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행주산성과 그 주변 역사적인 이야기에 취한 오후 반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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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동진님의 댓글

저의 홈에는 사진과 함께 기행문 식으로 작성하였는데 문장으로만 올려 죄송합니다.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은 저의 집안 어른이심................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과 임진왜란의 행주산성(幸州山城) (2010년 7월15일 작성)
작지만 가파른 산 오르러면 숨이 헐덕 거리네
구비치며 휘감은 저 한강물은 피빛이었으리
벌떼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큰 무리의 왜놈들
죽이고 죽여 버려도 또또 달려드는 끈질긴 원수
구국일심에 처자 고향두고 달려와 싸운 의병들
아낙들도 치마폭 돌나르다 얼마나 쓰러졌던고
권율 장군휘하 관군들 용맹히 싸우고 싸웠으리
그러나 의병들 승병들 아낙들 있어 승리였다네
-함동진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의 덕양산(해발124.9m)에 소재하며
사적 제56호로 1963년1월21일 지정되었다.
면적 347,670㎡.로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룩한 곳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장군은
12월 수원근처(현재의 경부선 1호선전철역 세마역 근처)인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하였다.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 관군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들과 아낙네들의 피흘린 참전이 있기에
승전과 대첩은 더욱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에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및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병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벌떼같이 공격해왔다.
권율 장군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덕양산 정상에 있다.
1970년에는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두고 있다.
충장사는 덕양산 북향 기슭에 있다.
<필자 함동진의 희망사항>
국난 위기의 임진왜란 7년전쟁, 여기에서는 관군뿐만 아니라 의병 여성의병 기타 민간인들이
많이 전사, 순국희생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떨치는 장수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장졸들이 없다면
전쟁의 승리는 없을 것이다.
행주산성의 성역화는 임진왜란전투에 대하여 한국의 대표적 사적지로 조성한 곳이다.
현대판으로 비교한다면,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국립현충원에 비견되는 곳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고관 비천이 따로 없다.
행주산성의 사당은 오직 권율 장군만을 위한 사당이었다.
일반장병 의병 여성군들의 희생을 위령할 사당같은 것은 없었다.
정부나 지자체의 역사고증, 역사문화관리 등의 담당기관은 이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타지역의 옛 장군들의 사당이 있는 곳도 위와 같은 현상들이다.
행주대첩비(조선2014.03.04)[1]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고자 1963년에 건립한 비. 덕양산(경기도 고양시)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문화재청
[여성과 행주치마와 돌전투]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관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각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아냈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돌을 던지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녀자들의 호국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으니
이의 승리로 인하여 "행주치마"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각궁>
우리나라 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물소뿔, 뽕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활로
탄력성이 매우 강한 것이다. 사정거리가 약 200보에 달했다.
[승군의 참전]
승려의 신분으로 행주전투에 참전한 승군들이다.
승장 처영(僧將 處英)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
왜군들은 조총을 쏘아대며 성 역할을 하는 목책에 불을 질러 침탈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에 승장 처영이 승군을 독전하자 승군들은 육박전으로 용감히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의병대의 참전]
의병들은 왜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관군을 지원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전투에서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을 따라 온 전라도 의병이 다수였다.
의병대는 관군에 비하여 훈련이 덜 되고 무장상태가 허술하였지만
구국충정심은 끓어 올라 그 사기는 충천하였다.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왜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로 껐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왜적들을 치고 찍고 짓이겼다.
필자는 행주산성을 보수보완 공원화 조성할 때에 지방사학자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크게 나타내게 해줄 것을 문의하고
부탁하였으나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상 여자들과 의병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대첩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전황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직계 조상 중에는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투하다 전사한 분이 계신다.
바로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공이다.
그러나 행주산성 어디에도 단 한 줄의 의병장 수정 함덕립공에 대한 기록물이 없다.
[수정 함덕립의 의병모군(義兵募軍)]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1
1. 통문(通文)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도적놈들이 서울을 핍박하여 대가(大駕)가 외로운 성으로 옮겨가시고 적병이 포위를 하여
도로가 막히고, 호령이 통하지 아니하니 존하느냐 망하느냐의 기회가 순식간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장이 타는 듯 합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니 무릇 혈기를 지니고 있는 자는
마땅히 몸을 잊고 국난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호남은 본시 충의의 고장으로서 전에도 의열(義烈)이 이미 드러났거든 하물며 이렇게 군부(君父)가
포위속에 계실때이겠습니까?
