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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행주산성과 그 주변 역사적인 이야기에 취한 오후 반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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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185회 작성일 20-03-0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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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행주산성역사공원에서 만난 '겸재 정선의「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이 그림은 아름다운 행주 별서 지대 아래에서 어부들의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1741년 어느 맑은 초여름 겸재는 소악루에 올랐다. 
멀리 덕양산 자락 행주나루에 웅어 잡이가 한창이었다. 

▲웅어

우측에 북악산, 삼각산, 견달산을, 좌측에는 고봉산을 앉혔다. 
멀리 파주 교하의 심학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처리했다. 
한강 중간 중간에 모래섬들도 그려넣었다. 
2,3명이 탄 14척의 돛대 없는 웅어잡이 배를 그렸고 
한강 넘어 행주나루엔 초가집, 기와집, 산위에는 정자도 앉혔다. 
소나무, 기암절벽, 버드나무, 행주산성, 덕양산 기슭도 배치해놓았다. 
고양땅의 산수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상세한 해설은 맨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양시 행주산성과 그 주변도 둘러본 날 

2020.3.5.목
행주산성▶행주서원▶역사공원▶행주성당

둘이서

홈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1시 출발, 반나절 나들이를 즐겼다.
'코로나19' 전염으로 홈에만 웅크리고 있을 수 없어 홈에서 자차로 30분거리인
행주산성으로 나들이 다녀왔다. 늘 그 아래 행주산성역사공원 산책만 하다
몇년만에 행주산성으로 올랐다. 오름길이라 좀 버거워 제끼곤 했는데
모처럼 시원한 풍경과 함께 오르막 산책을 잘 하고 왔다.
주중인데도 대체로 안전지역이라 우리처럼 생각되었나 보다.
많이들 바람쐬려 나와 주차장엔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시관등 실내는 휴관으로 관람불가였고, 야외만 공개되어선지 
입장료는 무료, 주차비는 2천냥이었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둘러보는 입장객들 모습에서 새봄의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스크는 낀 사람도 있고 안 낀 사람도 있었다.
토성까지 한 바퀴 둘러보고 아래 음식촌에 위치한 행주서원은 첫 방문으로
둘러보고 그리곤 행주산성역사공원에 들려 한강물을 바라보며 산책을 즐긴 뒤
마지막으로 행주천주교에 들려 촛불봉양도 올린 후 홈으로 돌아오니
오후 5시30분 이었다.
그 날의 동선을 사진으로 남기니 쭈욱 한번 둘러보세요.




















충장공 권율 도원수상(忠莊公 權慄 都元帥像)

중종 32년(1537)생, 자 언신(彦愼),호 만취당(晩翠堂), 본관 안동, 영상(領相) 
권철의 아들. 46세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 예조 정랑등을 거쳐
의주목사로 있을 때 임란이 일어나자 특별 천거로 광주목사를 맡아 남하 하였다.
충청.전라.경상 삼도대군의 용인 적영공격에 참가 북진하려고 하였으나 패전으로
끝나자, 돌아가 민병을 소모, 이치(梨峙)로 나아가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들려는
왜병을 꺾어 전라도를 임란 회복의 근기로 확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7월 나주목사, 전라도 순찰사로 승임되어 9월에 군을 다시 이끌고 북상 수원 
독산산성에 진치고 적후방을 견제교란하였다. 익년 2월에는 평양성 수복 후
남아하는 조명 연합군과 호응 고군을 이끌고 바로 이 행주산성에 진주하여
밀려 오는 적을 격전선투로 대파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적이
서울에서 물러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며 공으로 도원수에 승임되었다(6월).

정유재란에는 명군과 연합, 특히 울산, 순천 등지에서 적을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임란 때와 같이 명군의 강화강행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조 32년(1599)에
별세하였으며(63세, 선무 일등공신 충장공) 뛰어난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길이
추앙받고 있다.

