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월 국내에 1800부가 반입된 외국 인쇄물에 대해 치안국이 전량 압수 조치를 하고 수입 업자를 소환 조사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일본제 달력이었다. 내용이 외설적이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천장절(天長節·일왕 생일)' '기원절(紀元節·일본 건국기념일)'등 일본 명절이 표시된 일본 달력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당국은 '일본인용 카렌다를 우리 국민 손에 들어가게 했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며 이를 수입한 회사를 '국가관이 미약하다'고 비난했다. 중대 사건 때처럼 신문엔 속보가 이어졌다.(조선일보 1958년 2월 5일자)
▲ 1960년 찬 바람 불자 서울 도심에 등장한 달력 노점 풍경을 전한 신문 기사(조선일보 1960년 11월 16일자).
1958년 초 도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일본 측이 우리 올림픽위원회로 부쳐온 대회 홍보 달력 50부도 '일어가 표기되어 있다'는 이유로 당국에 압수됐다. 일제 달력 파문을 보면 이승만 정부의 반일(反日)정책이 얼마나 강경했는지 알 수 있다. 영향력과 규제가 비례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반세기 전 우리나라에서 달력이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종이 달력은 방방곡곡 거의 모든 가정집과 사무실 벽마다 최소한 1부 이상씩 일년 내내 걸려 있었다. 노출 빈도 최고의 인쇄물이었던 셈이다. 종이 달력 시대의 절정기였던 1988년 업계가 추산한 한 해 제작 물량은 약 5000만부. 이 중 기업체 등에서 만들어 공짜로 뿌린 달력이 약 2000만부였다. 1990년 말 럭키금성(LG의 전신) 그룹은 200만부, 현대는 160만부, 대우는 70만부의 달력을 만들어 뿌렸다. 11월 하순부터 백화점, 문구점의 달력 코너만으론 모자라 서울 도심 거리엔 '캘린더 노점'들까지 생겨 대목을 맞았다. 1990년엔 달력 제작 업체가 110개쯤 됐다. 어느 메이저 업체 한 곳에서 찍은 1990년도 달력은 무려 650만부였다. 참고서 시장의 강자인 한 유명 출판사도 달력 제작을 전담하는 '카렌다부(部)'를 두고, '최저 염가로 강호제언(江湖諸彦·세상 여러분)의 수요에 응하고저 한다'고 광고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일본인들은 새해 달력을 전년도 초여름부터 찍었다. 1966년 6월 일본 국경일 3개를 신설하는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자, 막대한 양의 새해 달력을 이미 인쇄해 놓은 업체 대표가 자살한 사건이 조선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스마트폰 시대인 오늘날에도 종이 달력은 연말 시장에 나오지만, 더 이상 '가정 상비품'은 아니다. 2014년 미국의 전문가들이 꼽은 '크리스마스 때 피해야 할 선물 6가지'에는 향수, 남성용 지갑, 사진 액자, 성탄 장식품, 장갑과 함께 캘린더가 포함됐다.
필자 약력 -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E-mail : wine813@chosun.com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활동하며 문학·영화·연극·뮤지컬을 취재하고 수백 편의 영화와 연극을 비평. 해리슨 포드, 케빈 코스트너 등 세계적 톱스타들을 할리우드에서 인터뷰했으며. 1995년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국내 최초로 단독 인터뷰했다.'할리우드 혁명'(1994년) '세계의 문화도시'(2000년)등 해외 현장 취재 시리즈를 기획 보도해 주목 받았다. 1996년 kmtv '김명환의 영화이야기' 진행.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황인용·금보라입니다'등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 해설과 토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조선일보 수습 21기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