이제 통유(通諭)하시는 교서가 포위된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한 말씀으로 써 도내의
사민(士民)에게 바라시는 바가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읽고보니 실성통곡이 저절로 나와 죽지를 못하여 한입니다.
원컨대 모든 군자들은 각자 분발을 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糾合)하고
군량(軍糧)들을 도와주며 기일에 맞추어 의소(義所)로 모여 한마음으로 적을 섬멸할 것을 다짐합시다.
만약 망서리고 관망을 하거나 무관심한다면 이는 전일 충렬의 기풍이 땅에 쓸린 셈만 된 것이 아니라
장차 윤기(倫紀)에도 죄를 얻어 고을이나 나라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마음을 합하고 힘을 뭉쳐 함께 나라의 일을 성사시켜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고함
호남절의용사각위(湖南節義勇士各位)의 좌하(座下)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通文
國運不幸奴賊逼京大駕移駐孤城賊兵合圍道路阻絶號令
국운불행노적핍경대가이주고성적병합위도로조절호령
不通存亡之機決於呼吸言念及此五內如焚主辱臣死古今
불통존망지기결어호흡언념급차오내여분주욕신사고금
通誼在有血氣者當忘身赴難而唯我湖南素稱忠義之邦曾
통의재유혈기자당망신부난이유아호남소칭충의지방증
在前世義烈已著況此君父在圍之日乎卽者通諭敎書自圍
재전세의열이저황차군부재위지일호즉자통유교서자위
中出來無非哀痛之語其責望於道內士민至深切矣讀來不
중출래무비애통지어기책망어도내사민지심절의독래불
各失聲痛哭求死而不得也惟願君子各自奮勵投메*而起糾
각실성통곡구사이부득야유원군자각자분려투메*이기규
合同志資助兵糧剋期齊會于義所期以一心殲敵如或遲回
합동지자조병량극기제회우의소기이일심섬적여혹지회
觀望越視察廢則非但前日忠烈之風掃地盡矣將得罪於倫
관망월시찰폐즉비단전일충열지풍소지진의장득죄어윤
紀不容鄕國毋淹(?)刻協心一力共濟國事千萬幸甚
기불용향국무엄(?)각협심일력공제국사천만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位 座下
*메:소매메
*(?):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대첩비각 안에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1.88m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선조 35년(1602)에 권율장군 막하에 있던 장수들이 권율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힌 것이다. 이 비문에는 행주대첩 전투과정을 상세히 새겨 넣고 있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2
2. 거의문(擧義文 : 의병을 일으키는글)
위 글월로 거의를 고하는 바는 이제 왜적이 창궐하여 우리 강토를 유린하는 데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미 국토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 또 혈기가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울음으로 적을 죽일 생각만 하고 머리를 들고 곧바로 전진할 생각을 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 도내의 장사(將士)들이 갑옷 투구를 쓰고 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 사자(士子)가 된 사람들도
마땅히 팔둑을 걷어부치고 눈물을 뿌리고 맹세를 하며 화살을 질머질 때입니다.
본래 우리 고을은 충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곳이니 어찌 적개심에 불타고 적을 둘러삼킬
마음을 가진자가 없겠습니까?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나서며 팔을 걷어 올리고 부르고 모여 비록 나무의 무기 대나무 깃대로 라도
모여들어서 왕의 군사가 되고 당나라 안지경(顔眞卿: 安祿山亂時의 義兵將) 같은 행차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은 이 통문을 가지고 돌려 온 고을에 고하고
시각을 지체하지 말도록 해주시기 천만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일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호남 절의소 용사 여러분의 좌하에 고합니다.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擧義文
右文爲擧義事今者倭賊猖獗躪蹂我疆場而한*禦無一人旣
우문위거의사금자왜적창궐린유아강장이한*어무일인기
食國土且有血氣則 安敢生哭殺之而不效載頭直前之策一
식국토차유혈기즉안감생곡살지이불효재두직전지책일
道將士관*甲胄以赴賊所則爲士子者亦當奮臂(?)제*誓面帶
도장사관*갑주이부적소즉위사자자역당분비(?)제*서면대
箭之日也顧我一州素稱忠義之鄕豈無懷敵愾之憤而欲胸
전지일야고아일주소칭충의지향개무회적개지분이욕흉
呑之者哉裂裳左袒一呼偕作雖木兵竿旗響集분*合爲王師
탄지자재열상좌단일호해작수목병간기향집분*합위왕사
顔行不其可乎伏願僉尊將此通文輪告一鄕毋滯時刻幸甚
안행불기가호복원첨존장차통문륜고일향무체시각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僉尊 座下
*한:호위할한
*관:꽬관
*(?):
*제:물제
*분:아우를분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수정 함덕립공 행장(水亭 咸德立公 行狀)]
공의 휘(諱)는 덕립(德立)이요, 자(字)는 사인(士仁)이요, 호(號)는 수정(水亭)이며 강능함씨(江陵咸氏)이다.
