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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경주ㆍ울산 4일기행1-경주기림사ㆍ신문왕 호국 행차길목 용연폭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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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061회 작성일 21-03-01 15:59

본문



▲ 2021.2.22.목.경주 기림사ㆍ신문왕 호국 행차길목 용연폭포에서 필자


경북 경주ㆍ울산 4일간의 역사탐방
2021.2.22.월-25.목(3박4일)

지난 2눨3일부터 5일까지 다녀 온 경주여행에서 미처 찾지 못했던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기림사와 골굴사를 찾아서 다시 경주, 울산으로 여행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다녀왔다.

이번에는 동해바다로 나아가 문무대왕릉인 수중릉과 이견대, 감은사지,양남 주상절리를 
찾아보고 숙소를 경주 보문단지 "The K- Hotel 경주"에서 이틀간 머물면서 명활산성, 
보문호수주변을 방문하고 경주 대왕암 문무왕릉에서 해뜨는 장면을 찍고 울산으로 향하였다.

울산 대왕암공원, 울주군 천전리 석각 그리고 반구대 암각화를 돌아보고 태화강가
 "울산 Riverside Hotel"에서 1박한 후 
태화강 국가정원(국가지정 2호 , 참고로 1호는 순천국가정원)과 태화루를 관람한 후 
무사히 3박4일간의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제1편으로 경주 기림사와 용연폭포 
2편으로 경주 골굴사, 양남 주상절리, 
3편으로 경주 문무대왕릉, 이견대, 감은사지, 명활산성 보문단지, 
4편으로 울산 대왕암공원, 
5편으로 울주 천전리 석각, 반구대 암각화, 태화강 국가정원, 태화루로 마무리되겠습니다.


1편 
경주 기림사와 신문왕 호국 행차길목 용연폭포이야기


홈에서 7시35분에 나와 올림픽대로에 드니 햇님이 동녘하늘에서 우릴 반긴다.
3박4일 여행기간 비소식은 없어 좋은 날을 택한 듯 했다. 
출근시간 전, 조금은 이른 시간이어선지 큰 막힘없이 쭉쭉 내 달릴 수 있어 시원했다.


경주 함월산 기림사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含月山 祇林寺 一柱門 柱聯(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주련)
佛國金剛學林道場(불국금강학림도량)
佛國叢林律院道場(불국총림율원도량)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祇園精舍)와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토지의 신,혹은 크다는 기 자와 수풀 림 자))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 기림사(含月山 祇林寺)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기림사는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송우화(宋迂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한편 왜구가 동해를 거쳐 경주로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진남루. 나팔. 목비 등이 남아 있어 호국사찰임을 증명해 준다



함월산 기림사 사적비(含月山 祇林寺 事蹟碑)

불법의 깊은 향기는 천년가람(伽藍)이 있어 더욱 그윽하고 중생의 무거운 번뇌는 
청정한 산문에 들어 그 쉴 곳을 얻는다. 여기 기림사(祇林寺)가 바로 그런 도량이다.
함월산 기슭에 자리잡은 기림사의 지세는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추듯 뭇 봉우리가
둘러싼 가운데 물길이 열려 이루어진 명당으로 옛부터 신령한 거북이 물을 마시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이라 하였다.

사적(事蹟)과 중창기(重創記) 등의 문헌에 따르면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멀리 천축국(天竺國)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처음 절을 짓고 임정사(林井寺)라
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절을 크게 세우고 기림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설화와 역사를 함께 적은 이 같은 기록들은 기림사가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절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기림사라는 이름도 부처님 당시 가장 중요한 절인 기타림(祇陀林)의 기원정사(祇園精舍)
에서 따왔음이 분명하다. 이 기록들은 우리나라 설화 문학의 기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이것을 통해서 옛 기림사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오직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感恩寺 앞바다로 행차했던 일과 관련하여 기림사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이 문무대왕의 水中陵이 있는 동해에서 용으로부터 玉帶와 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은 다음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북쪽 계곡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쉬다가 용으로부터 
받은 옥대 고리를 계기로 龍淵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는 다시 고려 말 고종 때 
기림사 주지였던 각유(覺猶) 스님에 관한 약간의 기록도 남기고 있다. 스님은 선종 최고의 법계(法階)
인 대선사였고 뒷날 宮中 분수승(焚修僧)의 직책을 맡았다는 내용 등이다. 

