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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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장승규
태어나 보니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몽골에선
낙타가 태어나면 새끼 목에 하닥을 건다
하늘색 조각천에 바람이 가닥가닥 묶여 있다
배고픈 늑대 눈에 띄지 말기를
어서 네 발로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오기를
튼튼하게 자라 주기를
더러는
삭막한 세상에도 정이 흐른다
드문 드문 서있는 나무는 기억한다
누구나 살아가야 할 이유 하나씩은 있다
사랑했던 일을 잊지 않는 일
유목민처럼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다
오늘도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떠나기 위해서 게르를 짓는다
(남아공 서재에서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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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님의 댓글

낙타처럼 태어나서
가족들의 사랑과 격려로 평생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삭막한 사막 아래로 흐르는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떠날 준비로 짓는 삶 – 장승규의 〈낙타〉를 읽고
장승규 시인의 시 〈낙타〉는 황량한 세상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사랑의 흔적을 놓지 않으려는 존재의 태도를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낙타'는 이 시에서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거친 삶의 환경 속에서 조용히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은유로 기능한다. 태어남, 기억, 떠남—이 시는 세 개의 큰 흐름 속에서 천천히 독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태어나 보니 /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이 시의 시작은 운명이 아닌, ‘주어짐’의 세계에서 태어난 한 존재의 상황을 설명한다. 선택 없이 주어진 환경, 생의 조건. 그러나 이 척박함은 시인의 시선 속에서는 단지 비극으로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몽골 유목민의 문화, 곧 “새끼 낙타 목에 하닥을 거는” 풍습을 언급하며, 그 삭막한 땅에서도 사랑과 염원이 깃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닥에 “바람이 가닥가닥 묶여 있다”는 표현은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유목민의 하늘색 천에는 단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무사함과 희망이 걸려 있다. 그것은 기도이며, 동시에 사랑의 징표다. “배고픈 늑대 눈에 띄지 말기를 / 어서 네 발로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오기를”—이런 염원 속엔 자식에 대한 간절한 마음, 생에 대한 연민, 그리고 견뎌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슬픈 인정이 들어 있다.
시인은 말한다. “더러는 / 삭막한 세상에도 정이 흐른다.”
이 짧은 문장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사막처럼 건조하고 매정한 세상에도 사랑은, 기억은, 정은 스며든다.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는 기억한다”—이 표현은 곧 시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삶 속에서 흔하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기억을 간직한 이들. 그리고 그 기억은 곧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다. “누구나 살아가야 할 이유 하나씩은 있다 / 사랑했던 일을 잊지 않는 일”—삶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과거의 온기라는 진실이 담겨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유목민의 삶을 빌려 철학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유목민처럼 /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다 / … /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 잘 떠나기 위해서 게르를 짓는다.”
삶은 잠시 짓는 천막일 뿐이며, 진정한 준비는 정착이 아니라 떠남을 위한 것이다. ‘게르’는 거처이자 통과점이다. 이는 인간 존재가 삶의 모든 과정을 떠남의 연습으로 삼아야 한다는 깊은 통찰이다.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삶조차 사실은 ‘잘 떠나기 위한’ 연습이다.
마무리
〈낙타〉는 생의 조건이 척박하고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그 안에 스며든 기억, 사랑, 기도의 힘이 존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시인은 말없이 이 세계를 걸어가는 낙타에게 하닥을 걸어준다. 그 조각천에는 삶을 향한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응원이 매달려 있다.
이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짓는 삶은, 어디로 떠나기 위한 게르입니까?”
그리고 “그 척박한 길 위에서, 당신은 무엇을 잊지 않으려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