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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봉화에 가고 싶다 /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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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532회 작성일 21-01-16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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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봉화에 가고 싶다  /  함동진 



            [봉화에 가고 싶다]

                                                        함동진


  강동문인회는 201년 6월 26일 경상북도 봉화군청 소속의 봉화전원생활학교 초청으로 봉화에 문학기행을 하였다. 필자는 대학시절 봉화에서 단신 열차에 무임승차로 상경, 독학으로 공부하여 목사가 된 친구가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봉화가 얼마나 오지의 궁핍한 곳으로 소개를 해주었는지 지금도 봉화에 대한 선입견이 심심산중(深深山中)으로만 머릿속에 꽉 차있었다. 그리하여 봉화에 문학기행을 한다기에 마음속에 아래와 같은 다짐을 하면서 강동문학 카페에 준비문의 서두를 이렇게 올린 것이다.

          심심산천의 봉화였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때가 묻지 않은
          한국의 정서가 면면히 흐른다
          풍류. 문화유산. 절경 어찌 다 말할까
          이것저것 너무나 많구나 
          봉화에 가고 싶다
          봉화에 가시거든 이런저런 것 두루 살피고 오세나
          지난 날 선조들의 얼과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미를 살피고 오세나.

  강동문인회원들은 서울지하철 5호선 강동역으로 집합하여 리여행사 전속버스 경기76 아8575호 관광버스 편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가는 길은 3년 전 영주문학기행 때의 코스와 거의 같았다. 죽령도 지나 풍기도 지나고 영주도 지나고 그리고 봉화로 들어갔다.
  버스에는 강동문인회원들은 물론 가족동반을 한 이도 있었고, 문학을 사랑하는 외부인들도 동행을 하였다.

1. 봉화전원생활학교에서

  경상북도 봉화군청은 2010년도부터 도시민농촌유치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도시민에게 전원생활에 대한 사전지식 및 체험기회 제공으로 농촌유입 촉진과 도시민의 향후 귀농(귀촌)을 돕기 위하여 [봉화전원생활학교]를 설립 운영하며 아래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교육을 하고 있었고 우리 문인들도 당일 같은 내용의 교육을 받았다(10시-11시).  이 학교는 건물이 완공되었으나 수일 후 개교를 한다는데 강동문인회가 제일 먼저 초빙을 받아 미리 방문하여 교육을 받은 셈이 된다.  또한 이 학교는 이농현상으로 농민들이 많이 떠나버려 폐교가 된 [하늘국민(초등)학교]의 폐교 자리에 세워져 있어서 더욱 안타가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도시민 농촌유치 프로그램 지원]

      ○귀농. 귀촌 정보센터 운영
      ○도시민 전원생활학교 운영, 귀농교육
      ○귀농. 귀촌 정착지원사업 안내
      ○귀농. 귀촌인 네트워크 구축

  봉화군은 워낙 많은 산악지대를 끼고 있다보니 그 여건으로 다른 지자체에 비하여 개발이라든지 귀농상황이라든지 하는 성과가 가장 늦은 편에 속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봉화전원생활학교] 과정안내 프로그램 팸플릿에는 아예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그 문구 2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

    느림은 아름답다.
    늦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느림은 늦은 것이 아니다.
    느림은 빠른 것이다.
    진정한 느림은 빠른 것 중에서 느린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만이 느림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느림은 여유다. 느림은 관조다.
    느림은 배려다. 느림은 관용이다.
    느림은 낭만이다.
    빠르기 때문에 가능하고
    빠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방우달 시인의 시)

    느림을 사는 자만이 비울 수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린다.
                          (장석주 시인)

  강동문인회원들은 [봉화전원생활학교]의 소정 교육을 받고, 준비하여간 시들을 가지고 시낭송회(11시-12시)를 가졌으며, 학교로부터 점심식사를 제공 받았다.  점심이 끝난 후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오늘, 교육과 함께 후대하여 주신 봉화군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2. 한누리워낭마을에서

  한국의 명화 <워낭소리>를 촬영한 한누리워낭마을은 경북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산정마을) 582-1번지에 소재한다.