이런 사실과 함께 청동불두와 화엄경첩 그리고 삼층석탑 등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 기림사의 위상을 대강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기림사는 주요 사찰로 
인정되었다. 억불정책에 따라 세종 6년(1424)에 불교의 모든 종파를 禪敎兩宗으로 통합하고 전국의 
사찰 가운데 36개 寺만을 공인할 때 기림사는 선종사찰로서 경상도의 4대사에 포함되었다. 
이때 배정된 거주 승려 수는 70인이고 토지는 150결이었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가람을 유지하며 法燈을 밝혀 온 기림사는 선조 11년(1578) 에 이르러 
주지 축선(竺禪) 스님이 낡은 건물을 고치고 절을 새롭게 이룩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경주지역 방위에 종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때 기림사의 인성(引性) 스님은 僧軍 279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으며 인근 지역 僧軍을 
총지휘하는 鎭東將軍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연대와 건립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군사 지휘소를 
의미하는 진남루가 현재에도 대적광전 맞은 편에 그대로 남아 있어 기림사의 당시 승군 활동을 
말해 주고 있다. 왜란 중에 기림사가 입은 피해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전란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난 뒤부터 진행된 대규모 중창 불사는 전쟁의 피해 복구와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 후의 불사는 인조 7년(1629) 대웅전의 5차 중수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경주 부윤 정문익(鄭文翼)이 大功德主가 되고 경주부의 관리들도 많이 동참하였다. 
인조 27년(1649)부터 숙종 10년(1684)까지 35년 동안에는 영산전과 금당 그리고 삼층 사리각과 
약사전 및 대웅전 등 주요 건물을 차례로 새로 짓거나 수리하였다. 

사찰 자체의 노력과 신도들의 시주 외에 지방관들까지 힘을 보태 이룩한 17세기 후반의 불사로 
왜란 후 기림사는 비로소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영조 31년
(1755)에 대웅전을 수리한데 이어 정조 9년(1785)부터 다시 대대적인 불사를 했다. 
이때 대웅전과 약사전 그리고 응진전을 크게 고치고 명부전과 종각을 세웠으며 대웅전은 
大寂光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거의 1년 동안 진행된 이 불사 역시 많은 사람이 동참하였다. 

경주부윤 金光黙이 대공덕주로서 크게 후원하였고 수군절도사이자 전라병마절도사로 옮겨간 
허서(許逝)는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시주하였다. 또 설초(說初)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과 
신도 48명이 시주가 되었으며 인근 사찰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佛國寺 天龍寺 등 
13개 사에서 보낸 부역승(赴役僧)만 해도 4백 명이 넘었다. 이 불사가 끝난 뒤 정조 18년(1794)에는 
주지 이관 스님이 숙종 때 이미 편찬한 祇林寺重創記와 祇林寺事蹟을 참고하여 새로운 
기림사사적을 간행하였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는 큰 불사가 없었는데 철종 13년(1862)에 큰 화재를 만나 113간의 건물이 
불타고 말았다. 이때에도 경주부윤 송우화(宋迂和)를 비롯한 지방유지들이 적극 후원에 나서 
이듬해 가을에 건물을 모두 복구할 수 있었다. 고종 15년(1878)에는 경주 읍장사(茸長寺)에 
모셔왔던 梅月堂 金時習의 영정을 기림사로 옮겨와서 梅月堂 影堂을 지어 봉안했다. 
生六臣의 한 사람이었고 불승으로서도 행적이 뚜렷한 매월당의 제사를 이때부터 지방 유림과 
함께 기림사에서 봉행하고 있다. 

19세기의 마지막 불사로는 대한제국 광무 3년(1899)부터 약 1년에 걸쳐 법당과 요사 등 모든 건물을 
크게 보수하였다. 이것은 정조 9년의 불사 이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일이다. 
20세기에 들어와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1911년에 불교계의 장악과 지배를 위해 전국 사찰을 
30본산 체제로 통합하고자 寺刹令을 공포하였다. 이때도 기림사는 30본산의 하나로 서 산내 
말사 2곳과 영일 영덕 월성군의 산외 말사 15곳 등 모두 17개 말사를 통할하는 위치에 있었다. 

