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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서 100년 기다린 '침향'으로 지은 미륵, 문화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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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16회 작성일 23-04-0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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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 충무사 갯벌서 1700년 기다린 ‘침향’ , 불상 되어 ‘구원의 향’ 내뿜다[박경일기자의 여행] 문화일보 입력 2023-04-06 08:59 박경일 기자 완도의 섬 고금도의 절집 수효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침향 삼불’. 가운데 목불상이 주불인 미륵불이고 가까운 쪽이 약사불, 미륵불 뒤쪽이 아미타불이다. 1700년 전에 미륵을 기다리며 갯벌에 묻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불상이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미륵의 염원’ 잠들어 있던 전남 고금도 당나라에 침탈 당하던 신라인들 부처의 생환 바라며 ‘매향’거행 양식장 작업중 건진 거대 녹나무 수효사 시주받아 삼존불상 제작 향토유산 유형문화재 지정 앞둬 사실상 공식적으로 ‘침향’ 인정 이순신 사당 충무사 있는 고금도 지느러미같은 봉황산 암릉 눈길 조선 중죄인 유배지였던 신지도 서예 대가 이광사 쓴 현판 곳곳에 일제 강탈·양도 이어진 조약도 삼문산 망봉도 지나칠 수 없어 완도=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전남 완도의 고금도. 그 섬의 작은 절집 법당의 서늘한 마루에 앉아 1700년 전 미륵을 기다린 이들이 갯벌에 묻은 나무를 건져서 만든 불상과 마주 앉았습니다. 오래된 나무를 깎아 미륵불을 만들었지만, 미륵불의 재료는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민생이 도탄에 빠졌을 때 백성들이 나무와 함께 묻었던 ‘구원의 희망’이 불상의 진짜 재료입니다. ‘매향(埋香)’을 아시는지요. 고통 속에서 구원의 미래를 꿈꿨던 이들이 갯벌에 묻었다는 나무를 아시는지요. 천년이 지나 그 나무가 떠오르면 미륵이 나타나 모두를 구원해준다는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1700년 전의 간절한 소망이 불상으로 현현한 모습을 보러 완도에 갔습니다. 완도의 고금도에서 조약도로, 또 신지도로….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던 이야기를 따라 봄날의 섬을 건너다닌 이야기입니다. # 매향(埋香) 향기나는 나무를 묻다 백성들은 미륵(彌勒)을 기다렸다. 아니, 미륵을 기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진흙탕 같은 삶이었다. 통일신라 말에 그랬고, 고려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부패와 폭정,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굶어 죽는 이가 속출했다. 신라 때는 서남해안에서 당나라 해적들이 무역선을 노략질해 신라인을 노비로 팔았고 고려 말에는 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해 도륙을 일삼았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고통이 더해질수록 간절해지는 건 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이 지옥과 같은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백성들은 눈물을 훔치며 두 손을 모았다. ‘누군가 나타나서 이 길고 어두운 고통의 동굴에서 꺼내주기를….’ 그들이 기다렸던 건, 아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건 미륵이었다. 진도 울돌목 인근 갯벌에서 발견된 1700년 전의 녹나무 뿌리 부분. 불상을 만들고 남은 부분을 법당 앞에 전시해 놓았다. 미륵의 도래는 예정돼 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신라의 고승 원효의 계산법에 따르면 미륵은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7000만 년이 지나 도솔천을 건너 세상에 내려오기로 돼 있다. 미륵은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시간 저편에 있었다. 이 정도라면 ‘기다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 않았을까. 미륵의 도래는 그저 ‘안 오지는 않는다’는 선언일 따름 아닌가.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은 미륵의 이른 도래를 간절하게 빌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다 향나무를 묻고 천년이 지나 떠오른 나무를 쪼개 향으로 태우면 미륵이 세상에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침향의 연기를 타고 세상에 온 미륵은 세 번의 설법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원해 질병이나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데려다준다. 이렇게 미륵을 기다리며 향나무를 묻는 의식을 ‘매향(埋香)’이라 했고 천년이 지나서 떠오른 나무를 ‘침향(沈香)’이라 불렀다. 