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보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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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보는길
1.생명
겨울이 길다고 느껴지던 어는 날이었습니다.
눈(目)조차도 너무 오래 뻣뻣하다 싶었습니다.
나는 광에서 양파 하나는 꺼내 왔습니다.
그리고 유리컵에 물을 채운 다음 그 위에 양파를 앉혀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겨울에 자주 했던 양파에 싹 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며칠 후 과연 양파의 엉덩이에서는
하얀 뿌리가 내리고 머리에서는 파란 싹이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눈이 얼마나 저런 파란싹을 보고 싶어했는지 이내 알겠더군요.
집에서 무료하다 싶으면 눈이 창가의 양파컵에 가 있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의 내 방은 2평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4면의 벽 가운데 2면이 바깥 풍경과 연결된 유리벽입니다.
평소 남들의 발코니를 잘 보고 다니던 나인지라
은근히 내 방의유리창 정경에 마음이 쓰일 때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꽃 한 송이라도 올려 두어서 나도 그렇지만 지나는
행인들의 눈공양도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안팎 사람들의 잔물음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내 방의 남쪽 창에 올려 둔 화병에서 진달래 꽃망울이 터진 것입니다.
2월인 지금에, 조화가 아닌가 하여 일부러 꽃잎을 만져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봄이면 우리네 산천에 꽃불을 놓는 틀림없는 진달래입니다.
이 진달래 한 다발은 길상사 개원날 마당에서 우연히 뵌 분이
서점에 나오는 길에 맡겨 놓았다고 해서 무엇인가 하고 가지고
올라와 풀어 보았더니 처음엔 그저 잔나뭇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다보니 꽃눈이 다닥다닥 붙은 진달래가지가 아니겠어요?
화병에 물을 채워 꽂아 두었더니 세상에, 햇볕 속의 봄만 따먹었는지 이렇게
잘도 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 얘기는 양파의 푸른 싹이나 진달래의 붉은 꽃만을
찬미하는 게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있는 것들은 저렇게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진달래 꽃가지가 원근(元根)으로부터 꺾여져 온 것은
우리 사람으로 말하면 반죽음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잉태한 것을 물 한가지만 먹고도 마침내 내놓고 만 것이
갸륵하지 않는가요?
하긴 우리 고향에서 봄날 죽순 오를 때 보면
그들은 제자리를 누르고 있는 돌 조차도 불끈 제치고 올라오거든요.
불에 수없이 담근질을 당한 부지깽이조차도 봄이 오면
파란 잎을 틔우고 싶어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인 우리에게 있어서랴.
2,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스님, 하늘빛과 물빛이 시릴 만큼
푸른 가을날의 아침입니다. 이 맑음 속에서 안녕하옵신지요?
지난 여름은 저한테 빈 계절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서늘바람이 겨드랑 밑을 파고들자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녂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을 해변의 길손이 되어 한 며칠
떠돌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해수욕객들이 떠나 버린 쓸쓸한 해수욕장에 들렀습니다.
한 번쯤 빨래를 했으면 싶은 비치파라솔 아래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자니 모래능선에 빈 목을 내놓고 있는 소주병이 허무한 옛사랑인
양 외로워 보이는군요. 저는 눈을 돌려 좀더 먼데를 봅니다.
아,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만일 어떤 선사께서 절더러 이 바닷가에 온 뜻을 말해 보라면
저는 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저 바위섬에 파도결이 내놓은 수 많은 상흔처럼
저 또한 세파에 부딪치면서, 그리고 더러는 자해에 의해
빗금져 있는 마음의 상처를 소금물에 적시고 싶어 왔노라고요.
스님, 정말이지 저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섬을 닮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찾아 주셨던 병상에 있었을 때 저는 참 많이도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었지요. 때때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이제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병실에, 그것도 중환자실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얼마나 생각 자체가 괴로운 것인지를.
생각으로 죽음을 짓고 생각으로 지옥을 이루기도 합니다.
생각에 의해 이별을 하며 눈물짓고, 생각에 의해 오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거리기도 합니다. 이런 번뇌가 잠을 쫓아 버린 새하얀 날밤의
고통은 육신의 아픔보다도 더하더군요. 그러기에 사람들은 생각의 집인 마음을
숨겼다고도 하고, 마음을 빼앗겼 다고도 하며 마음을 잃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이겠지요.
스님, 언젠가 저는 아흔 살이신
피 선생님을 찾아뵈고 이런 속내를 펴보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그러자 평생 그만큼 순수하게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선생님께서 "정 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 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윗섬에 파도 자국이 없을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빗금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아린 상처나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요.
오늘은 제 넋두리가 길어졌습니다.
소슬한 가을바람 탓이라고 생각하시고 미소로써 저의 무안을
씼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내 청안 누리시기를 빕니다.
3.얼굴과 나이
"사진이 나이 들게 나왔었군요"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책에 나온 사진은 언제 적 것입니까?'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마 전에는 한밤중에 아랫녘에 계시는 이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건네 받자마자 이모께서는 "이 빌어먹을 놈아. 언제 그렇게 폭싹
늙어뿌럿냐"며 푸념을 해대셨다. 어떤 텔레비전 화면에 잠깐 지나간 내 모습을
보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만나 뵌 지가 3년이나 되어가니, 당신 나이 드는 것만
알고 내 나이 드는 것은 모르시는 이모로서는 그럴만도 하다.
