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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기행1-포은 정몽주 묘원ㆍ충렬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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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6회 작성일 19-10-04 17:12

본문


용인 정몽주 묘소에서..2019.10.1.화


용인 모현면 정몽주 묘소와 충렬서원를 둘러보다
2019.10.1.화

학창시절 많이도 읊조리고 다녔던 정몽주의 '단심가'를 
용인 정몽주 묘소에서 만났다.  
'이몸이 죽고죽어..' 
다시 묘소앞에서 흘러간 그 시절를 생각하며 외워본다.

여러번 찾아본다고 벼르던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와 충렬서원(忠烈書院) 
그리고 몽고 2차침입때 국란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승장 김윤후의 
처인성지(處仁城址), 실향민이 세운 와우정사를 돌아 본 1일 역사기행이다.

1편으로 龍仁市 處仁區 慕賢面 鄭夢周 묘소를, 
2편으로 처인성지, 와우정사(臥牛精舍)로 꾸몄습니다. 

태종 이방원과 포은 정몽주 시와 얽힌 이야기를 
간략히 말하자면

태종 이방원 (하여가) 포은 정몽주 (단심가)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려보세
-태종 이방원 [하여가]

단심가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포은 정몽주 [단심가]

이방원이 새나라를 만드는데 동참하자는 내용의 하여가 시에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는 단심가로 답을 했는데 
이 단심가가 그가 고려의 충신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 정몽주는 
이방원의 지시로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죽게 됩니다. 
이 후 조선의 3대왕 태종이 되어 정몽주는 복권이 되고 
충절의 표상으로 문묘에 배향이 됩니다. 
출처: https://singletube.tistory.com/256 [방랑을 꿈꾸며]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의 묘역 이정표와 호롱불 지도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로 가는 길 표지석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 (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
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禮曹正郎)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태상소경
(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
(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
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
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 청시사
(請諡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
(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
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
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
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
(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
『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정몽주는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1401년(태종 1)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묘 
정몽주선생 묘는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기념물)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고려 말의 충신이며 동방이학지조
(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된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미며, 
본관은 영일로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연 삼장(三場)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검열부터 예조정랑 대사성문하찬성사등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까지 오르고 안사공신의 훈호(勳號)를 받았다.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양성하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여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당시 부패된 관료들의 사전제도(私田制度)를 혁파(革罷)하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두어 조운(漕運)에 힘썼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로 함경도, 전라도 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왜구(倭寇)를 격퇴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명(明)나라에 여러차례 
사신으로 가 두 나라의 국교(國交)를 원활하게 하고 밀린 세공(歲貢)을 탕감(蕩減)
받았으며, 일본에 사절(使節)로 가서는 왜구의 침범을 금하게 하는 등 
여말(麗末)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고려왕조를 무터뜨리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선생은 고려사직(高麗社稷)을 지키려다 1392년(음) 4월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 하셨다. 
선생의 나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애국충절(愛國忠節)의 단심가(丹心歌)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산 교훈(敎訓)이 되고 있다.




포은 정몽주 신도비각(神道碑閣)
碑文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으며, 글씨는 현종때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전액(篆額)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건립연대는 조선 숙종 22년(1696)이다.
碑身 높이 236cm, 폭 89cm, 두께 39cm.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러운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고려에 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선생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낸 분이다. 우리나라가 본시 외딴 지역에 위치해 있다가 주 무왕(周武王) 
시대에 은(殷) 나라 태사(太師)가 와서 군장(君長)이 되어 팔조(八條)의 
교화(敎化)를 폈으니, 이는 반드시 그 시조인 순 임금 때 
사도(司徒 설(契))의 오교(五敎)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태사의 업적을 계승한 이가 없어 2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그 유택(遺澤)이 식어가고 그 말씀이 인멸되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오륜(五倫)의 가르침이 저하되어갈 형편이었다. 더욱이 호원(胡元) 
시대가 되어서는 온 천하에 성전(腥羶)이 충만하였고 우리나라도 
강상(綱常)이 더욱 퇴패되었으니, 이는 진정 난(亂)이 극도에 이르면 
다시 치(治)로 돌아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타환첩목이(妥歡帖睦爾 원 순제(元順帝)) 3년
(1337, 충숙왕 복위6) 12월 22일에 나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
25년(1392) 4월 4일에 별세했고,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 
문수산(文秀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의 묘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휘(諱)는 몽주(夢周), 자(字)는 달가(達可)이다. 
출생하기도 전에 이미 아름다운 조짐이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바로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초막(草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으니, 이것이 아무리 정례(正禮)는 
아니나, 상중(喪中)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부처에게 물건을 
바치고 중에게 음식을 먹이던 풍습을 점차 달라지게 하였다. 