침향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향나무를 묻은 사실과 매향 의식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매향비(埋香碑)나 매향비명(埋香碑名)은 전국에서 열다섯 곳 남짓 확인됐지만 그들이 갯벌에 묻었다는 나무는 확인된 적이 없다. 매향비 외에는 다른 기록이나 단서가 전혀 없는 데다 그걸 찾아낸다는 게 별다른 실익이 없는 일이기도 했고 매립과 간척으로 강줄기와 해안선이 바뀐 것도 이유였으리라. 다만 40여 년 전쯤 전남 영광 입암리에서 촌로가 지하수를 파다가 향나무를 캐냈지만 그게 침향인지 모른 채 하룻밤 모깃불로 태워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할 따름이다. 그동안 침향이 발견되지 않은 건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무를 묻고 이미 천년이 지났는데도 미륵은 오지 않았으므로. 아직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실현되지 않은 구원의 전설로, 혹은 도래하지 않아 남겨진 희망으로 여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남해안의 갯벌에서 침향이 나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1700년 동안 펄 속에 묻혀 있었던. # 침향(沈香) 향기 묻은 나무를 꺼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일이다. 진도대교 서북쪽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서부해안도로를 끼고 있는 해안 갯벌. 전복양식장을 만들기 위해 해수관 설치 작업을 하던 해남사람 정용운(58) 씨는 수면 아래 펄 속에 묻혀 있던 거대한 나무를 굴착기와 중장비를 동원해서 힘들게 끌어올렸다. 굴착기 삽날에 끌려 나온 건 길이 9.6m, 둘레 5.4m의 아름드리 거목이었다. 끌어낸 나무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둥글게 몰려들었다. 다음은 정 씨의 회고담. “마을 노인들이 나무를 알고 있었어요. 늘 바닷물에 잠겨 있었는데 해마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전인 음력 4월 7일 사리 때면 어김없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군요. 그걸 잘라다가 말려 제사 때는 향 대용으로, 여름에는 모기향으로 썼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매향이나 침향이 뭔지 몰랐지만 갯벌에서 건져 올린 나무는 누가 보더라도 범상찮아 보였다. “4명이 힘을 합쳐 갯벌에서 나무를 끌어냈는데 처음에는 나무를 4등분으로 나눠 가져가서 식탁이나 탁자를 만들자고 했어요. 그러다 언뜻 불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머지 3명을 설득해 섭섭하지 않을 만큼 값을 치르고서 인연이 있던 절에 시주했습니다.” 정 씨는 나무를 보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2004년 사업 실패로 가장 힘들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어머니의 49재를 지내지 못했던 것이 가슴속에 한처럼 남아 있었다고 했다. 불상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 씨가 나무를 시주한 곳이 전남 완도의 섬 고금도의 작은 절집 ‘수효사’였다. 이번에는 수효사의 주지 성일 스님 이야기. 나무를 시주받기 전날 밤에 꾸었다는 신비체험 같은 스님의 꿈 이야기는 접어두고 ‘있었던 일’만 얘기하기로 하자. “나무를 마당에 부려놓았는데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희한한 향기가 진동하더군요.” 스님도 첫눈에 보통 나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매향이나 침향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때는 법신불(法身佛)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를 모시는 것보다는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내 안의 본성을 다듬어 부처가 되는 ‘자성불(自性佛)’에 더 관심이 많았지요.” 하지만 시주자가 불상을 만들자 했으니 뜻대로 불상으로 조성하려면 우선 나무를 말려야 했다. 스님은 절집 마당에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6년 동안 나무를 말렸다. 다 말린 나무를 전남 담양의 한 목불상 조각 장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불상을 만들던 장인이 ‘나무가 자꾸 뒤틀려서 완성하기 어렵다’며 제작 도중 포기했다. 성일 스님은 낙담했다. 불상 봉안을 위해 이미 법당까지 지어놓은 터였으니 도리없이 은행나무를 구해다가 그걸 깎아 삼존불을 조성해서 금칠해 대신 모셨다. 이런 와중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목조각장인 목아 박찬수와 연이 닿았다. 목조각장은 대번에 ‘매향으로 만들어진 침향인 것 같다’며 나무를 알아봤다. 그리고 자귀 칼만 써서 한칼, 한칼 정성스럽게 불상 조각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가 완도의 섬 고금도의 수효사가 갯벌에서 꺼낸 천년 넘은 나무로 조성한 미륵삼존불을 모시게 된 연유다. 고금도의 봉황산 정상은 물고기 지느러미 형상의 암릉이 펼쳐져 있다. 이 바위 한쪽 끝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있다. 사진 오른쪽에 구멍 안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 최초의 매향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갯벌에서 꺼낸 나무는 과연 진짜 침향일까. 