언젠가 원로분으로부터 이런 말 들은 것을 기억한다.
"세울이라는 것은 겨울 삭정이에 눈 쌓이는 것 같다네. 한참 쌓일 때는
모르는데 어느 순간 그 가벼운 눈발 하나 더 얹히면 풀썩 꺾이고 말거든."
나도 이제야 알겠다. 시시각각으로 시간은 흐르지만 늙음은 한 달치씩
1년치씩 그때그때 표시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은 삭정이에 눈 쌓이듯
모아 둔 채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삭 한꺼번에 나이 든 표시가 난다는 것을.
지난 5월. 어떤 수녀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찔레꽃이 한창이라며 불러 주었다.
꽃구경을 하고 향기에 취한 채 수녀님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 수녀님이 "실례지만"이라고 전제한 후 내 나이를 물어 보았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5학년 몇 반이라고 대답하자
오! 하고 웃음이 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수녀님이 얼굴에
그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그 비결이 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당황해서 웃다가 '임상 실험' 중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이것 한 가지만은 공개했다.
"저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행복했던 일이나, 아름다운 풍경, 혹은 누군가의 유머 등
기분 좋았던 일만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그 반대였지요.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나한테 기분 나쁘게 했던 사람,
속상했던 일, 모진 말 등 안좋았던 것만을 떠올렸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잠자는 어린 아기를들여다봤더니 혼자 웃으며
잠을 자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저도 잠자며서 이 가는 것보다는 웃는
얼굴이 되고자 그런 임상 실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4.마음 있니?
수원에서 전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나간 과거가 되었지만서도.
그 시절에 개태라는 개를 키우며 겪었던 애환을 글로 써낸 적이 있는데,
아파트로 이사 나오면서 개태를 입양시킨 이야기였다.
그런데 후일담이 있다. 녀석이 보고 싶어 찾아갔다가
돌아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훌쩍 뛰어 나와 열려진 대문사이로 사라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녀석의 새 주인과 골목골목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나중에는 오이 파는 행상인의 마이크가 설치된 리어커를 빌려서
"개태야! 개태야아!" 목이 쉬게 불러 어떤 스레기통 뒤에서 고개를 쳐든
녀석을 간신히 찾아내어 새 주인한테 넘긴 다음,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모질게 결심을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리태가 입학 선물로 하필이면 강아지를 원했다.
나는 단호히 안된다고 딱 잘랐다. 그러나 리태는 잊을 만하면 개타령을
해대었다. 아파트에서도 애완견은 키울 수 있다는 둥, 은경이는 집에서
기다리는 강아지 때문에라도 집에 빨리 들어가더라는 둥 무슨 일에든 걸
수 있는 일에는 다 개를 걸고 넘어졌다.
나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무장하여 지난 1년을 무사히 이겨냈다.
그런데 연초에 친구네와 떡국 먹는 자리가 화근이었다. 우연찮게
강아지 이야기가 나와서 리태, 개태 이야기를 보태었는대 개를 끔찍히
좋아해서 개를 충실히 모시고(?) 사는 친구네 부부가 흘려도 좋을 것을
새긴 모양이었다. 연휴에 이웃집에서 분양받았다며 강아지를 코트 속에
싸안고서 앙증맞은 집이며 식량까지 사들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개와의 연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일부러 무심했었는데 엄마 품에서 갓 떨어져 나온
녀석인지라 자주 울어대는 바람에 그러기도 어려웠다. 특히 포대기에서
웅크리고 혼자 자던 녀석이 무어라고 잠꼬대까지 하며 흐느끼는 것을
보면서는 끌어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리태가 이번에는 제발 강아지 이름을 잘 좀 지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개태는 개태만으로 끝내자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음'으로 부르자고
결정했다. 예쁜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마음'이냐는 리태한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강아지 이름 덕분에라도 네가 마음을 더 좀 챙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요즘 젊은 너희들은
몸 받들어 모시는 것만 생각하고 마음은 서푼어치도 안되게 홀대하기 때문이야.
내가 '마음 있니?''마음 없니?'
이렇게 물으면 굳이 강아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의 안부에 대해서도 한 번씩 돌아보기 바란다."
5.무형의 선물
걷지 못하는 사람이 창 밖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다보며 쓴 '아, 저렇게 종종종종종 걸어 보았으면...'
하는 수기를 보았다.
여기에서 다는 두 다리를 대지에 딛고 선, 그리고
걸어 다니는 행복을 생각했다. 그러자 두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를 대하며,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축복으로 새삼스럽게 다가와서 내 가슴을 한동안 찡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요란한 것, 남들한테는 없고
나한테만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만족하지 늘상 주어져 있는 평범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숨쉬게 하는 산소, 해와 달, 구름과 바람과 비와...
심지어 아침에 만날 수 있는 이슬 한 방울까지 얼마나 산뜻한 선물인가.