행주대첩의 개요(幸州大捷 槪要)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26년)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서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서울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뜰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승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 군은 권률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 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산성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관군
권율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였을 때에 큰 북을 세번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률장군은 큰 칼을 뽑고 진두 
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의병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자원한 민간인으로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률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훨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승군
승군은 승려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왔다.
이때에 권율장군이 진두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여성
우리 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져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하여 그 후 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조선 최초의 여성의병장, 행주치마와 노적봉의 전설










행주대첩비로 오르는 중에 사진전시장을 만나 아름다운 사진 몇점 옮겨 놓는다.














세 갈래길에서 우측 충장사는 진입급지, 좌측은 토성입구로
우린 곧장 가운데 오름길로 직진해서 행주대첩비로 오른다.


여늬때 같으면 주중엔 한적할텐데 
오늘은 홈에서 신종코로나에 갇히지 않고 여러분들이 산책을 나와 
같이들 발 맞추니 삼박자 경쾌한 봄의 왈츠가 발걸음에도 실리듯 한다.


대첩기념관으로 가는 길


대첩기념관. 휴관이다.


잔나무가지 사이로 붉은빛 방화대교가 시야에 든다.




방화대교
강서 방화동과 고양시 덕양 강매동을 잇는 방화대교 2,559m, 
한강을 넘는 교량 중 제일 길다는데 
인천 국제공항고속도로의 빠른 진출입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한다. 
중앙부 540m의 아치트러스(arch truss)교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미관이 뛰어나서 남쪽의 개화산과 북쪽의 행주산성 등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행주대첩비로 오르는 중, 덕양정 아래 위치한 진강전으로 내려가 본다.














좌측으로 덕양정 지붕이 보인다.






행주대첩비는 100m 돌계단으로 오른다.




















































하산은 토성으로..




























3월 새 봄이 에고~ 홍매화꽃 몽우리로 피고 있구나!












행주기씨(幸州奇氏)는 
행주와 덕양산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 왔으며,
일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공녀에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숲 속 산새들을 위한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고맙다.










행주산성을 나와서


행주서원으로


















100년의 전통과 순교자의 땀이 배여있는 행주성당
로마 교황청 지정 성모순례지이다.
















로마 교황청 지정
성모순례지 행주성당


마지막 일정으로 행주산성역사공원에서 
















갈등과 분단이 남긴 아픈 상처
이념 갈등과 민족 분단의 아픔, 그리고 슬픈 자화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강하구 둔 철책선


평화가 시작되는 곳~~
2012년 이곳은 평화와 화합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한강하구에서 처음으로 군 철책선이 철거되었습니다.


▲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한강변에 높이 76m 정도의 궁산이 있다. 
원래 이 산정에는 중국 동정호의 이름을 딴 악양루가 있었으나 소실되었고 
1737년 풍류 문사였던 이유가 거기에 소악루(小岳樓)를 세웠다. 
경치가 동정호 악양루에 버금가는 누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소악루도 소실, 1994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궁산은 그 옛날 선비들이 한강 뱃놀이로 풍류를 즐겼던, 서쪽의 개화산, 
오른쪽의 탑산, 쥐산 등과 함께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가서 양천현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하지 말라고까지 할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또한 조선의 도성을 방비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때에도 
군부대가 주둔하였던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양천 현령에 제수된 것은 
영조 16년(1740년) 겨울 그의 나이 65세였다. 정선은 궁산의 소악루에 자주 올랐다. 
궁산은 한강변의 절승을 조망하고 사생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여기에서 
「소악후월」,「목멱조돈」,「행호관어도」,「안현석봉」등 
한강변의 아름다운 진수산경들을 낳았다. 

「행호관어도」는 정선의 33점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하나이다. 
경교 명승첩은 겸재 정선이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에 의해 양수리 근교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풍경을 그린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첩이다.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으며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하첩은 이보다 10여 년 뒤에 그린 그림들이다.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행주 앞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春晩河腹羹, 夏初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湖外.

