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연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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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연싸움
이명윤
둘둘둘 얼레가 바람을 감았다 펴니
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공중의 세상이 분주하다
능숙하게 바람의 등에 올라타는 연
바람의 꼬리를 잡고
빙글빙글 맴을 도는 연
바람의 손을 놓쳐 그만 땅바닥에
머리를 쳐박은 연 하나가 틱,틱,틱,
허공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다시 씩씩하게 솟아오르니
멀리 바람의 정수리에 앉아
가부좌를 튼 연이 스윽 웃는다
토성고개 세포고개 영차영차 오르던 바람
동피랑 서피랑 지붕 위를 맴돌던 바람
명정골 우물가 한가로이 졸던 바람
하나 둘 소문 듣고 모여 드니,
불끈불끈 하늘길 힘줄이 돋고
창공에 뜬 수십 개의 얼굴에
생글생글 화색이 돈다
아이 연을 목말 태운 바람 하나가
견내랑 허리춤 빠르게 지나
허방에 몸을 숨기자
하늘의 물살이 일순 수상해진다
다시 번뜩 갈치처럼
눈빛을 드러낸 연을 정점으로
하늘길이 부챗살처럼 펴지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여 눈이 아리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둥둥 북포루에 진을 친
거친 바람의 무리가 정적을 깨고
공중의 가장자리를 빠르게 유영한다
엉거주춤 긴장한 구름들,
강구안 방면으로 하나 둘 뒷걸음치니
순식간에 하늘의 지형이 바뀌어간다
앞서가던 우두머리 바람이 몸을 틀자
사선에 놓인 연들의 맥박이 빨라지며
천상제일 우주의 싸움이 시작된다,
가벼이 등 돌리지 마라
쉴 새 없이 바람을 이해하며
공중의 길을 만들어 가라
수직으로 날아오른 연이
장작 가르듯 번쩍,
상대방의 숨줄을 내려찍는다
한 눈 팔던 연이 갑자기 잘리어진 목,에
망연자실 정신을 잃고 휘청거린다
부랴부랴 쫓기던 연 하나는
바람이 꼬리를 감아올리자
단박에 버티던 힘줄이 끊어진다
저 넓은 한산 앞바다
왕창왕창 두레박으로 퍼올린 듯
눈부시게 파란 하늘,
살려고 하는 자 모두 죽을 것이니
어디에도 숨을 곳 없고
서슬 퍼런 칼과 칼이 춤추며
부딪히는 자리마다
비명도 눈물도 흔적이 없다
귀청을 울리는 북소리, 함성소리,
지상의 깃발이 객귀처럼 나부끼고
물새들이 꺼이꺼이 공중을 돌며 운다
한바탕 잔치가 끝날 무렵,
끝까지 버티다 결기를 놓아버린
유독 크고 붉은 연 하나를
동충의 갯바람이 데리고 간다
좀 전의 사나운 기세는 간데없고
연을 공중에 편안하게 누인 뒤
네 귀를 잡고 너울너울 떠가니
두 팔을 길게 뻗은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하늘을 따라간다
저렇게 높이 뜬 연은 잡을 수 없지,
난데없는 기척에 놀라 뒤돌아보니
얼굴에 풍상 가득한 흰 수염의 노인이
그날의 수군(水軍)인 듯 클클 웃는다
-계간 『사이펀』 2025년 여름호
댓글목록
임기정님의 댓글

연 놀이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얼레를 풀었다 감았다
그중 제일이 연싸움이죠
어릴 적 귀둥이 아저씨가
꼬리연 방패연을 잘 만들었던 때
그리워집니다.
시 잘 읽었습니다.
산채로 날려 보내기 위해
두 둥
장승규님의 댓글

우와!
통영연이 엄청시리 깁니다.ㅎ
사연이 긴가 봅니다.
부회장님! 자주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