.................................
강릉함씨는 라조(羅朝)로 부터 려조(麗朝)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동방(東方)에서
바라볼 만한 부족이 되었다.
휘 승경(承慶)은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쳐 벼슬이 이름 미쳤고,
그의 아들은 조선시대(我朝)에 와서 증직영상(贈職領相)이 된 이로 휘는 부림(傅霖)이요,
호는 난계(蘭溪)로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워,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평공(定平公)으로
만경두곡서원(萬頃杜谷書院)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정평공 때부터 이후로 동원(東原) 즉 강능(江陵)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림 아들의 휘는 우치(禹治)요, 호는 송담(松潭)으로 성종 임금때(成宗朝)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예조판서(禮曺判書)에 이르고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라 했다.
우치의 아들은 휘는 영훈(永勳)이요, 호는 만포(晩圃)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판서(工曺判書)에
올랐으니 곧 수정공의 5대조가 되신다.
수정공의 고조부위 휘는 이정(以正)이시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증조부의 휘는 록(錄)이시며, 형조참의(刑曺參議)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귀정(貴珽)이시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아버지 휘는 순진(順振)이시며 명천부사(明川府使)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鄭氏)로 참판 효항(參判孝恒)의 따님이시다.
공의 출생일은 1554년(嘉靖甲寅 明宗9年) 9월15일이다.
공의 본디 성품은 부모께 효성스러웁고 동기간에 우애했으며 아울러 그 자태와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봉양하므로 향리(鄕里)의 이웃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인격의 도량과 재간이 우뚝 들려 보였고 품은 뜻을 이루려는 의기와 의지가 강했다.
불설(不屑 : 우습게 여겨 뜻에두지 아니힘)하지 아니하여 사장(詞章 : 詩歌와 文章)을 공부하고
궁마(弓馬)의 무예를 정밀하게 익혀 본바탕을 크게 이루었으며 경제에 대하여서도 깊이 알았다.
1576년(萬歷 丙子 선조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시초점에 벼슬하여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해미 신남도리(海美新南桃李)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강논한 사실이 가승과
성조충훈(聖朝忠勳)에 사적(事蹟)이 실려있다.
하루는 그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조 양경공(良敬公)이 보성군수를 지내면서 군민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말씀을 노래한지라, 마땅히 후손들이 살 곳이다 하였다.
양경공의 휘는 유일(有一)이니 정평공(定平公)의 8대조가 되신다.
드디어 수정공(水亭公)이 이곳을 헤아려 돌아보고 보성군 천봉산(天鳳山) 아래 죽천(竹川) 마을에 옮겨 사시니
이곳은 죽천 박선생(竹川 朴光前先生. 別註<2>참조)이 사신 곳이며 우산 안선생(우산 안방준선생. 別註<1>참조)이
자주 놀러 온 곳이다.
겸하여 우물과 돌이 있어 좋은 곳이라 하여 공(公)이 시냇물 언덕 위에다 정자나무를 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한 곳이다. 그때 사람들은 주부정(主簿亭)이라 했고 후손들은 함정자(咸亭子)라 칭하고 있다.
임진(壬辰 1592년) 난리에 公이 세상이 변해진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분개(憤慨)를 참지 못하고
의병(義兵)을 이르켜 삼운장 오봉 김충강(三運將 鰲峰 金忠剛 :齊閔 別註<4>참조)公과 같이
(호남의설청湖南義設廳에서) 꾀하니 여러 고을에서 무기와 식량을 가지고 옴으로 군사를 조직하여
도원수 권公(都元帥 權慄)에게 급히 달려가 신발과 식량을 도와주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가 울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서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장차가 위태로우니 전장터에 나아가 그 훌륭한 동포들과
생사(生死)를 같이 한다."고 말하며 분을 내어 적을 죽이고, 사로잡기를 많이 하니
권공이(權慄장군) 말하기를 "함씨(咸氏) 군사는 정돈이 잘 되고, 무기를 정밀히 하여
일대영걸(一代英傑)을 이루었다." 하였으며 그리고 군사를 맡아(이끌고) 자주 공을 세웠고,
성(城)이 함락하던 날에 미치어서는 적의 총탄에 맞아 순절(殉節)하시니 모든 의병들이 같이 따라 순절하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1593년(癸巳 선조26년) 10월 16일이다.