「행호관어도」의 이병연의 제시이다. 고양사람들은 한강을 행호라고 불렀다. 
한강물이 행주산성의 덕양산 앞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져 강이 마치 
호수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덕양산 자락에는 경치가 좋아 서울 세도가들의 별서들이 즐비했다. 
또한 행호(杏湖)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행주 별서 지대 아래에서 어부들의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음력 4월 말이면 행주나루는 온통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다. 
이병연의 시가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1741년 어느 맑은 초여름 겸재는 소악루에 올랐다. 
멀리 덕양산 자락 행주나루에 웅어 잡이가 한창이었다. 

우측에 북악산, 삼각산, 견달산을, 좌측에는 고봉산을 앉혔다. 
멀리 파주 교하의 심학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처리했다. 
한강 중간 중간에 모래섬들도 그려넣었다. 
2,3명이 탄 14척의 돛대 없는 웅어잡이 배를 그렸고 
한강 넘어 행주나루엔 초가집, 기와집, 산위에는 정자도 앉혔다. 
소나무, 기암절벽, 버드나무, 행주산성, 덕양산 기슭도 배치해놓았다. 
고양땅의 산수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행어관어도는 이병연의 제시와 함게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웅어는 고양지역의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물고기였다.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두어 왕가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 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 ‘웅에’라도도 부른다.

이제는 초여름 행주나루를 가득 메웠던, 지난날의 웅어잡이 고깃배들은 사라졌다. 
행호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던 겸재의 그림만이 남아 
옛 한강의 웅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고양시는 덕양구 행주외동 한강변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300여년 전의 행주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으로「행호관어도」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예술은 지난날의 향수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 않았는가. 
- 월간서예,2017.4,123-125 쪽.


사진 글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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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동진님의 댓글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의 홈에는 사진과 함께 기행문 식으로 작성하였는데 문장으로만 올려 죄송합니다.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은 저의 집안 어른이심................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과 임진왜란의 행주산성(幸州山城)  (2010년 7월15일 작성)
                           

            작지만 가파른 산 오르러면 숨이 헐덕 거리네
            구비치며 휘감은 저 한강물은 피빛이었으리
            벌떼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큰 무리의 왜놈들
            죽이고 죽여 버려도 또또 달려드는 끈질긴 원수
            구국일심에 처자 고향두고 달려와 싸운 의병들
            아낙들도 치마폭 돌나르다 얼마나 쓰러졌던고
            권율 장군휘하 관군들 용맹히 싸우고 싸웠으리
            그러나 의병들 승병들 아낙들 있어 승리였다네 
                                                              -함동진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의 덕양산(해발124.9m)에 소재하며
사적 제56호로 1963년1월21일 지정되었다.
 면적 347,670㎡.로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룩한 곳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장군은
12월 수원근처(현재의 경부선 1호선전철역 세마역 근처)인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하였다.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 관군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들과 아낙네들의 피흘린 참전이 있기에
승전과 대첩은 더욱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에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및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병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벌떼같이 공격해왔다.
권율 장군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덕양산 정상에 있다.
1970년에는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두고 있다.
충장사는 덕양산 북향 기슭에 있다.


<필자 함동진의 희망사항>

국난 위기의 임진왜란 7년전쟁, 여기에서는 관군뿐만 아니라 의병 여성의병 기타 민간인들이
많이 전사, 순국희생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떨치는 장수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장졸들이 없다면
전쟁의 승리는 없을 것이다.
행주산성의 성역화는 임진왜란전투에 대하여 한국의  대표적 사적지로 조성한 곳이다.
현대판으로 비교한다면,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국립현충원에 비견되는 곳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고관 비천이 따로 없다.
행주산성의 사당은 오직 권율 장군만을 위한 사당이었다.
일반장병 의병 여성군들의 희생을 위령할 사당같은 것은 없었다.
정부나 지자체의 역사고증, 역사문화관리 등의 담당기관은 이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타지역의 옛 장군들의 사당이 있는 곳도 위와 같은 현상들이다.   