의관 문물(衣冠文物)에는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여 제구(鞮屨)ㆍ
훼상(卉裳 풀로 짠 호인의 의상)의 누속(陋俗)을 고쳤으니, 중화
(中華)로써 이적(夷狄)을 변화시키는 조짐이 이미 여기에 나타났다. 

글을 강론하고 이치를 말하는 데는 주자(朱子)를 조종으로 하여 
횡설수설(橫說竪說)해 놓은 것이 모두 호씨(胡氏)의 설(說)과 
부합되었으니, 지리멸렬(支離滅裂)한 고주(古注)가 배우는 이를 
그르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이비(似而非)한 강서(江西)ㆍ영가
(永嘉)의 무리도 쓸모가 없게 되어, 마치 온 내[川]가 바다로 
돌아가고 여러 별[星]이 북극(北極)으로 향하듯 하였다. 

그리고 《가례(家禮)》를 따르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하는 예(禮)가 
시정되었고, 북로(北虜)를 거절하고 의주(義主)에게 돌아가 
《춘추(春秋)》의 법이 밝았으니, 그 굉대(宏大)한 체(體)와 용(用)이 
다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고 후세에 유전해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조의 모든 선비가 근본을 추구하고 의의를 풀이하여, 
그 도학 연원(道學淵源)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에 대해, 낙민(洛閩)에 
소급하고 은주(殷周)에 젖어드는 이가 다 선생을 조종으로 삼았으니, 
그 치도(治道)를 제재하고 나라를 보존하고 충(忠)을 다하고 인(仁)을 
이룬 것은 사실 선생의 여사(餘事)이다. 

본조 초기부터 점차 선생을 포상(褒尙)하여 오다가 중종조(中宗朝)에 
와서는 정암(靜菴) 등 제현(諸賢)이 배출되어 선생의 도학을 더욱 
천명하는가 하면, 드디어 문묘(文廟)에까지 배향시켰으니 그 보답에 
대한 전례가 지극하다. 그러나 만약 선생을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
안유(安裕) 등 제현(諸賢)과 동과(同科)로 친다면, 상론(尙論 고인
(古人)의 언행ㆍ인격 등을 논하는 것)하는 이들이 혹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우(辛禑)ㆍ신창(辛昌) 때 사관(史官)의 기사가 많이 빠졌기 
때문에 선생의 나아가고 물러선 의(義)에 대해 후세에 혹 의심하는 
이가 있지만 선생은 의(義)가 정밀하고 인(仁)이 성숙하여 정당한 
도(道)로써 주선(周旋)하였으니, 군자의 처사를 어찌 뭇사람이 
알 바이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선생에 대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마땅히 허물이 있는 중에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지론이다.

아, 선생은 위급한 나라에 마음을 다하다가 마침내 몸으로써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충(忠)이 훌륭하고, 상제(喪祭)의 예(禮)를 
실천하여 옛 풍습을 고쳤으니 그 효(孝)가 크다. 