그의 아들 복시(復矢)가 (시신을)모시고 돌아가서 보성 대곡면 빗말 고개 둔덕 깁좌(寶城 大谷面 碑末峴 甲坐原)에
장사 지냈다.
선조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갸륵한 전사소식을 듣고 명하여 선무원종훈록(宣武原從勳錄)에 기록케 하니
사림(士林=儒림)들이 흠모하였고 아울러 보성읍지(寶城邑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에도 기록 되었다.
수정공의 아내는 정숙부인(貞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참봉 이방(參奉以邦)의 따님으로 1555년
(乙卯 明宗10년)에 출생하여 1597년(丁酉 선조30년) 11월8일 별세하여 수정공의 묘와 함께 합장하였다.
수정공의 아들 봉신(奉臣)으로 벼슬이 통정(通政)이요, 손자는 의방(義邦), 의용(義容), 의형(義亨),
의운(義運)이며 증손, 현손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가지고 온 병수(炳壽)는 의형(義亨)의 6대 손이다.
슬프다. 훼복제서(卉服제*서* : 오랑캐가 누더기를 걸치고 미친 개가 물어 뜯듯이)의 기세(氣勢)와
치장열진(치*張列陣 : 마치 솔개떼처럼
찬란한빛e님의 댓글

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함동진
6월은 밤꽃의 계절이다.
밤나무는 시골 어디를 가나 산언저리 동네주위 개천이나 강가에 많이 심겨져있다.
유실수로서 지방 곳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6월이면 절정인 밤꽃의 자욱함은
안개가 서린 듯 장관이다. 구수하다고나할까?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이 코끝을 간지르는 계절은 고향을 생각케 하는 특유의
냄새이다. 어떤 이들은 밤꽃의 향을 남성이 발정하는 냄새라고도 한다.
남성이 발정을 한다함은 생식을 위한 단계가 아닌가. 생식은 곧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기에 밤꽃의 향기는 맡을수록 향수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고향, 순천 외서의 선산인 넓다란 안산에는 밤나무 단지가 무성하다.
너무나 넓은 밤나무단지인지라 해충방제를 할라치면 살충제를 헬리콥터로
공중살포 하여야한다. 농촌계몽가이신 나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우량종 또는 개량종의 밤나무를 손수 접목번식하여 단지를 일구어 왔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이후 숙부께서 이어받아 경영하신다.
밤은 영양가가 높은 열매로 산골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이며
농촌에는 농가소득의 효자수(孝子樹)가 된다.
6월, 밤꽃의 계절이 오면
고향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조부님 생각이 간절하다.
항상 객지에 머물러 살던 나는 8.15 해방 무렵과 6.25전쟁 피란 중
약 2~3년 정도(4~7세 때 잠간씩과 11세 때) 짧은 기간이나마
조부님 슬하에 머문 적이 있다.
조부님은 나를 장손이라고 많은 관심으로 엄하게 훈육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조부님 댁에는 사랑채와 칙간채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달아놓았는데,
대문 안쪽의 칙간은 가족용이고, 대문 밖쪽의 칙간은 손님이나 길손들의 용도였다.
1950년 겨울 어느 날 대문 밖쪽의 칙간문 기둥모서리에 기대어 개머리판 닮은
밤나무토막을 들고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더니
마침 용변을 보시던 조부님께서 청천벽력의 고함과 함께 그만두라고 외치시더니
집 울타리의 낭창한 개나리 가지를 손주 손으로 직접 꺾어가지고
사랑방으로 당장 오라고 호통치셨다.
여느 때에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잘못된 행실의 벌칙인 종아리 걷어올리고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 맞기 벌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엄살도 없이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않으니 매맞기 시간이 길어졌다.
종아리는 뱀이 휘어 감듯 피멍줄기가 수없이 많은 가닥으로 얽혀 있었다.