  한누리워낭마을 주인공 노인 최원균 이삼순 부부와 집 외양간 소가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사진 촬영을 하는 필자를 보고 왜저리 설쳐댈까? 하는 이도 있겠다.  자연물은 방해되는 전선, 전봇대, 광고판, 경고표지판, 지저분한 적치물, 사람 등을 피해서 촬영해야 자연스럽게 보여지기에,  분주한 촬영자의 행동이 그렇게 보여지기도 한다.
  카페에 올린 워낭소리마을 전경과 주인공의 거주가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학기행 인원들이 그렇게 많이 갔는데도 한 사람도 찍히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과 같이 발을 맞추고, 먹고,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워낭마을 초입에는 한누리워낭마을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최원균 이삼순 부부의 댁과  소무덤 가는 길이 안내되어 있다. 이 마을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아주 깊은 산골로 사람의 왕래가 없었을 성싶었다.
  문인회원들은 때마침 소달구지에 소의 꼴을 베어 싣고 들어오는 최노인 부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소달구지의 어미소 곁에는 귀여운 송아지가 따라오고 있었다.  문인회원들은 워낭마을 주인공과 함께 분주히 기념촬영들을 하였다. 그런데 최노인은 워낙 연로하여 말소리를 듣지 못하고. 허리도 구부정한데다 지팡이까지 집고 있어, 소란을 피우는 것 같은 일행의 행동거지가 매우 미안스러움을 드렸다.
최노인 댁에는 본체의 집과, 새로지은 매점, 외양간 등이 있었고, 집 입구에는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소가 실물 크기의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었고, 목각으로 된 여러점의 목각작품들이 세워져 있었다. 

  [워낭소리의 간략한 스토리]

  [워낭소리 (Old Partner)]는 2008년에 제작된 75분짜리 영화로 감독은 이충렬. 출연은 최원균, 이삼순, 최노인의 소로 되어있다.

  (1) 이를 굽은 감정으로 감상을 하면

  팔순에 다다른 노인과 39년이나 된 소와의 사이에서 전개해 온 삶이 사람과 동물사이이지만 진실과 위선, 은혜와 배신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를 시사한다고나 할까?

  불편할 정도로 걸음걸이가 둔해진 소의 역경을 보여준다. 그러하나 고집불통인 노인은 이 소를 이용해 농사일은 물론이고 나들이도 다닌다. 점점 세월은 흘러간 어느 날 소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있을 무렵, 자식들로부터 어서 소를 팔아버리라는 독촉을 받게 된다. 이에 시달린 노인은 소를 내다 팔기로 하고, 우시장에 이 늙은 소를 끌고나가서 무려 500만원이나 호가를 하게 되었다.

  노쇠할 대로 노쇠한 늙어빠진 소였음으로 도축장에 가서 도축을 한다한들 말라빠진 늙은 소에게서 얼마만큼의 근량의 고기가 나올까? 소로서는 더 이상의 가치가 없었다. 이 늙은 소는 일을 부리는 소로서의 가치, 소고기 생산으로서의 가치, 송아지를 생산할 가치 등이 전혀 없는 쓸모없는 소가 되었는데 이를 500만원이라 호가하니 우시장에서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시장에서 쳐주겠다는 그 늙은 소의 시세는 후하게 쳐야 백만 원 정도라고 하였다.

  할 수없이 노인은 나이 적은 소를 구입하였는데 송아지를 배고 있었다. 암소를 들여온 날부터 늙은 소는 외양간에서 마당으로 쫓겨나며 분했다. 30년간 죽어라 일한 주인님을 섬긴 결과가 이런 대우밖에 안되나? 늙은 소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새로 들여온 암소는 쟁기질도 할 줄 모르는 풋내기였지만 송아지를 뱃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인과 늙은 소가 함께 베어온 꼴을 놀고먹으며 편하게 지냈다. 그뿐인가. 늙은 소의 입에는 입망까지 씌워줘 먹을 수 없으니 배고픔의 고통이 이미저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어린 송아지는 늙은 소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젖을 빨 때를 제외하고는 늘 늙은 소 곁에서 놀아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늙은 소에게 일만 시켰는데, 너무나 배가 고픈 늙은 소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떤 날 외양간 앞에 놓인 사료통을 쓰러트렸다. 노인 몰래 사료를 먹으려던 순간 실수로 사료통을 쓰러트리게 되었는데 소가 사료통을 쓰러트린 것에 화가 치밀은 노인은 소를 구타하였다. 구타당하고 학대받던 소는 힘들고 어려원던 일생을 마감하게 이르자 노인은 코뚜레를 풀어주었다.