1962년에 대한불교조계종이 25교구 본사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기림사는 제11교구본사인 
불국사 말사로 되었다. 근래의 불사는 1978년에 주비 無着 스님이 범종을 조성했으며 1983년에는 
기림사사적을 비롯한 여러 문서들을 한데 모아 佛國寺誌(外)에 포함시켜 간행하였다. 
신라시대에 최초로 창건된 이래 건물의 배치와 명칭이 많은 변화가 있어 왔지만 다시 최근에는 
대적광전이 있는 옛 도량의 서남쪽에 새로운 법당과 건물들을 짓고 비좁던 도량을 크게 넓혔다. 
그동안 無着 寂雲 法一 스님이 차례로 주지를 맡으면서 불사를 추진해온 결과였다. 

1980년대에 적운 법일 두 스님이 남북통일을 염원하여 삼천불전을 짓고 삼천불을 봉안했으며 
대적광전을 7차로 중수하고 관음전과 삼성각 천왕문과 범종루 및 祇林寺遺物館과 함께 
含月展示館을 세웠다. 200년 이후로는 주지 宗光 스님이 다시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하였다. 
국고금 보조를 받아 백운당과 공양소와 정랑(淨㾿)을 새로 짓고 자체 예산으로 일주문을 세웠으며 
삼천불전의 삼존불 改金 및 오백나한과 十王의 改紛을 하였다. 역시 국고금의 보조로 화정당과 
진남루 그리고 靜窩堂을 해체 복원했고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경전들을 모두 보수하였다. 

이 기간 중의 불사 가운데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설이 미비하고 협소하던 유물관과 전시관을 
철거하고 거액의 국고금 보조를 받아 최신 설비를 갖춘 祇林遺物館을 지은 일이다. 
한편 南寂庵과 甘露庵 뿐이던 산내암자도 이 기간 중에 桐庵 如雲庵 知足庵 西藏庵이 
신축됨으로써 6곳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5년여만에 중창이라 할 만한 큰 불사를 마무리지었다. 
현재 기림사에는 조선시대 대표적 법당건물인 보물 833호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23동의 건물이 
있으며 비로자나삼존불상과 大般若經金銀字寫經 및 乾漆菩薩坐像 등 국가지정 보물 4점과 
170여 점의 성보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생각건대 옛 성인이 이 산문을 열어 가람을 일으킨 
이래 많은 이들의 갸륵한 신심과 높은 원력이 오늘의 도량을 이루어왔다. 천년도 넘게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귀의처가 되어온 기림사는 다시 온 세상과 중생의 참된 행복을 위해 진리의 등불을 
끝없이 밝혀 나갈 것이다.

불기2550(2006)년 10월 일
철학박사 불이 이봉춘(不二 李逢春) 글 엮고 서예가 남령 최병익(南領 崔炳翼) 글 쓰다

* 창건설화

먼 옛날 범마라국 임정사에 오십 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과 숙명통 그리고 타심통을 
얻은 도인 광유성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전생의 부처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파사익 왕의 
세 시녀는 늘 꿀물과 우유로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 올렸다. 

제자들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공양하다가 
그만 공경이 사랑으로 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산 속으로 들어 가 버리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름답고 상냥한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으로서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내 이제 금생에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나와 숙세로부터 인연이 있는 이들을 누가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스님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오 장하구나, 너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니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의'수다라'라는 대국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그럼 한 명의 시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로 올 것이니라. 
수다라 왕국은 아직도 불법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세명을 한번에 모셔오기 어려울 테니
먼저 후궁인 월해부인을 인도토록 하여라"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500궁녀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산책을 즐기던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모습에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스님은 궁녀에게 스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나의 궁녀를 꼬이느냐? "
왕은 승렬 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는 인생의 참 진리가 무언지 알려주겠다며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스님의 몸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불개미는 스님의 몸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것을 본 왕은 크게 놀라면서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스님을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승열 스님은 1년간 궁중에 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다라 왕국의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승열 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차비를 하면서 월해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해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월해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물긷고 차를 다리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어느 날 광유스님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오도록했다.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하니 왕과 왕비는 물론 지난번에 귀의한 십여명의 제자와 
신도 및 백성들까지 영접하였다.
"월해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가 막힌 듯 슬피 탄식했다.
"오, 참으로 세상은 허망하군요.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식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그것은 일체를 소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아는 일이지요."