조부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의병에 가담하시어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왜병들을 사살하였고, 수많은 의병들 역시 왜병들의 총칼에 의해
전사 희생되는 것을 보셨기에, 총으로 사람 죽이는 짓은
인간으로서 참아 못할 행위임에 치를 떠시는 것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기에 총 쏘는 흉내가
가없이 가슴 떨리는 죄악으로 보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송암 함봉표)께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6.25 전쟁 중에
아래의 시를 남기셨다.
존폐와 합분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의 길흉을 어찌 알리요.
산간 폐옥은 밥지은 연기 끊어지고
야외의 벽촌에 사람, 개도 드물다.
남을 해친 너희 무리 빨리 가거라.
백성 건질 우리 님 언제 오려나
동서(우익과 좌익)에서 공작하느라 쉬는 땅이 없으니
언제나 벼개 높이고 편한 잠을 자리요.
[ 世感 ]
存廢合分各有時 존폐합분각유시
到頭吉凶豈人知 도두길흉기인지
山間廢屋炊烟絶 산간폐옥취연절
野外僻村人犬稀 야외벽촌인견희
害物爾徒去亦速 해물이도거역속
濟民我后來何遲 제민아후래하지
東西工作無休地 동서공작무휴지
何日安眠高枕支 하일안면고침지
(松庵 咸鳳表의 시 世感<이 세상은 -6.25를 겪으며> 전문)
그렇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산간벽촌까지 인적이 끊일 정도로 인명이 살상된
6.25 전쟁은 참으로 끔직하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케 하는 밤꽃의 계절 6월에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기념일」이 있다.
이 두 기념일이
인간의 목숨이 희생된 것과 관련된 기념일이기에
그 날이 오면 심정이 더욱 숙연해진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조부님의 산소와 밤나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조부님을 회상한다.
가을이면 사촌이 형님 맛보라고 햇밤 한 박스를 택배로 부쳐온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내가 태어난 흙에서 난 밤이
제일 맛있다고 고향 자랑을 한다.
선영에 올라
할배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더디게 찾아 뵙는 참회의 묵념을 드린다.
네 살 적 할배 수염 끄들어 잡으면
네 이놈! 하시곤
머리 쓰다듬던 할배.
저만치 밤나무 한 그루
할배의 혼이 배었나
엣다, 또 끄들어 보아라
밤꽃은 할배의 수염이 되어
머리 위서 하늘거린다.
(1994. 10. 1. 작 졸시 <밤꽃> 전문)
다시 밤꽃의 계절 6월이 왔다.
6월은 밤꽃으로 고향을 생각케도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순국영령들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6.25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계절이기도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지붕 위로 굉음을 지르고 지나가는 비행기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생사를 건 6.25 전쟁 피난 중 폭격기의 공습에 놀란 가슴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벗어 나와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목숨은 거저 얻어 지니고 있는 목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북교류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이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밤꽃의 계절에 고향과 조부를 생각하며,
개나리회초리의 엄하신 훈육의 덕으로
사람됨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2001. 6. 6.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http://www.poet.or.kr/hdj
함동진시인님, 놀래셨지요?
이 글을 제 뜰에 두고 싶어 모셔왔습니다.
위 상세한 게시물에 감사드리며 이곳에 일부 다시 옮깁니다.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은 저의 집안 어른이심
공의 본디 성품은 부모께 효성스러웁고 동기간에 우애했으며
아울러 그 자태와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봉양하므로 향리(鄕里)의 이웃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인격의 도량과 재간이 우뚝 들려 보였고 품은 뜻을 이루려는 의기와 의지가 강했다.
필자의 직계 조상 중에는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투하다 전사한 분이 계신다.
바로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공이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관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각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아냈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돌을 던지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녀자들의 호국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으니
이의 승리로 인하여 "행주치마"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http://blog.daum.net/hamdongjin/15068507
두서없이 답글을 올리며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박사님의 댓글

#."함동진"詩人님! & "찬란한빛*作家님!!
"함동진"詩人님께서,擔아주신~"水亭함덕립公과 壬辰倭亂의 幸州山城"유래..
久久切切히 擔아주신,長文의 글句를 吟味하면서~先祖들의 忠節에,感泣합니다..
"찬란한빛"任께서 擔아주신,"함동진"詩人님의 글句를 吟味하고~"함"家門의,家風을..
"함동진"詩人님!&"찬란한빛"作家님!長文의 感動글에,感謝오며..늘,"健康+幸福"하세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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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러러뵙지 않을 수 없네요.
게시물을 귀히 여기심에 감사드립니다.
안박사님, 신종코로나 조심하시고 내도록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