  노인은 이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소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했었는데 소가 죽고나니 마음이 달라져 포크레인으로 밭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소가 성실히 주인을 섬겨온 은혜를 배반으로 갚아버린 것이다.

  (2) 이를 옳바른 감정으로 감상을 하면

  현실의 우리들의 삶에서 보듯 많은 대사가 필요치 않은 차분함만이 화면 가득히 흐른다. 진실이란 입으로 하는 말이 없이도 서로 통하고 말이 없이도 서로 믿음을 주는 삶의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영상이다. 마치 호수에서 잔잔히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은 유연한 정적인 고요함마저 마음에 안겨주는 워낭소리의 풍경이다.

  세파에서 잘못 악역을 하려드는 보통사람들에게 워낭소리는 고요한 경적(警笛)이다. 묵묵한 안정의 삶을 깨끗한 바탕으로 깔아주는 워낭소리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방방곡곡에 평화로이 스며든다.

영화제목 [워낭소리 (Old Partner)]가 말해 주듯, 워낭소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는 비록 가축이지만 반평생을 가족처럼 함께한 Old Partner로 함께한 주인들인 최노인과 이노파의 깊이 파인 주름살과 흰머리칼, 굽어진 허리의 모습이 될 때까지 오직 충직 하나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39년간 춘하추동의 세월, 폭풍우 한설 몰아칠 때나 어떤 악조건에서도 서로를 가족의 일원처럼 의지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한 삶이었다.

  눈빛이면 눈빛으로, 목소리면 목소리로, 표정이면 표정으로, 움직이면 움직임으로 서로를 알아차렸다. 고통과 아픔의 생리현상까지도 서로를 알아차렸다.

  서로가 일에 지칠 줄 모르던 덧없던 고운 정 미운 정의 세월도 생의 황혼기에 기력이 다하고 식욕을 못 느낄 때 어그적거리는 몸으로 맛있고 깨끗한 목초를 베어다 풀어 놓는 따뜻한 정, 애잔함으로 주저앉는 소의 생애의 정경이다.

  “좋은 곳으로 가그래이”

  할머니의 “영감죽으면 나도 곧 따라가야지”

  말이 필요치 않는 감동의 긴 여운이다. 소의 무덤에서는 봄마다 꽃이 피어날 것이다. ‘워낭소리꽃’으로......

3. 다덕약수정(多德藥水井)에서

  <다덕약수정(多德藥水井)>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다덕약수관광지에 소재한다.  다덕약수는 태백산맥에서 솟아나는 자연청정 탄산약수로 위장병과 소화불량 아토피등의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또한 다덕약수인 탄사수로 닭백숙을 하면 기름기가 제거되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또한 다덕약수인 탄사수로 밥을 지으면  밥 색깔이 푸른빛을 띠며 찰기가 있는 맛좋은 밥이 된다고 한다. 
  다덕약수(多德藥水井)라 칭함을 받은 원인은 이 약수를 마시고 건강을 찾는데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대단한데, 이는 2001년도 부터 관광지단지로 개발하여 누구나 접근하기 쉽게 하였기 때문이다.
  약수는 정자를 짓고 그 안의 바닥에 설치하여 놓은 거북의 입에서 약수가 뿜어져 나오도록 하였다.  바닥에 녹물같은 것이 많이 끼어있는 것을 보니 우리 인체에 필요한 미네랄 등
기타 광물질이 넉넉히 함유되어있는 것 같다.
  함께한 일행들도 약수를 물병에 담느라고 길게 장사진을 쳤고, 어떤 이들은 매점에서 구입한 큰 물통으로 덕을 많이 보려고 넘치게 담아가기도 했다.
  약수를 한 바가지씩 마시고, 한 병씩 받아들고 나오는 회원들의 모습들이 덕을 많이 보았는지 행복해 보였다.  한 여회원은 약수물로 손을 닦았더니 금방 처녀손 같이 보드라워지는 효과를 보았다고 회원들에게 고운 손을 내밀어 보여주기도 했다.