승열스님은 자상한 설법과 함께 왕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인 
원앙부인과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임정사로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난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부인 힘을 내구려. 나와 함께 도를 이루자고 하지 않았소."
"대왕이시여! 저는 전생에 숙업인 듯 하옵니다.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죽림국의 한 부자에게 만삭이 된 부인을 팔았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나으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아량이라 하여주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차 시봉을 하면서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원앙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으니 
바로 전생의 한 시녀이기도 하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공부하며 함께 지냈다.

수다라 왕이 도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이 안락국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곳을 찿아 가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으로 그곳에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다. 가서는 거북이가 물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거라. 
동해바다의 기운을 들여 마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돌산에는 
'옥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니 그 물을 먹으면서 수도하거라. 북쪽에는 설산을 닮은 돌 빛이 
흰 산이 있으니 그 산 굴 속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거라."

그리하여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워, 
이름을 칭하되 '임정사'라 하였다. 절이 창건된지 백오십년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기림사 카페에서 창건설화와 내용을 인용함-














기림사 연혁은 다음 관련 문헌에서 발췌한 것이다.

1. 기림사중창기(祇林寺重創記) 2.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3. 개간기림사사적(改刊祇林寺事蹟) 4. 현판기(懸板記) 5. 상량문(上梁文) 
6. 발원문(發願文)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創建). 절 이름을 임정사(林井寺)라 하였다.

광유성인은 인도 스님으로 우리나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스님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관련된 설화는 세종대왕이 지었다는 「월인천강지곡」의 내용과 같다. 

643년(선덕여왕 12년) 원효(元曉)스님이 중창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682년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서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아 궁으로 귀환하는 도중 기림사 서쪽에서 점심을 먹었던 기록과 용연폭포에서 
용을 날려 보낸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三國遺事 紀異 第二

萬波息笛

...<중략>...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중략>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祇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
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以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중략>

1258년 (고종 45년) 주지 각유(覺猷) 대선사에 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기림사 일주문 우측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 잠시 사진놀이로 쉬어 갈 수 있었다.








기림사로 오르는 길에 만난 시편들..














돌돌~ 도랑물소리 들으며 오르는 길


















천왕문
















범종루




기림사 진남루(祇林寺 鎭南樓, Jinnamnu Pavilion of Girimsa Temple)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기림사 진남루는 사적기(事蹟記)에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기능이나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 진남루라는 명칭은 남쪽, 즉 왜적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기림사가 승병과 의병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누(樓)라고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모양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전통칸(全通間)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용도가 달라지면서 창호가
바뀌어 원형을 알 수 없다.

鎭南樓 柱聯(진남루 주련)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기림사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祇林寺 大寂光殿 塑造毘盧舍那 三尊佛像)

보물 제958호, 경상북도 경주 양북면 호암리

기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으로 삼신불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불(釋迦佛)이 배치된 형식이다.

특히 복장유물(腹藏遺物)까지 나온 비로자나 불상은 머리가 큼직한 육계(肉髻)를 갖춘
나발(螺髮)이고 얼굴은 방형(方形)이며 세련되어 있다. 코는 큼직하고 눈은 반개(半開)
하였으며 귀를 알맞게 처리하여 조선시대 초기 불상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체는 장대하고 당당하지만 양감(量感)이 풍부하지 않아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장대한 상체에 비하여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는 폭은 무척 넓으나
높이가 낮은 편이다.

통견(通肩)한 법의(法衣)는 두터운 편이나 옷자락의 주름은 날카로운 편이다. 상의(裳衣)는
배 부위에서 띠로 묶어 상단(上端)의 깃을 주름잡히게 나타내었는데 이와같은 옷주름 처리법은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 불상에서 이미 보이는 것이다. 






응진전과 삼층석탑
















기림사 대적광전 앞뜰 한쪽 귀퉁이에서 만난 홍매화꽃송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고개떨군 꽃잎이 더 매혹적이다.