맞을 것이란 단서가 더 많긴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단서 또한 있다.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이야기겠다. 갯벌에서 나무를 꺼낸 지 12년이나 됐는데도 말이다. 과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갯벌에서 나온 나무의 수종 분석 결과 향나무가 아닌 녹나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에 걸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1600∼1700년 전에 살았던 나무였다는 것이다. 녹나무는 향나무는 아니지만 강한 방향(芳香)이 있고 잘 썩지 않아 보존성이 좋다. 향료를 만드는 주재료인 ‘장뇌’를 얻기도 한다. 매향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얘기다. 나무에는 줄로 묶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상흔이 있었고, 묶은 줄을 고정하기 위해 박은 듯한 쇠말뚝도 있었다. 누군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옮겼을 것이라 추정하게 만드는 단서다. 이 큰 나무를 누군가 힘을 합쳐 옮겼고, 그것이 발견된 곳이 갯벌이었다면 매향 의식을 하며 묻었던 나무로 보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결론을 망설이게 하는 건 탄소연대 측정으로 나온 결과다. 문제는 측정에서 나무가 ‘너무 오래된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가장 오래된 매향 기록은 전남 영암의 ‘정원명 석비’다. 마모가 심해 비문이 온전히 판독되지 않았으나 연대는 786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연대 측정으로 확인한 녹나무의 생육 나이로 계산하면 정원명 석비보다 300년이 앞선다. 그때는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직후였으니 대중적인 매향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게다가 진도 녹진 일대는 백제도 아닌 마한 땅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만으로 매향이나 침향을 부인할 수도 없다. 백제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에 마한 땅 여러 곳에 초전 불교가 유입됐다는 학계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매향비가 발견된다면 모를까, 갯벌에서 끌어낸 나무가 침향인지 아닌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미 불상이 되고만 나무를 이제 와서 침향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진짜라는 걸 밝혀낸다 해도 침향이 떠올랐어도 미륵은 오지 않은 셈이니 구원의 꿈이 ‘헛된 것’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로 남는 게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 침향으로 지은 미륵, 문화재가 되다 그래도 어찌 됐든 수효사 삼존불상은 ‘수효사 침향 3불상’이란 이름으로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다. 이미 지난달 27일 완도군 심의위원회를 통과했으니, 보름 동안의 공고 기간을 거쳐 오는 10일 문화재 지정이 확정된다. 심사과정에서 삼존불상은 ‘불교의 매향 의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실증적 증거’라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건 수효사의 불상이 ‘매향 의식으로 묻은 침향으로 만든 것’임을 사실상 공식 인정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침향 불상은 수효사의 극락보전에 있다. 극락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툇마루에 놓인 유리로 짠 나무상자 모양의 진열대가 먼저 눈길을 붙잡았다. 그 안에 진도 갯벌에서 캐낸 침향의 밑동이 있다. 불상을 깎고 남은 부분이다. 파충류의 비늘처럼 거친 수피가 인상적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법당의 마루는 서늘했다. 법당 한가운데 연꽃 문양의 좌대에는 실눈을 뜨고 있는 푸른 눈썹의 미륵불이 있었다. 양옆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협시불로 거느리고 있다. 3구의 불상은 모두 침향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뜻밖이었던 건 나무는 늙었지만, 불상은 젊다는 것이었다. 나무로 깎은 불상에서는 맑고 신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상의 얼굴과 드러난 피부는 반들반들한 나뭇결 문양을 그대로 살렸고, 옷 부분은 나무를 거칠게 쪼아 삼베옷을 표현했다. 기대했던 건 천년 묵은 침향이 품고 있다는 진한 향기였다. 갯벌에서 꺼낸 지 십수 년이 지나긴 했어도 향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불상 앞으로 다가가도 나무 향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법당을 지키고 있던 보살은 “비가 오면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특히 비 오는 날 이른 아침에는 법당문을 열면 머리가 어찔어찔할 정도라고 했다. # 신지도, 약산도… 징검다리가 된 섬 고금도는 연륙교가 놓여 있어 차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행정구역은 완도지만 전남 강진에서 훨씬 더 가깝다. 