그러나 예로부터 충ㆍ효에 독실한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선생의 충ㆍ효는 오히려 그 상대가 있는 셈이요, 호원(胡元)을 
배척하고 황명(皇明)에 귀의, 중화의 제도로써 호속(胡俗)을 
개혁시켜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어엿한 예의의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의 큰 공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춘추(春秋)》를 상고해 보면, 현(弦)ㆍ황(黃) 두 나라가 
멀리 형초(荊楚) 밖에 위치하여 중국만을 사모하고 초(楚)에 
의부하지 않다가 끝내 초에게 멸망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은 예가 
있었으니, 선생의 공로 또한 혼자만 훌륭할 수는 없는 셈이다.
 
오직 유자(儒者)의 학(學)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그 학을 하는 데 
반드시 주자를 조종으로 하여, 후세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모두 
경(敬)을 주장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배양하고 자신에 돌이켜 실제를 실천할 줄 알도록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성학의 요체이다. 
그 공로를 어느 누가 맞설 수 있겠는가.

또 주자 이후로 중국의 도학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양명
(陽明 왕수인(王守仁)ㆍ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의 무리가 황당ㆍ
괴벽한 설(說)을 내세워 온 천하를 전도시킴으로써 수사(洙泗 공자
(孔子)의 연원(淵源))ㆍ낙민(洛閩)의 종맥(宗脈)이 어두워져 
전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해독은 옛날 홍수(洪水)와 맹수
(猛獸)보다 더 심하였다. 

우리나라만은 그 선택이 정밀하고 수지(守持)가 전일하여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의혹이 없었으니, 이는 아무리 선생 이후 
현자(賢者)들의 공로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을 추심한다면 선생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전후 상론(尙論)하는 선비가 
누구나 선생을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조종으로 추존하고 있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공론이다. 옛날에 문중자
(文中子 수(隋) 나라 왕통(王通)의 사시(私諡))가 말하기를,
“부자(夫子 공자)를 통하여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마땅히 선생에게 이와 같이 고마워해야 한다. 

아, 이는 사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이 같은 철인(哲人)을 내어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계발, 끊긴 것이 이어지고 어두운 것이
밝아지게 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좌우될 바이겠는가.

선생은 연일인(延日人)이다. 
시조 습명(襲明)은 고려 때 명유(名儒)로서 벼슬이 추밀원 지주사
(樞密院知奏事)였고, 증조 인수(仁壽)와 조부 유(裕)와 아버지 
운관(云瓘)은 다 높은 관작(官爵)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서승(署丞) 약(約)의 딸이다.

선생의 두 아들은 종성(宗誠)ㆍ종본(宗本)이고, 
광묘(光廟 조선 세조(世祖)) 때에는 이름을 보(保)라 하는 이가 
육신(六臣)과 친하였는데,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평소에 늘 강개해하던 
그는 한명회(韓明澮)의 첩(妾)으로 있는 서매(庶妹)를 찾아가서 묻기를,
“공(公 한명회를 이름)은 어디에 갔느냐?” 하니, 
그 서매가, 옥사(獄事)를 처리하러 입궐했다고 하므로 그는,
“공은 반드시 만세(萬世)의 죄인이 되고야 말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입궐하여 상께 아뢰고, 
그를 친국(親鞫)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소에 늘 성삼문ㆍ박팽년(朴彭年)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여겨 왔으므로 진정 이 같은 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상이 
그를 환열(轘裂)시키도록 하므로 좌우에서 아뢰기를,
“그는 정모(鄭某)의 손자입니다.” 하자, 
상이 갑자기 감사(減死)를 명하면서,
“충신(忠臣)의 후예이다. 다만 영일(迎日)로 귀양 보내라.” 하였으니, 
그 기절(氣節)을 존숭해 주었다 하겠다.