4.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닭실마을(유곡리)에서
   
  [전통 가옥으로 구성된 닭실마을(酉谷里)]

  닭실마을은 문수산 자락 끝에 울창한 솔숲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그윽한 전통 한옥건축물들로 가득찬 마을이다.  길과 하천을 따라 토일, 새말, 탑평 등에 전통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어 멋스런 옛 풍취를 마음 것 보고 느낄 수 있는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닭실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까닭은 금빛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의 지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의 후손들이 500년 가까이 지켜오는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봉화 닭실마을은 안동의 내압마을과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꼽은 영남의 4대 길지(吉地)의 하나로그 명성이 떨친다.
  닭실마을을 상징하는 대표건축물은 정자 청암정(靑巖亭)이다.  권벌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바위 주변에 인공연못을 조성하여 글읽는 방에서 청암정으로 건너는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이황은 이를 두고 그의 시중에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로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다 (亭開絶嶼橫橋入)” 고 하였다.
  전국에 정자가 760여개나 있는데 그 중에서 봉화가 102개를 보유하고 있고, 봉화에서 청암정은 석천계곡의 석천정사(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소재하며 권번의 큰 아들 권순보의 石泉亭-사적 및 명승 제3호)와 함께  제일로 꼽는 정자로 친다.
  닭실마을은 482점이나 되는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독립투사 등 수많은 인물들도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忠節世鄕(충절세향)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일제가 닭실마을의 이런 상황을 곱게 보지 않아 춘양목을 실어 나르는 철길을 곧게 깔지 않고 고의로 마을 앞을  휘돌아나가도록 하였다. 그 사연인즉 닭과 지네가 천적이므로 철길을 지네 모양으로 구불구불 놓아 닭실마을의 정기 꺾었다고 하는 것이다.

    (詩)
    [청암정(靑巖亭)]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 럽구려

    (한시원문)
    酉谷先公卜宅寬      유곡선공복택관
    雲山回復水灣環      운산회복수만환   
    亭開絶嶼橫橋入      정개절서횡교입   
    荷映淸池活畵看      하영청지활화간   
    稼圃自能非假學      가포자능비가학   
    軒裳無慕不相關      헌상무모불상관   
    更憐巖穴矮松在      갱린암혈외송재   
    激勵風霜老勢盤      격려풍상노세반   

    [청암정(靑巖亭)에 대하여]

  청암정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마을에 있으며, 경북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충재 권벌은 중종 15년(1520)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된 후 이곳에 내려와서 농토를 마련하고 14년간 후진을 양성하며 경학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택리지'에서 닭실마을(유곡리)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승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암정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둘려 있다.
  청암정의 현판들 중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쓴 [靑巖亭(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眉■ 許穆)이 쓴 [靑巖水石(청암수석)] 현판이 청암정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는데,  대개 누각이나 정자의 현판이 외부에 부착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靑巖亭(청암정)]이란 정자의 명판이 되는  현판은 정자의 내부에 부착되어 있었다.
  청암정은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지어져 있어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와 같이 이황의 시 에서 말하듯 그 구조와 주위가 아름답다.
  청암정을 받치고 있는 거북을 닮은 바위와 못이 어우러져 수석위에 얹어 놓은 것 같았고    청암정에 오르려면  하나의 긴 돌로 걸쳐진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황이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라 읊지 않았는가.  물그림자를 밟고 가듯 돌다리를 건느면 선경(仙境)에 오르는 것 같은 운치가 있었다.  특히 물그림자로 가득찬 청암정과 충재의 종택(宗宅) 사이의 물그림자는 환상적이었다. 아마도 충재 권벌 선생은 그 종택에서 글을 읽고 공부를 하였으리라.  물빛을 보면 낭낭한 청암의 책읽는 소리가 물위로 튕겨져 나오는 듯하다.
  박희 박사는 회원들과 함께 청암정에 올라  청암정과 청암에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해설을 하였다.  박희 박사의 해설을 듣고 나서,  강동문인 회원들은 청암정 거북바위 위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좋은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으리라.
  청암정을 간직한 닭실 마을은 마을 전체가 기와를 얹은 전통가옥들로 이루어져 수백년 전의 조선시대에 거슬러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충재박물관(沖齋博物館)]