우리는 선물을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난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아니 보여도 알지 못하는
선물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저 푸른 가을 하늘도.
최근 내가 받은 무형의 선물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지나는 길에 내 사무실에 들렀다는 친구가 "나한테서
무슨 향기 안 나?"하고 물었다. 나는 그의 옷 가까이 코를 갖다 댔다.
풀내음 같기도 하고, 꽃향기 같기도 한 내음이 다소 느껴지긴 했다.
친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꽃집에 들러서 난향기를 묻혀 왔단 말이야."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계시는 수녀님이 어렵게 전화를 걸어 왔다.
"보내 주신 책 고맙습니다.
저는 드릴 게 없어서 어쩌지요? 따님 이름을
알려 주시면 제가 기도해 드릴 수는 있는데..."
수화기로도 수줍음이 느껴지는 이 청빈한 선물보다 귀한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군에 간 아들이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왔다.
"아빠!(녀석한테는 아직도 아빠이다) 일주일 훈련 가거든요.
그동안에 아빠 생일이 들어 있어서 가불 축하하려구요.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생일 축하합니다.
이기자!"
이기자는 아들네 부대의 경례 구호이다.
어제 만난 동화작가. 그녀는 "빈손으로 와서 쑥스럽네요"
하다가는 내 안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서
호호 입김까지 불어 가며 어롱을 말끔히 닦아 놓고 갔다.
이런 따뜻한 선물이 이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6.그대 눈동자 속으로
12월을 저는 '신의 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결산인 달인 것도 그렇고 파랗게 여문
청냉한 하늘 표정 또한 그렇습니다.
잎을 남김없이 모두 지운 나무들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하며 밤하늘의 별들이 또록또록히 눈을 밝히고 있는 것도
범상치 않은 표정이지요.
엄동이긴 하지만 청냉한 기운이 있어 감히 수작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기품이 있는 달, 그러기에 노인들의 눈동자조차도 맑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기품 있는 12월이 좋습니다.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칼바람이 목덜미를 휘감아도
'누가 항복할 줄 알아'하며 목을 곧추세우고 걷는 걸음에는 투지가
있지 않던가요? 포장마차에서 마신 소주 몇 잔으로 엄동을 다스리는
가난이 위대해 보이는 것도 역설적이기는 합니다만 이 계절의 힘입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만 언젠가 산사에 들렀을 때
노스님이 볕 잘 드는 마루에 앉아서 내의를 뒤적이고 있어 무엇하고
계시냐고 했더니 이를 잡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한쪽에서는 깎은 머리가
파아래 보이는 사미승이 깨어진 바가지를 깁고 있었고요. 이런 청빈의모습이
돋보이는 것도 이 계절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첫 아이를 얻었을 적의 일입니다.
점심나절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의 첫눈이.
저는 문득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눈(雪)을 보게 될 아기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두말 않고 조퇴를 신청해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단걸음에 집으로 가니 아기는 세상 모르고 포대기
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기를 흔들어서 아기의 잠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내 아기가 그 까만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방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기가 듣건 말건 말하였습니다.
"자, 봐라. 이것이 이 세상의 눈이라는 것이다.
얼마난 가볍고 하얗니? 어디 한 번 맞아 볼래?"
자는 아기를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첫눈이 이 세상 첫 아기의 볼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는 저는 새삼스럽게
아기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흑진주라는 것을 저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아기 눈동자처럼 맑고 빛나는
흑진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흑진주 속에 들어 있는 동그란 점 같은
나의 상반신.
저는 문득 때묻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기의 천진무구한
눈동자 바다에서 멱을 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아, 그것은 환희였습니다.
내가 당신과 눈싸움을 하자고 한 적이 있지요?
그것은 어렸을 적에 동무들과 곧잘 벌였던 눈싸움의
복습이라기보다는 내 모습이 당신의 눈동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맑은 눈동자 속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것을
그윽이 바라봄은 행복입니다. 아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 사무실의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다 말고
빙그레 웃으며 구경하는 것조차도 행복한 정경이 있어
마음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젊은 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연인들처럼 허리가 으스러져라 팔을 감고
가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상대방의 청바지 뒤주머니에 X자로
손을 집어 넣고 걸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정경은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며 걸어가기 위해
뒷걸음질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상대를 사랑하하면
걸어가는 그 사이에도 얼굴을 마주보며 방글거리고 싶어질까 생각해 보세요.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가요?
저는 정호승 시인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기를 보다 말고 아기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눈부처'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내게 되었노라고.
곧 눈부처라는 말은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동인(瞳人)·동자(瞳子)란 뜻이라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또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 있는
부처'로 표현한 선인의 아름다운 마음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정호승 시인은 고백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 세상의 바다보다 더 넓고
바다보다 더 깊은 데가 눈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담고, 바다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겨울, 이 12월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윽이 들여다보는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이웃 중의 하나이고 싶습니다.
촛불 밝혀진 탁자 건너편의 당신의 눈동자 속에 든 저의 눈부처,
그것은 틀림없는 행복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눈부처'라는 시를
오늘치 사랑의 양식으로 옮겨 드립니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의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로 저녁별이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되리
출처 : 정채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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