행주대첩비(조선2014.03.04)[1]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고자 1963년에 건립한 비. 덕양산(경기도 고양시)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문화재청

[여성과 행주치마와 돌전투]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관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각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아냈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돌을 던지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녀자들의 호국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으니
이의 승리로 인하여 "행주치마"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각궁>

우리나라 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물소뿔, 뽕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활로
탄력성이 매우 강한 것이다. 사정거리가 약 200보에 달했다. 
 
[승군의 참전]

승려의 신분으로 행주전투에 참전한 승군들이다.
승장 처영(僧將 處英)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
왜군들은 조총을 쏘아대며  성 역할을 하는 목책에 불을 질러 침탈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에  승장 처영이 승군을 독전하자 승군들은 육박전으로 용감히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의병대의 참전]

의병들은 왜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관군을 지원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전투에서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을 따라 온  전라도 의병이 다수였다.
의병대는 관군에 비하여 훈련이 덜 되고 무장상태가 허술하였지만
 구국충정심은 끓어 올라 그 사기는 충천하였다.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왜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로 껐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왜적들을 치고 찍고 짓이겼다.

필자는 행주산성을 보수보완 공원화 조성할 때에 지방사학자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크게 나타내게 해줄 것을 문의하고
부탁하였으나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상 여자들과 의병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대첩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전황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직계 조상 중에는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투하다 전사한 분이 계신다.
바로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공이다.
그러나 행주산성 어디에도 단 한 줄의 의병장 수정 함덕립공에 대한 기록물이 없다. 

[수정 함덕립의 의병모군(義兵募軍)]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1
1. 통문(通文)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도적놈들이 서울을 핍박하여 대가(大駕)가 외로운 성으로 옮겨가시고 적병이 포위를 하여
도로가 막히고, 호령이 통하지 아니하니 존하느냐 망하느냐의 기회가 순식간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장이 타는 듯 합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니 무릇 혈기를 지니고 있는 자는
마땅히 몸을 잊고 국난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호남은 본시 충의의 고장으로서 전에도 의열(義烈)이 이미 드러났거든 하물며 이렇게 군부(君父)가
포위속에 계실때이겠습니까?
이제 통유(通諭)하시는 교서가 포위된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한 말씀으로 써 도내의
사민(士民)에게 바라시는 바가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읽고보니 실성통곡이 저절로 나와 죽지를 못하여 한입니다.
원컨대 모든 군자들은 각자 분발을 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糾合)하고
군량(軍糧)들을 도와주며 기일에 맞추어 의소(義所)로 모여 한마음으로 적을 섬멸할 것을 다짐합시다.
만약 망서리고 관망을 하거나 무관심한다면 이는 전일 충렬의 기풍이 땅에 쓸린 셈만 된 것이 아니라
 장차 윤기(倫紀)에도 죄를 얻어 고을이나 나라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마음을 합하고 힘을 뭉쳐 함께 나라의 일을 성사시켜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고함
                  호남절의용사각위(湖南節義勇士各位)의 좌하(座下)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通文

國運不幸奴賊逼京大駕移駐孤城賊兵合圍道路阻絶號令
국운불행노적핍경대가이주고성적병합위도로조절호령

不通存亡之機決於呼吸言念及此五內如焚主辱臣死古今
불통존망지기결어호흡언념급차오내여분주욕신사고금

通誼在有血氣者當忘身赴難而唯我湖南素稱忠義之邦曾
통의재유혈기자당망신부난이유아호남소칭충의지방증

在前世義烈已著況此君父在圍之日乎卽者通諭敎書自圍
재전세의열이저황차군부재위지일호즉자통유교서자위

中出來無非哀痛之語其責望於道內士민至深切矣讀來不
중출래무비애통지어기책망어도내사민지심절의독래불

各失聲痛哭求死而不得也惟願君子各自奮勵投메*而起糾
각실성통곡구사이부득야유원군자각자분려투메*이기규

合同志資助兵糧剋期齊會于義所期以一心殲敵如或遲回
합동지자조병량극기제회우의소기이일심섬적여혹지회

觀望越視察廢則非但前日忠烈之風掃地盡矣將得罪於倫
관망월시찰폐즉비단전일충열지풍소지진의장득죄어윤

紀不容鄕國毋淹(?)刻協心一力共濟國事千萬幸甚
기불용향국무엄(?)각협심일력공제국사천만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位 座下