  청암정이 있는 입구에는 충재박물관(沖齋博物館)이 있었다. 상경 시간계획에 쫓겨 박물관 관람은 생략하였으나 박희 박사의 해설로 대신할 수 있었다.
  충재가 은거했던 곳, 이곳 유곡리 닭실마을에 청암의 후손들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그와 관련된 청암정이 있는 곳에 충재박물관을 세워 2007년 9월 15일 개관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충재박물관에는 청암 권벌과 관련된 서책과 글씨며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책등이 전시되어 있고, 충재일기 7책(보물 261호). 근사록(보물262호). 중종이 하사한 책(보물 896호). 고문서가(보물 901호). 연산일기. 세초도교서. 교서. 재산분재기. 호적단자 등 보물급 전적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닭실마을(유곡리)의 전통한과]

  조선 중종 때 재상을 지낸 충재 권벌의 종택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선대에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한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500여 년 동안 한과를 만들어온 전통마을이 되었다.
  한과는 찹쌀 반죽에 멥쌀가루를 입혀 튀겨낸 후 조청을 입히고 깨, 강정, 튀밥 등을 박아 만들어 낸다.
  닭실마을에서는 순 국산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방법대로 한과를 만듦으로 전통의 맛을 옛 그대로 살리고 있으며, 고명을 얹은 모양이 너무나 곱고 고와 소문이 나 있다.
  유곡리부녀회에서는 1992년 생활개선부를 만들고 마을회관에 모여 공동으로 한과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곳의 회원들은 능숙한 솜씨로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며 옛 맛을 살리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5. [이몽룡의 생가 가평리 계서당(佳坪里 溪西堂)]에서
     
  [금준미주시 金樽美酒詩(암행어사출두시)]

  변학도(卞學道)는 비록 소설속의 인물이기는하나 무능하고 부패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대표적 인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변학도(卞學道)는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부임하여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생일 잔칫날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내려온 춘향의 애인 이몽룡(李夢龍)이 출두함에 따라 그의 죄상이 밝혀지고 파면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읊어진 시가 [금준미주시 金樽美酒詩]이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금잔의 맛좋은 술은 천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  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니.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이 눈물 쏟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더라.

    1. 그동안 위의 한시는 춘향전(春香傳) 속에서 이도령이 지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이도령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므로 한시의 작자로 표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였었고,  혹은 광해군 때 명나라 사신이 지었다고 하기도 하였었다.
    2. 그러나 춘향전(春香傳)의 이도령의 실제 모델이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成以性)이라고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가 그의 연구논문에서 밝혀냄으로, 위의 한시는 성이성이 지었다고 하는데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가평리 계서당(溪西堂)]

