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노인이 사는 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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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638회 작성일 21-05-02 11:23본문
독거노인이 사는 집 외 1편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아내
세탁기 속에 아내가 앉아 물끄러미 속옷을 내민다. 깜빡 두고 온 차키를 흔들며 현관에서 아내가 웃는다. 이것은 익숙한 풍경이 만든 고도의 착각일 뿐이다. 마침내 고요하고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저녁. 리듬에 맞춰 냉장고 문을 여는데 깜짝, 흰 물병을 안고 있는 유령, 놀라 뒷걸음질 치니 얼려놓은 곰국 봉지를 들고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온다. 주방으로, 욕실로, 아내는 나를 끈덕지게 따라다닌다. 도저히 머리가 아파 안 되겠구나. 아내를 그만 끄고 눕는데 슬그머니 이불속 베개가 등을 안는다. 간절한 바람처럼,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날 모든 사물은 아내로 변한다. 집안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아내는 결코,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詩』2021년 5월호
댓글목록
최정신님의 댓글
최정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내... 능청스레 시가 압권입니다.
언어를 부리는 기가 팍팍...
아내와 예쁜 집에서 예쁜 봄 되세요.
서피랑님의 댓글의 댓글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존경하는 최시인님~~ '아내' 시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고 공포,호러물입니다 ㅎㅎ
암튼 잘 지내다, 좋은 날에 뵙겠습니다.
이종원님의 댓글
이종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 좋은 시를 읽게 되어 마음이 설렙니다.
생활 주변 일상에서 발굴해내는 소재와 껍질을 벗겨내자 마자 튀어나오는 맛은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참으로 절묘한 맛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