강진 마량에서 760m 길이의 고금대교만 건너면 바로 고금도다. 고금도는 이웃 섬인 약산도, 신지도와 함께 강진과 완도 사이에 떠 있다. 이들 세 개 섬에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연도교가 놓여 있어 강진과 완도를 징검다리처럼 잇는다. 강진을 여행하다가도, 완도를 여행하다가도 가볍게 들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고금도와 약산도, 신지도는 이마를 맞대고 있는 지척의 섬이지만 풍경과 분위기, 그리고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풍경도 이야기도 다채로워서 이들 세 개 섬만으로 훌륭한 여행코스를 꾸릴 수 있을 정도다. 수효사 얘기로 시작했으니 먼저 고금도부터. 고금도에는 다른 곳에서는 여간하면 볼 수 없는 비범한 풍경이 있는 봉황산이 있다. 육지에서라면 존재감 하나 없을 해발 216m의 자그마한 산이지만, 고금도에서는 제법 위용을 자랑하는 산이다. 봉황산은 정상에 솟은 물고기 등지느러미처럼 생긴 기이한 암릉이 볼 만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암릉 한쪽에 뚫린 두 개의 바위 구멍이다. 큰 구멍은 직경이 2m 남짓이고, 작은 건 50㎝쯤 된다. 큰 구멍은 마치 문처럼 들어갈 수 있어서 납작한 암릉의 이쪽과 저쪽 면을 다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 충무사. 고금도에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본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다. 고금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 앞에는 월송대가 있는데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이 충남 아산의 선영으로 옮겨가기 전에 임시로 안장됐던 묫자리다. 최근 충무사 입구 쪽에는 ‘완도 이순신기념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순신 장군 탄생일인 오는 28일 개관할 예정인데 그 전에 관람객을 미리 받고 있다. 기념관에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에 있던 시절의 활약을 잘 정리해놓았다. # 신지도의 이광사, 조약도의 삼문산 이웃한 섬인 신지도는 조선 시대 중죄인의 유배지였다. 신지도에 유배된 대표적인 인물이 동국진체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이광사다. 해남 대흥사를 비롯해 구례 천은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등 남도의 내로라하는 절집마다 그가 쓴 현판이 없는 곳이 없다. 나주 벽서사건에 휘말려 유배된 이광사는, 모든 것을 잃고 이곳 신지도로 들어왔다가 죽어서야 섬을 나갈 수 있었다. 신지도에는 원교 이광사 문화거리가 있다. 문화거리는 기념 조형물과 신지중학교 담벼락을 따라 새겨놓은 이광사의 글씨와 작품, 이광사가 심었다는 소나무 원교목, 이광사가 머물렀다는 유배지 등으로 조성됐다. 한적한 섬마을의 골목을 봄볕 속에 느긋하게 걸으며 이광사의 이야기와 글씨를 따라가는 맛이 제법이다. 신지도와 이웃한 섬 조약도를 대표하는 명소는 삼문산이다. 삼문산 망봉과 토끼봉에서 보는 다도해의 풍경이 기가 막히지만, 조약도에서 정작 마음을 붙잡은 건 풍경보다 이야기였다. 남도 끝 외딴 섬인 조약도는 뜻밖에 대대로 조선 왕실 소유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백성을 사서 개간했다는 이유로 조약도 땅을 가졌고, 그걸 딸 정명 공주에게 주면서 소유는 대를 이었다. 이후 고종 때는 영친왕 수라상에 올리는 쌀을 대는 땅이 됐다. 작은 섬에서 수시로 왕실에 조세를 바쳐야 했을 테니 섬사람들의 삶이 어땠을지는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약도 사람들의 고초는 이어졌다.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보낸 일제는 조약도를 차지했다가 한일병합 후 고종을 달래기 위해 조약도를 왕실에 양도하고 이 섬에서 거둔 조세로 왕실 경비를 충당했다. 일제는 왕실 재정을 돕는다며 조약도를 숙명여전재단에 팔아넘기면서, 이번에는 주민들에게 ‘토지 경작을 계속하려면 땅값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주민이 반발하자 잡아다 두들겨 패고 주동자 10명을 옥에 가뒀다. 하는 수 없이 섬사람들은 땅값 3600냥을 거둬 주민대표 몇 사람이 한양까지 걸어가서 그 돈을 총독부에 냈다. 조약도 사람들은 그 돈을 들고 한양으로 향할 때, 돈을 내고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도 오지 않는 미륵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 조약도일까, 약산도일까 고금도를 딛고 들어서는 섬 조약도는 지명이 영 헷갈린다. 어떤 이는 조약도로 부르고, 다른 이는 약산도라 부른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건 섬의 진짜 이름은 ‘조약(助藥)’이라는 것. ‘약산(藥山)’은 1922년 개교한 조약도의 학교 이름이었단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학교 이름이 지역명을 대체했단다. 결국 ‘약산’은 조약도의 행정구역인 면(面)의 이름이 됐다. 고금도는 ‘고금면 고금도’, 신지도는 ‘신지면 신지도’인데 조약도는 ‘약산면 조약도’가 된 사연이다. 박경일 기자 문화일보 문화부 /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옮김:찬란한 빛/김영희 사진:여의도공원에서..3.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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