천수천안십일면관음전
(千手千眼十一面觀音殿 , 40개의 손과 눈에 25수를 곱하면 1000개가 된다)

좌.우 20개의 손과 손마다 눈이 하나씩 있어 40개의 손과 눈과 二十五有 思想(이십오유 사상)
즉 25가지 因果應報를 나타내며 40개의 손에는 "해, 달, 乾坤帶, 輪寶, 法螺(법라), 寶傘,
戟, 鐵, 劍, 바리, 연꽃, 여의주 등" 法器와 兵器, 寶石을 쥐고 있다.
















명부전(左)과 삼성각(右)




사찰뜰에 핀 샛노란 복수초꽃이 아기자기 예쁜 사랑이다.






기림사사찰에서 오르는 평평한 산길 15분 거리에 용연 폭포가 있다.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 호국 행차길(일명:왕의 길)로 오르면 용연폭포에 이른다.

"신문왕 호국 행차길"의 의미를 담은 이 길은 신라의 옛 궁성인 월성에서 출발하여
저 멀리 동해의 문무대왕릉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신문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문무대왕릉에 출타해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줄 
보물 옥대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아 돌아 오던 길, 왕의 행차길이었다.


기림사 사찰을 벗어나 신문왕 호국 행차길인 용연폭포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기림사와 용연폭포엔 관련되어
재밌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의 통일을 이뤄 낸 무무대왕은 나라 안으로 분열되고 혼란스런 정세와 밖으로는
당과 왜의 침입 위협에 처해 있었다. 왕은 '죽어서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항상 서원했고, 나라의 통합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애쓰셨다.
서기 681년 돌아가신 후 생전 뜻대로 유골은 감은사 앞 바다에 수장되었으니, 
지금의 '문무대왕릉'이다.

그 아들 신문왕이 곧 즉위하고 이듬해, 문무대왕릉 앞에 섬이 떠 오가는데, 그 위에
흑죽이 있어 낮에는 둘로 나눠지고 밤에는 합쳐진다는 신이한 보고를 받게 된다.
왕이 일관에서 점을 치게 하니, '동해의 용왕이 되신 문무대왕과 색계의 천신이 되신
김유신장군께서 신라를 위해 보물을 내리신다'는 점괘가 나왔다. 왕이 궁으로부터 
행차해 함월산을 넘어 감은사에서 참배하고 이견대에 서니, 그 앞에 섬이 멈춰 섰다.
건너가 용에게 옥대와 흑죽을 받았으니 후일 '만파식적' 이 되는 것이다.

환궁하는 길에 태자 이공(효소왕)이 마중 나와 기림사 서쪽 계곡에서 쉬었다. 왕자는
옥대의 장식이 살아있는 용이라 하며 그 중 하나를 떼어 물에 넣으니, 용으로 화하여
승천하였기에 '용연폭포' 라 이름했다.

안팎으로 혼란그럽던 나라의 통합과 안녕을 위해 평생을 매진하고, 돌아가셔도 식지
않았던 그 충정은, '만파식적' 과 '용연폭포'라는 이야기를 남기며 현재의 우리에게 
'호국' 과 '애민'을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한다.

이 '왕의 길' 은, 기림사로부터 산 너머 모차골까지 대부분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평이한 트레킹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기림사로부터 용연폭포까지는 약 1km 구간(15분)의 
평탄한 숲길이고, 이후 수렛재까지 약 2시간 정도를 완만하게 오르다가 이후 모차골까지 
천천히 내려가는 총 4km 정도 길이로 가족이 함께 걷기에 부담없는 길이다. *윗글 옮김

三國遺事 紀異 第二

萬波息笛

...<중략>...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중략>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祇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
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以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중략>

삼국유사 기이 제이 만파식적

<중략>
용이 가로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느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이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중략>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런 일이 있음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화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보십시요." 그리하여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내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다.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리게 되었다.<중략>

1258년 (고종 45년) 주지 각유(覺猷) 대선사에 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한
'용연폭포'

신문왕이 동해바다에서 얻은
만파식적과 검은 옥대를 가지고
궁으로 되돌아가던 길에
마중 나온 어린 태자(효소왕)가 예지를 발휘하여
옥대의 장식 하나를 떼어 계곡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폭포가 바로 용연폭포입니다.
용연폭포는 함월산에서 흘러내린 호암천이
불국사화강암 절벽에 걸려있는 폭포로
경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크기를 자랑합니다.






용연폭포 원없이 즐기고 발길 되돌려 기림사 경내로 하산이다.
소요시간은 15분정도로 멀지않은 거리이다.