그 뒤에 세대가 더욱 멀수록 후예가 더욱 부진하므로 아는 이들이 
의아해하다가 근세 이래로 점차 번창해졌다. 그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이로는, 우의정 유성(維城)과 판중추(判中樞) 응성(應聖)과 인평위
(寅平尉) 제현(齊賢)과 통제사(統制使) 부현(傅賢)과 동지(同知) 
척(倜)이고,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이는 으레 음직(蔭職)으로 채용되어 
왔는데 지금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찬광(纘光)은 
선생의 11대손이다. 고인(古人)의 말에,
“1천 명의 안목(眼目)을 틔워 준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한다.”
하였으니, 여기서도 선생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천지가 융화되어 / 堪輿磅礴. 한 이치 충만한데 / 一理充塞
풍기가 돌고 돌아 / 風氣周旋. 선후로 개척되므로 / 開有後先
옛날에 온 민중(閩中)이 / 昔者全閩. 만이의 풍속이었다가 / 一蠻夷區
주자가 나면서부터 / 洎紫陽生. 공맹의 풍속 되었네 / 爲魯爲鄒
우리 동방도 / 惟此東方. 본시 구이의 하나로 / 寔惟九夷
기자(箕子) 이후로는 / 父師之後. 팔교가 점차 침체되어 / 八敎漸微
고려의 풍속 또한 / 勝國謠俗. 퇴계를 숭상하였는데 / 猶是椎髻
우리 선생이 / 惟我先生, 그 말엽에 우뚝 나서 / 崛起其季
호걸스러운 재주와 / 豪傑之才, 순수한 기품으로 / 純粹之體
스승의 전수 없이 / 不由師承. 자연 도와 부합되어 / 默與道契
일신에 수양하니 / 修之於己. 그 행의 향리에 충만하고 / 行滿鄕里
나라에 활용하니 / 行之於國. 그 풍교 원근에 미쳤으며 / 風動遐邇
학궁(學宮)이 설치되고 / 庠序旣設. 의례(儀禮)가 완비되니 / 俎豆莘莘
선비는 시서를 외고 / 士誦詩書. 백성은 날로 진작되었네 / 民趨作新
당시에 온 천하가 / 當時天下. 호원에게 망했는데 / 陸沈胡虜
다만 고려가 중화의 도 지켰으니 / 維茲用夏. 
주의 예가 노에만 보존된 셈일세 / 周禮在魯
명을 높이고 원을 배격하여 / 義主攘夷. 
어둔 데를 버리고 밝은 데로 향하니 / 背陰向明
춘추의 대의가 / 春秋大義. 해와 별처럼 밝았다가 / 炳如日星
그 포부 다하지 못한 채 / 未盡底蘊. 천주가 갑자기 무너지고 / 天柱忽傾
몸은 이미 가셨으나 / 其身旣沒. 그 도 더욱 영원하여 / 其道益壽
마치 태산과 같고 / 若山有岱. 또 북두와 같았네 / 如北有斗
대저 선생의 도는 / 蓋先生道. 곧 주자의 연원으로 / 乃紫陽學
그 헌장 이어 서술하여 / 祖述憲章. 
실천에 옮기고 마음에 체득하였으며 / 躬行心得
사석(師席)에 있어서는 / 其在丈席. 백가의 설 제쳐 놓고 / 攘斥百家
횡설수설하여 / 橫說竪說. 다른 변동 없으므로 / 一此無他
선생의 그런 논설 / 第所論說. 듣는 이 의아하다가 / 聽者疑惑
호씨의 사서통 보고 나니 / 及得胡通. 모두가 다 부합되었는데 / 無不符合
거리와 세대 멀어 / 地遠世後. 마치 배가 항로 끊긴 것 같으나 / 若航斷港
선생의 득의 말한다면 / 因言得意. 엉긴 피 지금도 남아 있네 / 痕血摑捧
그 뒤 제현들의 / 爾後諸賢. 계승이 신장되었으니 / 承繼張皇
역대를 꼽아 보면 / 歷選前後. 그 공로 맞설 이 없어 / 其功莫當
마치 송의 주염계가 / 若宋濂翁. 처음 태극도설 창안하여 / 始建圖書
장자 정자를 거쳐 / 以授關洛. 주자에게 전수하듯 하였네 / 以傳閩甌
이는 전혀 하늘의 계시로 / 此殆天啓. 도의 근원 통할하였으니 / 統會宗元
모든 우리 후학은 / 凡我後學. 그 근원 길이 추구하소 / 永泝其源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포은의 생애와 자손에 대한 기록이 3개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연안이씨 비각공원
연안이씨의 시조 이무는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고종 때 중량장을
지낸 인물로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해 왔을때 부장으로 따라왔다가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아 신라에 귀화, 연안(延安)으로 사적되어 연안후에
봉해짐으로써 연안 이씨의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연안 이씨의 위상은 
조선시대 광산 김씨, 달성 서씨와 함께 3대 명문가이다.
조선실록 통계에 의하면 
대제학 전체 132명 중 8명, 청백리 전체 218명 중 7명,
문장가 전체 81명 중 5명, 재상 전체 373명 중 9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延城府院君樗軒文康公李先生(연성부원군저헌문강공이石亨선생)神道碑(신도비)
전액은 김상용이 썼으며, 비문은 4대손인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외6대손인 동양위 신익성이 썼다.