  [가평리 계서당(佳坪里溪西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소재하며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成以性)이 살던 古宅이다.  성이성(成以性)은 창녕인(昌寧人)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芙蓉堂 成安儀)의 아들로 인조(仁祖)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晋州府使)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3차례나 어사에 등용된 바 있다.
  근검과 청빈으로 관직을 바르게 집행함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 떨쳤다. 후일에 부제학(副提學)을 추서받고  청백리(淸白吏)로도 녹선(錄選)되었다.  계서당(溪西堂) 건물은 광해군(광해군) 5년(1613)에 성이성(成以性)이 건립하였다.
  계서당은 본채 건물과 한께 부속 문화재로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배치되어 있고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주는 성기호로 되어 있다.
  솔숲이 우거진 배경의 경사진 산록에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여 우뚝 솟아 보이도록 건축하였고, 마당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사당을 배치하였다. 사당의 담장은 와편(瓦片)담이다.
  계서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건물이며,  사랑채와 중문간(中門間)으로 이어져 있다.  계서당 본채에는 프라스틱재의 굴뚝 2기가 매달리듯 세워져 있었는데 문화재의 기품을 살리기 위해, 문화재관리당국은 굴뚝들을 보이지 않게 처리하거나 또는 고풍스럽게 조적하여 만들어 주기를, 필자는 바란다.
  계서당(溪西堂)을 지키고 있는 종손 성기호씨는 강동문인회원들의 방문을 환영하여 주었다.  강동문인회에서는 선물을 미리 준비치 못하여 약소하나마 금일봉을 건넸으나 극구 사양하고 접수치 않았다. 선대의 청백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듯 강직함이 엿보였다.  안주인께서는 냉보리차를 정성들여 내어놓아 강동문인회원들의 더위와 갈증을 풀어 주었다.
  여기에서도 박희 박사가 계서당(溪西堂)과 이몽룡의 실존 인물인 성이성(成以性)과 그 가문(家門)에 대하여 해설을 하고 난후 회원들은 그의 박식함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박희 박사의 해설이 끝나고 회원들은 계서당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성이성(成以性)의 사당도 살폈고 그 건물 곁에 있는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도 살폈는데 소나무가 기우러져 받침목에 의지되어 있었다.  그 뒤로 울창한 솔숲이 산을 덮고 있었다. 

6. [박달재]에서

    [박달재(이등령)]   

강동문인회원들은  귀경길에 박달재의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들인 금봉 낭자와 박달 도령이 먹었던 도토리묵을 주제로한 음식을 석식으로  취하기 위하여 [박달재(이등령)]마루에 있는 식당가를 경유하였다. 
  필자는 쫓기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강동문인회 카페에 올릴 사진들을 촬영하기 위하여 묵을 소재로한 음식만을 먹는둥마는둥 취하고  2차 메뉴인 전(奠) 음식은 취할 시간이 없었다.
박달재 식당가 앞 광장 에는 [박달재] 표지석비와 박달이 조각된 목각 조형물이 있었고  애국지사 단암 이용태(檀菴 李容兌)와 여산 이용준(如山 李容俊) 형제의 합동추모비, 그리고  단암 이용태(檀菴 李容兌)와 여산 이용준(如山 李容俊) 애국지사의 흉상이 각각 세워져 있었다.
  음식점 식당가 주변에는 온통 목각조형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남녀의 애정표현물과 더러는 에로틱한 것들도 있었다. 거시기 조형물도 몇 점이 있었는데 필자는 이를 보고 한마디 했다. “암만 못해도 이 정도는 되야제,  이정도 되어달라고 거시기에  돌을 얹고 올려놓고 비는 사람들은 남자일까요? 여자였을까요?”
  박달재의 원 이름은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라는 뜻을 지닌 [이등령]이었으나 조선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과 이곳의 어여쁜 낭자 금봉의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 회자되면서 [박달재]로 불리게 되었다.
  장원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박달은 고개아래 촌가에서 하룻밤을 유하다가 길손을 맞이하는 금봉의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금봉도 순수하고 늠름한 박달의 모습에 잠을 못 이루고 달밤을 거닐다가 역시 금봉을 그리면서 서성이던 박달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몇 날을 머물며 금봉이와 사랑을 속삭이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에 혼인을 하기로 언약을 하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났고, 그날부터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서낭신께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소식이 없자 크게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한을 품고 삶을 거두고 말았다.
  한양에 온 박달도 과거준비는 잊은 채 금봉을 그리는 시만 읊다가  낙방을 한 후 금봉을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의 장례 사흘 후에야 되돌아왔으나, 금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다가 언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쫓아 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등령]을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식당가 인근에는 박달재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박달재에 얽힌 역사적 기록이 새겨진 기념탑, 동상 등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진방남) 작사  김교성 작곡
  1.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2.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는 가수 박재홍이 노래를 불러 크게 힛트한 가요이다. 1964년「코리아 레코드社」에서 출반하여 널리 보급된 국민가요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해방 후 가수 반야월(당시의 本名 진방남)은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고 단원들과 함께 지방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충주행 버스를 타고 비내리는 박달재를 넘다가 고개마루에서 버스의 고장으로 쉬는 가운데, 성황당 앞에서 어떤 농촌 부부의 애절한 이별 장면을 보고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를 훗날 김교성이 작곡하고 박재홍이 불러 대유행함으로 국민가요로 부상되어 오늘날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명장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대첩비와 장군의 기마상이 있었다.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박달영 전투]