*메:소매메
*(?):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대첩비각 안에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1.88m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선조 35년(1602)에 권율장군 막하에 있던 장수들이 권율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힌 것이다. 이 비문에는 행주대첩 전투과정을 상세히 새겨 넣고 있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2

2. 거의문(擧義文 : 의병을 일으키는글)

  위 글월로 거의를 고하는 바는 이제 왜적이 창궐하여 우리 강토를 유린하는 데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미 국토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 또 혈기가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울음으로 적을 죽일 생각만 하고 머리를 들고 곧바로 전진할 생각을 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 도내의 장사(將士)들이 갑옷 투구를 쓰고 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 사자(士子)가 된 사람들도

    마땅히 팔둑을 걷어부치고 눈물을 뿌리고 맹세를 하며 화살을 질머질 때입니다.
본래 우리 고을은 충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곳이니 어찌 적개심에 불타고 적을 둘러삼킬

  마음을 가진자가 없겠습니까?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나서며 팔을 걷어 올리고 부르고 모여 비록 나무의 무기 대나무 깃대로 라도

  모여들어서 왕의 군사가 되고 당나라 안지경(顔眞卿: 安祿山亂時의 義兵將) 같은 행차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은 이 통문을 가지고 돌려 온 고을에 고하고

  시각을 지체하지 말도록 해주시기 천만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일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호남 절의소 용사 여러분의 좌하에 고합니다.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擧義文

右文爲擧義事今者倭賊猖獗躪蹂我疆場而한*禦無一人旣
우문위거의사금자왜적창궐린유아강장이한*어무일인기

食國土且有血氣則 安敢生哭殺之而不效載頭直前之策一
식국토차유혈기즉안감생곡살지이불효재두직전지책일

道將士관*甲胄以赴賊所則爲士子者亦當奮臂(?)제*誓面帶
도장사관*갑주이부적소즉위사자자역당분비(?)제*서면대

箭之日也顧我一州素稱忠義之鄕豈無懷敵愾之憤而欲胸
전지일야고아일주소칭충의지향개무회적개지분이욕흉

呑之者哉裂裳左袒一呼偕作雖木兵竿旗響集분*合爲王師
탄지자재열상좌단일호해작수목병간기향집분*합위왕사

顔行不其可乎伏願僉尊將此通文輪告一鄕毋滯時刻幸甚
안행불기가호복원첨존장차통문륜고일향무체시각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僉尊 座下

*한:호위할한
*관:꽬관
*(?):
*제:물제
*분:아우를분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수정 함덕립공 행장(水亭 咸德立公 行狀)]
    공의 휘(諱)는 덕립(德立)이요, 자(字)는 사인(士仁)이요, 호(號)는 수정(水亭)이며 강능함씨(江陵咸氏)이다.
.................................

