는 문장으로 열리며, 마치 독자를 함께 데려가는 듯한 진입감을 준다.
시인은 *“마흔 지나 / 스무 살 즈음에 등 돌렸던 기원의 언덕”*을 다시 오르고, 그 너머에 정복하지 못한 성 하나를 마주한다.
그 성의 풍경에는 *“이젠 성루에 구름만이 무심하다”*고 쓰며, 과거의 격렬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무심한 구름처럼 멀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시인은 여전히 *“그날처럼 / 울음을 오래 숨겼다”*고 고백하며, 상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담담히 드러낸다.
이어지는 여정에서 시인은 지도에도 없는 언덕배기를 오르고,
거기서 마주한 *“움푹 패인 그늘”*과 *“마른 이끼”*는 지워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과거의 흔적처럼 자리한다.
이 부분에서 시는 외부 풍경의 묘사와 내면 심상의 교차를 통해 감정의 무게를 자연스럽게 형상화한다.
무엇보다 이 시의 중심은 ‘배꼽’이다.
시인은 그것을 *“이 길이 시작된 깊은 샘이요 / 언제나 생의 무게중심이요 / 이끼 덮힌 성지”*라고 말함으로써,
존재의 출발점이자 삶의 방향을 잡는 영혼의 근원으로 승화시킨다.
‘이끼 덮힌’이라는 수식은 시간의 침묵과 망각을 견뎌온 장소라는 인상을 주며, 시 전체의 정서를 감싸 안는다.
결국 시는 *“오늘의 나는 / 내일의 나에게 / 표지석 하나 남긴다”*는 구절로 절정을 이루고,
마지막엔 *“다시는 이 날을 / 잊고 살지 않도록”*이라는 기도 같은 문장으로 닫힌다.
이 종결은 단순한 회상에 머물지 않고, 기억을 살아있는 실천으로 남기려는 시인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
「그 언덕에 올라」는 고요하고 단정한 언어로 인생이라는 길 위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과 그 속의 울음과 의미를 천천히 더듬는다.
이 시를 읽는 일은 곧, 우리 각자의 내면에도 하나쯤 있을 **‘지도에도 없는 언덕’**을 떠올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 조용히 표지석 하나를 세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