살피지 못했던 기림사 경내를 여기저기 다시 둘러본다.














용무늬 괴석(龍文怪石?)이 삼천대불 앞뜰과 화정수앞에서 버티고 있다




유물 전시관


매월당 김시습 영당












매월당 김시습선생의 영정


이것으로 경주, 울산 여행기(1) - 경주 기림사를 마치며 
2편으로 경주 골굴사, 양남 주상절리로 모시겠습니다.

 
사진ㆍ글:찬란한빛/김영희


오늘도 건강한 하루,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추천1

댓글목록

메밀꽃산을님의 댓글

profile_image 메밀꽃산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찬란한빛님  이제서야 들어왔어요
사진의 설명이  너무 많아서 자세히 읽어 보고 답글 달려고 했으나
 우선  짧게 달어드립니다
 네  찍으신 저 아름다운  홍 매화꽃    전 홍매화가 아니고  정 매화 람니다
 해서 봄이면  누구나 다  한번찍  저의 이름을 본의 아니게 불러주어서 인지
 죽을 고비도 몇번을 겪고요
 이렇게 울님의 좋은 영상도 보고 즐겁네요
 그런데  아저씨 도  참 미남이세요
 사진속에  울 사장님은 뒷태도  예쁘시고  부인과 함께 여행 따라 다니는분이 몇 분이나 되겠어요
 넘 부럽습니다  아주 많이 행복하셔요
 오후 5 시4분에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존함도 너무 예쁘신 정매화님,
매화처럼 마음도 예쁘신 메밀꽃산을님의 정 넘치는 글귀에
저의 마음도 梅花化되는 듯, 감사한 마음 크옵니다.

남편과 한셋트로 나란히 움직이는 여행길이 참 든든하지요.
인생 후반부 서로의 건강을 챙겨주는 스포츠이기도 하고요.
제가 남편따라쟁이로 이런 행복을 누린답니다.
역사문외한이 남편따라 다니며 많이 유식해져있지요.ㅎ
모든 일정을 남편이 짜고 지칠줄 모르는 운전으로 오랜세월을
동행해 지금에 이르는데 그 노고에 제가 항상 고마워한답니다.

여행일정도 남편은 사학과 출신으로
대부분 문화재중심으로 일정을 잡아 다니면서
별도의 게시물을 만들어 동창카페, 학회등 여러곳에 올리곤 하지요.
저의 게시물에서 전문성이 보이는 내용들은 남편게시물에서 옮긴 글이랍니다.
오늘도 고운정성에 탄복하면서 건강을 빌어드립니다.

안박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찬란한빛`김영희* 記行作家님!!!
  3泊4日間이나  "慶州`蔚山"으로,歷史探訪을 다녀오셨군요..
"김영희"任과의 "光化門"만남으로,"산을"任도 들어오셨습니다`如..
  우리의 "詩마을"에서 맺은`因連은,아름답고 崇高하고  限이 없습니다..
"찬란한빛"作家님!作品에,感謝오며..後續編도,期待하고..늘,康`寧하세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경주를 지난번에 2박3일로 댕겨오고
못다 본 유적지가 있어 다시 다녀오게 되었어요.
특히나 코로나로 호텔숙박비 혜택 받을때 이용함이 좋을 듯해서
요 시기를 이용했습니다.
울산에서도 뷰가 끝내주는 태화강 강변 '리버사이드호텔'에 놀라운 비용으로
투숙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장면들이 생생히 되살아 나곤 합니다.
참 아름다운 울산태화강변 뷰와 긴 나뭇가지들을 물고 나르는
왜가리들의 모습들을 물리도록 보았지만 물리지가 않고 자꾸 보고 싶더군요.

리버사이드호텔은 울산에 있는 '반구대암각화' 국보를 보러갔다가
그곳 문화해설사님의 안내로 찾게 되어 이용하게 되었지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렇듯 귀인도 만나 기쁨을 주는데,
글쎄요. 다음날 태화강변 '태화루'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여간 반갑지 않았답니다.
커피까지 대접 받으며..
그 여자분이 연구원으로 지낸분으로 참 다부지고 맛깔스런 해설을 들려주었지요.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안박사님을 뵙습니다.
고맙고 반가움이 커서...
내내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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