  포천에서 원주를 함락한 거란 10만 대군은 충주와 제천을 침공하려고 하였다. 김취려 장군은 전군병마사로서 맥곡(麥谷) 보리실(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서 중군병마사 최원세(崔元世) 장군과 협공하여 적 3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김취려 장군은 제천방면으로 달아나는 적을 계속 추적하고 산골짜기를 수색하면서 승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박달현에 이르렀다. 
  1217년 7월 김취려 장군은 거란군과의 전투를 예상하고 박달고개를 먼저 차지하였다.  박달고개는 경사가 가팔라서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병력면에서 불리했던 김취려 장군은 대규모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가 위해서 박달재를 미리 차지하는 것이 중요했었다.
  김취려 장군은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 장군을  진중의 왼쪽에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 장군을 진중의 오른쪽에 배치하여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고개 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동틀 무렵에 예측대로 거란군이 박달고개의 좌우로 올라왔다.  고개 마루에서 미리 포진을 하고 있던 김취려 장군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북을 울리면서 공격명령을 내렸다. 잠복하고 있었던 고려의 병사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적들을 향하여 일제히 화살을 쏘고 결사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대패한 거란군은 평창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서 원산. 흥남을 거쳐 여진 땅으로 도주하였다. 박달령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전쟁의 피해가 제천 이남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고려명장  김취려장군 대첩비(金就礪將軍大捷碑) 주변을 살피면 그에 대한 기록이 새겨진 기록판을 볼 수 있다. 

  [김취려장군(金就礪將軍)]

  위열공 김취려(威烈公 金就礪 1172-1234)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고려의 명장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아버지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김부(金富)이다. 1186년 음서(陰敍)로 등용된 후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正4品)으로 동북 국경을 지킨 뒤 대장군(大將軍 조3품)에 올랐다. 1216년(고종3년) 거란의 무리들이 세운 대요수국(大療收國)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침입을 하였을 때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 평남 개천)과 개평(開평; 평남 영변)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 승리의 기세를 몰아 묵장(墨匠: 영변부근) 들판에서 포진하고 있는 거란군의 진영을 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갈라놓고 적병을 쓰러뜨렸다.  한 명의 고려병사가 백 명의 적병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큰 아들마저  전사하였지만, 탁월한 지휘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향산(香山; 묘향산) 전투에서는 적 2,400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1217년 거란근 10만명이 원주(原州)를 거쳐 충주(忠州)까지 내려오자  전군 병마사가 되어 제천(堤川) 박달령(朴達嶺)에서  거란군을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쪽으로 패주시켰다. 1218년 거란이 또다시 대거 침입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자 병마사(兵馬使)로서 몽고군과 동진국(東鎭國)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1219년 의주(義州)에서 일어난 한순(韓恂). 다지(多智)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230년에는 국정 실무를 총괄하는 시중(侍中)에 올랐다.  [고려사(高麗史)]를 쓴 역사가는 "김취려는 검소하고 정직하며 충성과 의리를 신조로 삼았으며 군대를 통솔할 때에는 명령이 엄격하였다."고 하였다.

  김취려장군전적비(金就礪將軍戰跡碑) 앞에는 또 다른 작은 비석이 있는데 한 비석에 절반씩 나누어 기록을 하였는데 이를 살피면 아래와 같다. 
 