저헌 이석형
이석형은 본관은 연안, 자는 백옥, 호는 저헌이며 증조부는 사복시정
이광이고 할아버지는 임천부사 이종무이다. 아버지는 증좌의정 이회림이며,
어머니는 박언의 딸이다. 부인은 연일정시로 감찰 정보의 딸이다.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이며 아들은 증이조판서 이혼이다.


연안 이씨 비각공원 설립 취지와 저헌 석형 문강공 묘역 문화재 송시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가 
묘역 입구 우측에 있는 연안이씨 비각공원에서 
저헌 이석형의 묘와 신도비를 만나게 되었다.


연안이씨 비각공원의 중앙에 저헌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연일정씨의 선산으로 연안이씨의 저헌 이석형이 연일정씨 선산에 
들게 된 것은 이석형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정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으며 딸이 1445년 아들 혼(渾)을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중에 사망하게 
되었는데 딸이 친정에서 죽자 정보가 자신의 사후의 신후지지로 정해 놓은 곳에
딸의 묘를 쓰게 하였으며 후에 이석형이 죽자 정씨부인과 합장을 하게 되어 
연일정씨의 선산에 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석형은 필법이 신묘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최항 등과 더불어 당대 8대 문장가로 꼽혔다고 한다.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온유하고 즐거움을 좋아함을 '강(康)'이라 하였다.


 

















포은선생 永慕齋옆에 새로 관리사 宗約院를 신축중, 
마침 후손들이上樑齋를 올리는 장면을 만난다.

 





까마귀 사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포은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 이다.






언덕 위로 왼쪽에 정몽주의 묘, 오른쪽에 이석형의 묘가 
줄기를 달리하는 두 능선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려'라는 나라가 멸망한 뒤 '이성계'라는 사람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조정은 '고려'라는 이름을 남기고 사회변화를 주자는 의견과,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새 왕을 즉위시키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이름을 남기고 고려의 왕을 추대하고 사회변화를 주자고 
했고, 이방원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 새 왕을 추대하는 의견을 내세웠다.

'조선'의 1대 왕인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였을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고려의 대단한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술자리에 초대했다.