      강릉함씨는 라조(羅朝)로 부터 려조(麗朝)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동방(東方)에서
 바라볼 만한 부족이 되었다. 
  휘 승경(承慶)은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쳐 벼슬이 이름 미쳤고,
그의 아들은 조선시대(我朝)에 와서 증직영상(贈職領相)이 된 이로 휘는 부림(傅霖)이요,
호는 난계(蘭溪)로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워,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평공(定平公)으로
만경두곡서원(萬頃杜谷書院)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정평공 때부터 이후로 동원(東原) 즉 강능(江陵)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림 아들의 휘는 우치(禹治)요, 호는 송담(松潭)으로 성종 임금때(成宗朝)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예조판서(禮曺判書)에 이르고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라 했다.
    우치의 아들은 휘는 영훈(永勳)이요,  호는 만포(晩圃)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판서(工曺判書)에
올랐으니 곧 수정공의 5대조가 되신다.   
    수정공의 고조부위 휘는 이정(以正)이시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증조부의 휘는 록(錄)이시며, 형조참의(刑曺參議)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귀정(貴珽)이시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아버지 휘는 순진(順振)이시며 명천부사(明川府使)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鄭氏)로 참판 효항(參判孝恒)의 따님이시다.
    공의 출생일은 1554년(嘉靖甲寅 明宗9年) 9월15일이다.
    공의 본디 성품은 부모께 효성스러웁고 동기간에 우애했으며 아울러 그 자태와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봉양하므로 향리(鄕里)의 이웃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인격의 도량과 재간이 우뚝 들려 보였고 품은 뜻을  이루려는 의기와 의지가 강했다.
    불설(不屑 : 우습게 여겨 뜻에두지 아니힘)하지 아니하여 사장(詞章 : 詩歌와 文章)을 공부하고
궁마(弓馬)의 무예를 정밀하게 익혀 본바탕을 크게 이루었으며 경제에 대하여서도 깊이 알았다.
    1576년(萬歷 丙子 선조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시초점에 벼슬하여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해미 신남도리(海美新南桃李)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강논한 사실이 가승과
성조충훈(聖朝忠勳)에 사적(事蹟)이 실려있다.
    하루는 그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조 양경공(良敬公)이 보성군수를 지내면서 군민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말씀을 노래한지라, 마땅히 후손들이 살 곳이다 하였다.
    양경공의 휘는 유일(有一)이니 정평공(定平公)의 8대조가 되신다.
    드디어 수정공(水亭公)이 이곳을 헤아려 돌아보고 보성군 천봉산(天鳳山) 아래 죽천(竹川) 마을에 옮겨 사시니
이곳은 죽천 박선생(竹川 朴光前先生. 別註<2>참조)이 사신 곳이며 우산 안선생(우산 안방준선생. 別註<1>참조)이
자주 놀러 온 곳이다.
    겸하여 우물과 돌이 있어 좋은 곳이라 하여 공(公)이 시냇물 언덕 위에다 정자나무를 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한 곳이다.    그때 사람들은 주부정(主簿亭)이라 했고 후손들은 함정자(咸亭子)라 칭하고 있다.
    임진(壬辰 1592년) 난리에 公이 세상이 변해진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분개(憤慨)를 참지 못하고
의병(義兵)을 이르켜 삼운장 오봉 김충강(三運將 鰲峰 金忠剛 :齊閔  別註<4>참조)公과 같이
(호남의설청湖南義設廳에서) 꾀하니 여러 고을에서 무기와 식량을 가지고 옴으로 군사를 조직하여
도원수 권公(都元帥 權慄)에게 급히 달려가 신발과 식량을 도와주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가 울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서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장차가 위태로우니 전장터에 나아가 그 훌륭한 동포들과
생사(生死)를 같이 한다."고 말하며 분을 내어 적을 죽이고, 사로잡기를 많이 하니
권공이(權慄장군) 말하기를 "함씨(咸氏) 군사는 정돈이 잘 되고, 무기를 정밀히 하여
일대영걸(一代英傑)을 이루었다." 하였으며 그리고 군사를 맡아(이끌고) 자주 공을 세웠고,
성(城)이 함락하던 날에 미치어서는 적의 총탄에 맞아 순절(殉節)하시니 모든 의병들이 같이 따라 순절하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1593년(癸巳 선조26년) 10월 16일이다.
    그의 아들 복시(復矢)가 (시신을)모시고 돌아가서 보성 대곡면 빗말 고개 둔덕 깁좌(寶城 大谷面 碑末峴 甲坐原)에
 장사 지냈다.
    선조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갸륵한 전사소식을 듣고 명하여 선무원종훈록(宣武原從勳錄)에 기록케 하니
사림(士林=儒림)들이 흠모하였고 아울러 보성읍지(寶城邑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에도 기록 되었다.
    수정공의 아내는 정숙부인(貞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참봉 이방(參奉以邦)의 따님으로 1555년
(乙卯 明宗10년)에 출생하여 1597년(丁酉 선조30년) 11월8일 별세하여 수정공의 묘와 함께 합장하였다.
    수정공의 아들 봉신(奉臣)으로 벼슬이 통정(通政)이요, 손자는 의방(義邦), 의용(義容), 의형(義亨),
의운(義運)이며 증손, 현손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가지고 온 병수(炳壽)는 의형(義亨)의 6대 손이다.
    슬프다. 훼복제서(卉服제*서* : 오랑캐가 누더기를 걸치고 미친 개가 물어 뜯듯이)의 기세(氣勢)와
 치장열진(치*張列陣 : 마치 솔개떼처럼