  [탑비 앞 위업을 새긴 작은 비석] 내용
  취려장군 대첩비/ 천등산 박달재는/  거란대군 이기고/ 승전고 울렸던곳/ 智德勇 겸비하신/ 데승의 취려장군/ 난세에 더그리워/ 거란군 남하막아/ 고려위기 구하고/ 어진정치 펼치신/ 문하시중 명재상/ 위열공 시호받고/ 고종묘 배향되고/ 숭의전 배향되신/ 고려의 십육공신/ 목숨바쳐 싸웠던/ 무명의 고려장병/ 그 넋을 위로하고/ 위대한 장군 업적/ 영원히 기리고자 / 돌에 새겨 세우니/ 길이길이 전하리/      글 彦陽人 萬熙

  [충절의 고장 박달재와 려의 7 장군(1217-1219년)]
  (좌측 半面)  이곳 박달재는/  조국의 터전이였고/ 충절의 꽃을 피었다/  천만세 영원토록/ 이어가니/ 일곱 장군 가호 속에/  축복이 있으라
  (우측 半面) “[7장군] -김취려 장군/ 최원세 장군/ 신덕위 장군/ 이극인 장군/ 주공예 장군/ 최준문 장군/ 엄  보  장군  (고려사 참조)“

  박달재공원에는 [제24회 88서울올림픽성화봉송기념비]도 있었고, 금봉낭자와 박달도령의 애틋한 사랑의 스토리 조형물들이 시리즈 식으로 세워져 있기도 했다. 
  한 조형물에는 이런 싯귀가 새겨져 있었다.
    “난간을 스치는 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서낭신께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소식이 없자 크게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한을 품고 삶을 거두고 말았다" 는 조형물도 있고,  박달은  낙방을 한 후 금봉을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의 장례 사흘 후 되돌아와 금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다가  언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쫓아 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조형물도 있었다.

  박달재의 석식을 기행행사의 마지막으로 하고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서울을 향하여 질주하였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걱정을 하였는데 하루 일정동안 옷깃조차 적시지 못할 정도의 가랑비만 오락가락하였을 뿐 지장을 주지 않았다. 오늘을 위하여 수고하신 박희 박사. 김병관 회장. 김상호 사무국장. 배정자 총무를 비롯한 운영진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봉화에 문학기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신 임기환 시인께도 감사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수원에 살고 있는 필자는 오늘 큰 행운을 얻었다. 관광버스의 차고가 수원 필자의 집근처였기 때문이었다.


        -----------------
          2010년 6월 26일

          2010. 12. 30.<강동문학>2011. 제18호, p.281-290.  강동문인회.
          2011. 11, 30.<구로문학>2011. 통권15호. p.321-330.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 刊.

          함동진(長山. 깊은산골)
          http://hamdongjin.kll.co.kr/ 
          http://cafe.daum.net/hamdj 


 한국문인협회 지부 강동문인협회  http://cafe.daum.net/gdmu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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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박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함 동 진* 詩人님!!!
"함동진"詩人님!安寧하십니까?방갑습니다`如..
"水原"에 居하시고,特히 同`區域에 살았던 因緣이..
  本人도 "水原"에 42年살았고,"日月地區"에도 11年..
"江東文人協會"의 "奉化`紀行文"을,感動으로 吟味하며..
"워낭마을,닭실마을,박달재 等"의 解說말씀에~感謝드려요..
"함동진"詩人님! "辛丑年"새해에,늘 健康하시고 幸福하세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봉화의 여러 관광지 해설을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닭실마을 청간정 이몽룡생가 등 몇몇곳은
다녀온 곳이라 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워낭의 소리 영화는 못 보았는데
세세한 이야기로 직접 영상을 본 듯 즐겁게 감상도 했습니다.

진실이란
입으로 하는 말이 없이도 서로 통하고 말이 없이도
서로 믿음을 주는 삶의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영상이다.
마치 호수에서 잔잔히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은
유연한 정적인 고요함마저 마음에 안겨주는 워낭소리의 풍경이다.

함동진시인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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