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백과사전들이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 1971년 조선일보가 외국 백과사전들의 수입 증가 실태를 꼬집었다. 당시 북한 무장공비나 마약 사건에나 쓰던 '침투'라는 표현까지 썼다.(1971년 4월 13일자) 부유층들 사이에 이 값비싼 수십 권짜리 외국책 세트를 구입하는 일이 급증하자, "귀한 달러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 것. 영문 서적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허영심과 과시욕을 채우려고 거실에 꽂아 놓고 있다면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외국 백과사전은 값이 엄청났다. '브리태니커(Britannica)'는 4가지 등급의 장정으로 만들어 판매했는데, 가장 싼 '화이트 임페리얼'도 32권 한 세트에 18만3600원(현 시세로 약 1020만원)이었다. 최고급 장정의 '블루 카프 바인딩'은 36만3000원이나 됐다. 재벌급들은 거의 모두 최고급품을 들여놓았다. 이렇게 비싼데도 외국 백과사전은 1968년 이후 해마다 약 3000세트씩 팔려나갔다. 1970년대 초 국내의 일반 단행본 판매량은 일본의 16분의 1도 안 됐지만, 브리태니커 판매량만은 일본의 몇 배나 됐다. 심지어 어느 유흥주점 여주인도 '경영상 필요'하다며 구입해 가게 벽에 꽂아 놓았다. 양복점·양화점 중에도 브리태니커 있는 곳이 늘어 갔다.(경향신문 1973년 3월 19일자).
▲ ‘외국 백과사전이 한국 시장을 노리고 침투하고 있다’고 비판한 기사. (조선일보 1971년 4월 13일자).
물론 백과사전들이 모두 장식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중엔 백과사전을 'A'부터 'Z'까지, '가'부터 '하'까지 통독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1998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사상 최초로 만점(400점)을 받았던 오승은씨를 비롯해, 1990년대 수능 전국 수석을 차지한 여러 영재가 어릴 때부터 백과사전을 즐겨 읽었다고 밝혔다. 에디슨에서 빌 게이츠까지 세상을 바꾼 세계적 유명인들, 우리나라의 발명가 신석균씨, 미술작가 강익중씨, 가수 겸 JYP엔터테인먼트 대표인 박진영씨도 백과사전 탐독파였다. 지식의 망망대해를 헤엄친 그들의 백과사전 읽기란 오늘의 '인터넷 서핑' 같은 것이었으리라.
온라인 검색 시대가 되면서 백과사전의 시대는 급속히 저물었다. 브리태니커 세트는 1990년 전 세계에서 12만 질 팔린 게 정점(頂點)이었다. 2010년엔 8000질밖에 팔리지 않았다. 2012년 브리태니커는 탄생 244년 만에 종이책 발행을 중단했다. 그 시장을 차지한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접속자가 하루평균 2500만명이다. 아직도 거실을 영어 원서로 '우아하게' 꾸미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선 알맹이 없이 양장본 책의 겉모습만 재현한 '모조품 책'이 팔리고 있다.
필자 약력 - 김명환
▲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E-mail : wine813@chosun.com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활동하며 문학·영화·연극·뮤지컬을 취재하고 수백 편의 영화와 연극을 비평. 해리슨 포드, 케빈 코스트너 등 세계적 톱스타들을 할리우드에서 인터뷰했으며. 1995년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국내 최초로 단독 인터뷰했다.'할리우드 혁명'(1994년) '세계의 문화도시'(2000년)등 해외 현장 취재 시리즈를 기획 보도해 주목 받았다. 1996년 kmtv '김명환의 영화이야기' 진행.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황인용·금보라입니다'등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 해설과 토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조선일보 수습 21기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