비록 이방원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정몽주였지만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니 그와 함께 새 나라를 이끌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들은 담소를 나누다가 정치이야기로 바뀌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방원이 먼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시조를 읊었다.
그것이 바로 이방원의 '하여가'이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에는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고려 왕조를 그만 포기하고, 
자신(이방원)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칡덩굴처럼 
얽히어져 함께 조선왕조를 세우자' 라는 뜻이다.
정몽주를 자신의 편에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고 나자, 정몽주는 자신도 시조를 하나 지어
보겠다고 한다. 이방원은 흔쾌히 승낙했고 정몽주는 시조를 읊었다.
이 시조가 정몽주의 '단심가'이다.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에는 '자신의 몸이 백 번이라도 죽는 한이 있고 
뼈가 사무치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라는 뜻이다. 이방원의 제의에 거절하는 내용이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크게 화가 났고, 
결국 정몽주가 돌아가고 난 후 조영규 등의 자객들을 시켜 
'선죽교'라는 다리에서 정몽주를 죽이게 된다. 
그 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아직까지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니,
고려 충신 정몽주의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호되게 야단을 
쳤다고 하니 이성계라도 정몽주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다음카페 '영암서예'에서




포은 정몽주 묘역이다. 포은은 조선개국의 걸림돌로 역적으로 처단됐지만
9년만에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난다.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했다.
묘역은 상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과 곡담과 둘레돌이 있다.




묘표는 조선 중종 12년, 1517년에 태학들이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웠다.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망주석(望柱石) 
봉분 좌우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그 기능에 대해서는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육신을 찾을 때 멀리서 봉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표지의 기능을 한다는 설이 있다.
혼이 나가고 들어 오는 의미로 다람쥐(?)를 아래로 위로 조각했다. 




뒤쪽으로 포은 장손자 정보의 묘가 보인다.


포은 정몽주 묘에서 내려다 본 풍경




설곡공 정보의 묘이다.
설곡공은 포은의 장손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성삼문, 박팽년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세조 2년, 1456년 사육신이
일어나자 무죄를 주장하여 세조에게 처형의 명이 내려졌으나, 정몽주의
손자임이 밝혀져 사형에서 감형하여 영일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산청군 
단성으로 유배지가 옮겨 지내던 중 단종이 승하하자 복상 3년하고
단성 적소에서 작고하였다. 1731년 영월 8현사, 1791년 용인 충렬서원, 
진주 옥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982년 9월에는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승무 배향하였다. 포은의 묘 우측에 정경부인 밀양 박씨와 합장묘이다.




저헌 이석형과 부인 영일 정씨의 합장묘이다.
묘역에는 묘비와  문인석과 향로석, 상석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묘비명, 문강공 이석형 지묘 정경부인 영일 정씨 지묘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포은 정몽주 묘소 





충렬서원으로 이동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1

충렬서원은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배향(配享)하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9년(1576) 이계(李啓).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와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이 서원을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웠으며 서원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회진(灰塵)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정구(李廷龜)가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현감 정종선(鄭從善), 이시윤(李時尹) 등과 
함께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중건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사우 3칸, 동서재 각 2칸, 문루(門樓) 3칸을 지었다.문루 윗층은 
강당이며, 아래는 문주방(門廚房)과 고사(庫舍) 등을 갖추었다. 
이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겨 배향하였다.

중창과 함께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설곡(雪谷) 정보(鄭保)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숙종 32년(1706)에 다시 
후손 정제두(鄭濟斗).정찬조(鄭纘祖)를 비롯한 여러 유림의 공의로
옛터 서쪽 가까운 곳에 이건하였다.

그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칸의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 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화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충렬서원은 일정한 중심 
축이 없어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사당이 동시에 보인다.

한때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陶菴李縡) 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나, 그 이후 교육공간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1997년 유림의 결의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3학사(三學士)의 
한 분으로 추숭되고 있는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충렬서원의 강당(忠烈書院 講堂)



 
















포은 선생 丹心歌(단심가)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번 고쳐 죽어
白骨 爲塵土(백골 위진토)- 백골이 진토되어
魂魄 有也無(혼백 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也歟(영유개리야여)-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경상북도 영일과 영천) 중 
한곳인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
(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
(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출처:위키백과

이것으로 경기 용인여행기(1) - 모현 포은 정몽주묘소와 충렬서원을 마치며 
이어서 2편으로 처인 처인성지, 와우정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찬란한 빛/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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