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면 가식하거나 날조하는 일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표현에 있어서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불변의 진리를 파악하고 일시적인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그 진리만을 목표로 전진하는 말하자면 개관적인 진리에 충실하는 언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참으로 진실하게 살려면 이 두 가지가 나 자신의 생활과 사상에서 일체화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년에 조성돼 가는 우리 사회 풍조에 있어서 진실을 운위하는 것은 거의 생존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보통 얘기다. 전면적인 혼탁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인 정의와 진실이 실현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며 그런 진실이 사회 풍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려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우선 첫째로 사회가 그렇게 까지 철저하게도 전적으로 불 진실했느냐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허위보다는 진실이 더 많기에 이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사회가 악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는 현상이라면 그 즉석에서 그 사회는 자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진실은 고독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덕필고 필유린>이라는 고언과 같이 덕이 외롭지 않아 반듯이 이웃이 생긴다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진실은 진실에 호응하여 그 감화와 격려가 의외에도 큰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있는 것이다.
셋째로 진실이 현재에서는 매몰되는 일이 없지 않으나 미래는 결국 진실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허위 날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반듯이 나타난다. 진실에는 재생력이 있다. 땅에 묻힌 시앗과 같아서 거기서 싹이 자라나는 것이다. 넷째로 진실은 심리적으로 건강하다. 무엇을 거짓으로 주며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 같이 발표했다면 그 사람은 그 발표한 내용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또 허위 진술을 진실인 것 같이 입증하려면 거기에 또다시 허위를 덧붙여야 한다. 그 사건이 오래 끌면 끄는 것만큼 허위는 가중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일일이 고의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사실 아닌 것을 그렇게 오래 또 그렇게 많이 기억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이므로 어느 순간에 그의 허위가 탄로 나고 진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 하면 사실 자체가 엄연하게 자기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허위와 부정이 많은 사회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 장수하지 못한다는 것과 진실이 반듯이 승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는 혼자서라도 진실 편에 선다는 각오를 생활로 입증하는 인사가 날로 많아지기를 우리는 갈망하고 있다. 간혹 그런 결의로 진실한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것 때문에 곤궁에 빠지고 오히려 무능, 우직 또는 폐쇄 자로 간고 되어 사회에서 제외되는 경우에는 <그럴 바에야 나 혼자 희생되면 뭣하나!>하는 심정으로 혼탁한 세정에 밀리며 밀며 여세 추이하는 것을 택하는 일이 적지 않다. 결국 그는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거나 그것을 포기한 사람이 되고 만다. 맛을 잃은 소금 노릇을 할밖에 없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불리할 지라도 <진실 필승>.을 확신하고 내일을 바라보며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인사들이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속에서 배출되기를 갈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