찬란한빛e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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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함동진


6월은 밤꽃의 계절이다.
밤나무는 시골 어디를 가나 산언저리 동네주위 개천이나 강가에 많이 심겨져있다.
유실수로서 지방 곳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6월이면 절정인 밤꽃의 자욱함은
안개가 서린 듯 장관이다. 구수하다고나할까?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이 코끝을 간지르는 계절은 고향을 생각케 하는 특유의
냄새이다. 어떤 이들은 밤꽃의 향을 남성이 발정하는 냄새라고도 한다.
남성이 발정을 한다함은 생식을 위한 단계가 아닌가. 생식은 곧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기에 밤꽃의 향기는 맡을수록 향수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고향, 순천 외서의 선산인 넓다란 안산에는 밤나무 단지가 무성하다.
너무나 넓은 밤나무단지인지라 해충방제를 할라치면 살충제를 헬리콥터로
공중살포 하여야한다. 농촌계몽가이신 나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우량종 또는 개량종의 밤나무를 손수 접목번식하여 단지를 일구어 왔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이후 숙부께서 이어받아 경영하신다.
밤은 영양가가 높은 열매로 산골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이며
농촌에는 농가소득의 효자수(孝子樹)가 된다.
 
6월, 밤꽃의 계절이 오면
고향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조부님 생각이 간절하다.
항상 객지에 머물러 살던 나는 8.15 해방 무렵과  6.25전쟁 피란 중
약 2~3년 정도(4~7세 때 잠간씩과 11세 때) 짧은 기간이나마
조부님 슬하에 머문 적이 있다.
조부님은 나를 장손이라고 많은 관심으로 엄하게 훈육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조부님 댁에는 사랑채와 칙간채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달아놓았는데,
대문 안쪽의 칙간은 가족용이고, 대문 밖쪽의 칙간은 손님이나 길손들의 용도였다.

1950년 겨울 어느 날 대문 밖쪽의 칙간문 기둥모서리에 기대어 개머리판 닮은
밤나무토막을 들고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더니
마침 용변을 보시던 조부님께서 청천벽력의 고함과 함께 그만두라고 외치시더니
집 울타리의 낭창한 개나리 가지를 손주 손으로 직접 꺾어가지고
사랑방으로 당장 오라고 호통치셨다.

여느 때에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잘못된 행실의 벌칙인 종아리 걷어올리고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 맞기 벌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엄살도 없이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않으니 매맞기 시간이 길어졌다.
종아리는 뱀이 휘어 감듯 피멍줄기가 수없이 많은 가닥으로 얽혀 있었다.
 
조부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의병에 가담하시어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왜병들을 사살하였고, 수많은 의병들 역시 왜병들의 총칼에 의해
전사 희생되는 것을 보셨기에, 총으로 사람 죽이는 짓은
인간으로서 참아 못할 행위임에 치를 떠시는 것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기에 총 쏘는 흉내가
가없이 가슴 떨리는 죄악으로 보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송암 함봉표)께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6.25 전쟁 중에
아래의 시를 남기셨다.

