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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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목
/장승규
누군가 살다간 자리는 얼마가 지나야 비어지나
그 빈 자리에
다시 누군가를 심을 수는 있을까
앞뜰에
옮겨 심은 지 35년째, 나무고사리 한 그루
어느 해부터 머리숱이 자주 많이 빠지더니
올해는 아예 새 순이 나지 않는다
그 옆에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자식도
철없이 늘 푸른 소철 한 그루와
밤에만 눈 뜨는 당달 외등뿐
내가 옮겨 심었으니
나만 바라보며 살았나 보다
그 긴 세월을
네가 가더라도, 나는
앞뜰에서
네 그림자 한 뼘 베어내지 못할 것 같다
(남아공 서재에서 2024.01.18)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남아공엔 나무고사리가 진짜 나무이다.
높이는 2미터에서 5미터까지
둘레는 30센티에서 80센티 정도까지 자란다
몇 년을 살다가는 지는
알지 못하고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감상문: 지워지지 않는 자리, 잊히지 않는 그늘 – 장승규의 〈고사리목〉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고사리목〉은 단순한 식물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곧 그 안에 깊은 상실과 기억,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조용히 쌓아 올리는 서정시다. 시는 떠나간 존재를 향한 담담한 애도와, 결코 비워지지 않는 ‘자리’에 대한 자각을 담고 있다.
“누군가 살다간 자리는 얼마가 지나야 비어지나”—시의 첫 행은 시인이 직면한 감정의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시간이 흘러도 채워지지 않는 자리,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존재의 흔적. 이 물음은 사랑했던 이, 혹은 함께 살아온 무언가와의 이별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가슴 깊이 느껴보았을 절절한 질문이다.
그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인은 오래전 옮겨 심은 “나무고사리 한 그루”를 말한다. “옮겨 심은 지 35년째”—이 한 구절에 쌓인 세월의 무게가 대단하다. 단순한 식물이 아닌, 그와 함께 살아온 시간, 돌보고 함께 늙어온 생명이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인가 고사리는 머리숱이 빠지고, 이제는 “아예 새 순이 나지 않는다.” 이는 생명의 노쇠함을, 동시에 관계의 쇠락을 상징한다. 잎 하나 피우지 못하는 생명체는 이미 떠나간 존재의 은유이며, 그 빈 자리는 자라고 있지 않다—그저 조용히 사라져가고 있다.
더욱 인상 깊은 대목은 “그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시인은 한 생명체의 고독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친구도, 자식도 없이, 겨우 “늘 푸른 소철”과 “밤에만 눈 뜨는 당달 외등”만이 곁을 지킨다. 특히 “철없이 늘 푸른”이라는 표현은, 철을 따라 늙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대비를 부드럽게 드러낸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 있는 존재의 무심함이자, 죽어가는 이의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내가 옮겨 심었으니 / 나만 바라보며 살았나 보다”—시인의 이 말은 깊은 죄책감과 연민을 담고 있다. 돌봄이 곧 운명이고 관계였던 존재. 자신이 심은 생명이었기에,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고사리목. 그 존재의 죽음 앞에서 시인은 어떤 책임감과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완숙한 정서로 마무리된다.
“네가 가더라도, 나는 / 앞뜰에서 / 네 그림자 한 뼘 베어내지 못할 것 같다”—죽음은 단절이 아니다. 떠났어도, 남겨진 자는 그 자리를, 그 그늘을 결코 잘라내지 못한다. 기억은 자라지 않지만, 그것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고사리목은 더 이상 푸르지 않지만, 그 잎사귀의 기억은 여전히 시인의 앞뜰을 덮고 있다.
마무리
〈고사리목〉은 단순한 자연 묘사 너머, 한 존재를 잃은 이의 깊은 내면과 애도를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시다.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나를 바라보던 존재, 그리고 그 존재가 사라진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자리. 이 시는 그 잔존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아주 뚜렷이 우리 앞에 놓아준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묻게 된다.
“당신이 떠난 그 자리는 지금도 내 안에 자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 그늘을 껴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김용두님의 댓글

나무의 생이 참 쓸쓸하고 서럽군요.
문뜩 이 추운 겨울에 난방도 안되는 곳에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독거 노인분들이 떠오르네요.
그들도 심겨진 나무처럼.....
잘 감상했습니다. ^^
장승규님의 댓글

김용두 시인님
나무도 우리도
생이 다들 그렇지 싶어요
감사합니다
香湖김진수님의 댓글

마지막 행이 기가막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