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생가(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 1114번길 6(사기리)
조선말기의 문신학자이자 대문장가인 이건창 선생의 생가터이다.
이건창 선생 묘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는 이곳에서 떨어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위치해 있다.
봄바람 꽃바람, 강화도 교동답사에서
2016.4.9.토.
남편 사학회 총동창회에서 개최한
강화도 교동답사에서
이건창선생 생가지와 묘소이야기
寧齋 李建昌 선생(1)
이건창(1852~1898), 호 寧齋 또는 明美堂
조부 이시원에게 家學으로 양명학 계승
15세, 병인양요때 조부형제(이시원,이지원) 순절장면 목격
조부 이시원은 동생 이지원과 함께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침략에 분함을 못이겨 자결하였다.
1866년 別試, 道科에서 15세의 나이로 급제
1870년(19세) 홍문관, 1873년(22세) 한림학사
1874년(23세) 세폐사(歲幣使)로 북경에 갔을때
청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들과 글을 주고 받음: 감탄
1877년 암행어사로 충청감사 趙秉式을 적발하였으나
모함으로 귀양, 1882년 경기어사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 고령탄(高靈歎), 광주요(廣州窯) 등 집필
『당의통략』은 파당을 초월하고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사기(砂磯) 이시원(李是遠)ㆍ지원(止遠) 형제의 충절
이시원(1789~1866), 호 砂磯, 광명(匡明)의 고손, 이건창의 조부
1815년 과거 급제, 경기어사, 춘천부사, 한성부 우윤, 개성유수, 승정원좌승지,
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정헌대부 등 역임.
병인양요 때 아우 지원과 함께 유소(遺疎)를 남기고 飮毒自決.
고종임금: 영의정 추서, 忠貞의 시호 내림
-국가 위난에 터럭 만큼의 도움이 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자행-
<유소遺疎>
병인양요를 이나라 중흥의 전기로 삼아
節用과 愛民을 통치의 도로 할 것을 당부.
寧齋 李建昌 선생(2)
1891년 漢城小尹 시기, 청인들의 토지매입 불허
1893년 관리의 매관매직을 탄핵 상소하자 모함 받고 보성으로 귀양
고종에게 富强은 오직 임금의 마음인 實心에 있는 것이지
開化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후 명성왕후의 복위와 국장을 치를 것을 주청,
그 후 단발령을 거부하고 강화에 은거.
고종의 "해주관찰사냐? 아니면 귀양길을 택일하라!"
-거역하고 古群山島로 귀양감
귀양에서 풀려 나와 1898년(47세) 별세할때까지 서울땅을 밟지 않음.
*해설을 맡아주신 完雲 李殷龍博士님의 요약된 해설문에서 발췌
명쾌한 해설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명미당 이건창 선생 문학비..생가 뜰에서
숭양가는 길에
개성을 육년사이에 다섯번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 동안 벼슬살이에서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이건창생가는 전형적인 한옥구조를 보이는 집으로
9칸 규모의 ㄱ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이건창 선생은
본관은 전주, 자는 봉조, 호는 영재,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시원이며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상학이다.
이건창은 1852년(철종 3)에 태어나서 1898년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조선말기의 문식· 학자 이자 대문장가이다.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
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등용이 연기되어 19세인 1870년에 홍문관에 나아갔다.
고종 11년(1874)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충청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천성이 강직해 부정·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고 한다.
강직한 성격 때문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다.
이건창 선생 묘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위치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 없다. 전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은 선생 사후 만주방면으로 흩어져서 직계후손은 없다고 한다.
묘소 뒷산에는 진달래꽃들의 만발로 봄의 정취를 더욱 느끼게 하였다.
그 옛날 학창시절에 입에 달고 다니던 진달래 詩가 떠 오른다.
진달래 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우리님
보시고
가실땐
落花를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찬란한 빛 김영희
*다녀 온 다른 유적이야기는
준비되는대로 여행기방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