존폐와 합분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의 길흉을 어찌 알리요.
산간 폐옥은 밥지은 연기 끊어지고
야외의 벽촌에 사람, 개도 드물다.
남을 해친 너희 무리 빨리 가거라.
백성 건질 우리 님 언제 오려나
동서(우익과 좌익)에서 공작하느라 쉬는 땅이 없으니
언제나 벼개 높이고 편한 잠을 자리요.

[ 世感 ]
存廢合分各有時  존폐합분각유시
到頭吉凶豈人知  도두길흉기인지
山間廢屋炊烟絶  산간폐옥취연절
野外僻村人犬稀  야외벽촌인견희
害物爾徒去亦速  해물이도거역속
濟民我后來何遲  제민아후래하지
東西工作無休地  동서공작무휴지
何日安眠高枕支  하일안면고침지
(松庵 咸鳳表의 시 世感<이 세상은 -6.25를 겪으며> 전문)

그렇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산간벽촌까지 인적이 끊일 정도로 인명이 살상된
6.25 전쟁은 참으로 끔직하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케 하는 밤꽃의 계절 6월에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기념일」이 있다.
이 두 기념일이
인간의 목숨이 희생된 것과 관련된 기념일이기에
그 날이 오면 심정이 더욱 숙연해진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조부님의 산소와 밤나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조부님을 회상한다.
가을이면 사촌이 형님 맛보라고 햇밤 한 박스를 택배로 부쳐온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내가 태어난 흙에서 난 밤이
제일 맛있다고 고향 자랑을 한다.

선영에 올라
할배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더디게 찾아 뵙는 참회의 묵념을 드린다.
네 살 적 할배 수염 끄들어 잡으면
네 이놈! 하시곤
머리 쓰다듬던 할배.
 
저만치 밤나무 한 그루
할배의 혼이 배었나
엣다, 또 끄들어 보아라
밤꽃은 할배의 수염이 되어
머리 위서 하늘거린다.
(1994. 10. 1. 작  졸시 <밤꽃> 전문)

다시 밤꽃의 계절 6월이 왔다.
6월은 밤꽃으로 고향을 생각케도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순국영령들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6.25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계절이기도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지붕 위로 굉음을 지르고 지나가는 비행기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생사를 건 6.25 전쟁 피난 중 폭격기의 공습에 놀란 가슴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벗어 나와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목숨은 거저 얻어 지니고 있는 목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북교류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이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밤꽃의 계절에 고향과 조부를 생각하며,
개나리회초리의 엄하신 훈육의 덕으로
사람됨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2001. 6. 6.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http://www.poet.or.kr/hdj

함동진시인님, 놀래셨지요?
이 글을 제 뜰에 두고 싶어 모셔왔습니다.

위 상세한 게시물에 감사드리며 이곳에 일부 다시 옮깁니다.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은 저의 집안 어른이심 

공의 본디 성품은 부모께 효성스러웁고 동기간에 우애했으며
아울러 그 자태와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봉양하므로 향리(鄕里)의 이웃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인격의 도량과 재간이 우뚝 들려 보였고 품은 뜻을  이루려는 의기와 의지가 강했다.

필자의 직계 조상 중에는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투하다 전사한 분이 계신다.
바로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공이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관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각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아냈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돌을 던지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녀자들의 호국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으니
이의 승리로 인하여 "행주치마"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http://blog.daum.net/hamdongjin/15068507

두서없이 답글을 올리며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박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함동진"詩人님! & "찬란한빛*作家님!!
"함동진"詩人님께서,擔아주신~"水亭함덕립公과 壬辰倭亂의 幸州山城"유래..
 久久切切히 擔아주신,長文의 글句를 吟味하면서~先祖들의 忠節에,感泣합니다..
"찬란한빛"任께서 擔아주신,"함동진"詩人님의 글句를 吟味하고~"함"家門의,家風을..
"함동진"詩人님!&"찬란한빛"作家님!長文의 感動글에,感謝오며..늘,"健康+幸福"하세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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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러러뵙지 않을 수 없네요.
게시물을 귀히 여기심에 감사드립니다.
안박사님, 신종코로나 조심하시고 내도록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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