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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절개 현실판 춘향..사람으로 빛난 ‘천년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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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7회 작성일 23-06-2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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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절개 현실판 춘향·明황제도 칭송한 효자… 사람으로 빛난 ‘천년 홍주’ [박경일기자의 여행] 문화일보 입력 입력 2022-09-22 09:11 박경일 기자 일출 무렵에 백월산 정상에 올라 바라본 홍성읍 일대의 모습. 해발 400m에도 못 미치지만 장쾌한 전망을 자랑한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클 때는 아침 안개가 밀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길이 좁긴 하지만 백월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차를 타고 오를 수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사람 이야기 켜켜이 쌓인 충남 홍성 홍성 출신 관찰사 아들과 사랑 함흥 기생 난향의 10년 기다림 연인 죽음 알고 시묘살이 감동 황씨 문중서 300년 묘지 지켜 샘물로 병든 부모 봉양한 복한 우리나라 첫 ‘효자비’로 기록 도보여행 ‘내포 역사 인물길’ 8景엔 한용운·김좌진 生家도 홍성=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홍주’의 이름으로 당당했던 시절 충남 홍성의 옛 지명은 홍주(洪州)였다. 고려 현종 9년, 그러니까 1018년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 가까이 여기는 홍주였다. 전성기 시절의 홍주는 아산, 온양을 비롯해 차령산맥 이북 충청우도 지역을 모조리 거느렸다. 그때의 홍성은 평택에서 서천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10여 개 군·현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땅이 어찌나 넓었던지 그때는 그냥 홍주가 아니라 ‘대(大)홍주’라 불렸다. 홍주란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지금의 지명인 ‘홍성(洪城)’을 써넣은 건 일제강점기 때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홍주의 ‘홍(洪)’자에다 결성의 ‘성(城)’자를 합해 홍성이란 새로운 지명이 탄생했다. 일제는 홍주와 충남 공주(公州)의 일본어 발음이 둘 다 ‘고우슈우’로 같아 행정적 불편을 초래한다는 개명의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진짜 이유는, 이 지역의 지명도를 낮추려는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다. 뿌리 깊은 항일정신과 활발한 의병 활동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던 이 지역의 땅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지명도를 낮추려 했다는 것이다. 홍성은 ‘홍주’란 옛 지명을 되찾고 싶어 한다. 내포신도시로 충남도청이 이전해 홍성이 사실상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이런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홍주 지명을 되찾는다는 건 한때 ‘내포(內浦·내륙의 포구) 지방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번영을 이뤘던 홍주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땅 이름이야말로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이니까. 그렇지만 지명을 바꾸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1000년 홍주의 역사와 영광도 있지만, 100년 홍성의 실재(實在)도 엄연하니 말이다. 바꾸는 게 옳은 건지, 바꾸지 않는 게 맞는 건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홍성을 말하면서 서두에 이 이야기부터 꺼내놓는 건, 홍성이 ‘만만찮은 내력을 가진 땅’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홍성을 그저 그런 지방의 중소도시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홍성은 충청의 중심이자 내포의 중심이었다. 그 증거가 홍성의 한복판, 홍주읍성의 자취에 있다. 홍주읍성에는 서른다섯 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홍주읍성 안이 ‘행정타운’이었던 셈이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군청의 대문 격인 홍주아문과 집무실 안회당, 연못가의 작은 정자 여하정이 전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홍주가 가진 당시의 위세와 그윽한 정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특히 읍성에 조명이 켜지는 밤 시간이라면 더 그렇다. 홍성이라면 ‘남당항의 대하구이’부터 떠올릴 일이 아니란 얘기다. # 홍성의 자존심은 ‘인물’에서 나온다 홍성의 정체성도, 홍성 사람들의 자존감도 ‘사람’에게서 나온다. 홍성에는 수많은 위인이 났다. 고려 말 홍건 적과 왜구를 격퇴한 최영 장군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이 여기 홍성 사람이다. 호락논쟁에서 호서 지역 학자들의 학설인 호론을 이끌었던 남당 한원진도 홍성 서부면 출신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시작되면서 홍주 지역에서는 의병항쟁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출현했다. 독립운동가를 지역별로 보면 충남 출신 숫자가 압도적인데, 충남에서도 여기 홍성이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과 백야 김좌진이다. 벼슬을 버리고 의병이 돼 두 번의 투옥과 고문에도 죽을 때까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지산 김복한도 홍성읍 출신이다. 홍성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이 인물이라는 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홍성군을 비롯해 서산시와 당진시, 예산군 등 가야산 주변 4개 시군에는 320㎞의 장거리 도보 여행 길 ‘내포문화숲길’이 있다. 내포문화숲길은 모두 5개 코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홍성 땅을 걷는 코스가 ‘내포 역사 인물길’이다. 홍성 땅에서는 걷는 길까지도 인물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웬만한 지역이라면 다 있는 ‘8경(景)’이 홍성에도 있다. 8경은 대개 빼어난 자연경관에다 붙이는 법인데, ‘홍성 8경’은 다르다. 8경 중 제3경이 ‘만해 한용운 생가’이고, 제7경이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다. 8경의 여덟 개 타이틀 중 두 개를 독립운동가에게 걸어줬다. 그만큼 자기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얘기다. 홍성의 이름난 위인들의 이야기는 더 보태지 않아도 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설사 잘 모른대도 생가를 찾거나 기념관을 찾아가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홍성 어디에서든지 도로 이정표에는 한용운과 김좌진의 이름이 있고, 이정표를 따라가면 영웅담을 만날 수 있다. 홍성이라면 당연히 다뤄야 할 위인들의 이야기를 구태여 여기서 따로 하지 않기로 한 이유다. 대신 홍성에서 주목한 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홍주 사람들의 얘기다. 대의에 바친 위인들의 삶에다 대면 어쩌면 사소한 이야기지만, 저마다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놓고 누가 감히 무겁다, 가볍다 할 수 있을까. 주목받지 못해서 더 애처롭고, 더 뜨겁고, 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다. 함흥 기생의 묘.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기생의 처연한 주검이 이곳에 묻혔다. # 함흥 기생의 묘가 왜 여기 있을까 홍성 홍동면 원천리 중원마을에 ‘열녀 난향의 묘’가 있다. 지도와 주소를 받아들고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후미진 마을 안쪽의 가느다란 길 끝 언덕 위에 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을 붙잡고 묻고 또 물어가며 묘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마을 이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중원마을 황선용(82) 이장은 스물두 살 때부터 여든두 살이 된 지금까지 이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60년째 이장’이라니 이만저만한 장기 집권이 아니다. 이쯤이면 ‘기네스 기록’이 아닐까. 마을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하는 황 이장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서 난향의 묘로 안내했다. 난향의 묘는 비석은 번듯한데, 봉분은 반쯤 허물어졌다. 황 이장은 “며칠 전 무덤가에 무성한 풀을 베서, 지금은 그나마 보아줄 만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냥 이대로 둔다면 산소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무너진 봉분을 바라보던 황 이장이 한숨을 쉬었다. “묘 관리를 도와 달라고 홍성군에 부탁했는데 ‘후손이 관리하라’고만 하니 방법이 없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무연고 묘지를 우리 문중에서 300여 년을 관리해 온 것인데. 제 조상도 납골묘에 모시는 시대에 남의 산소를 더 어찌해 볼 수가 없어서….” 여기 묻힌 ‘난향’은 누구일까. 비석에는 난향(蘭香)이라 잘못 적었지만, 본래 이름은 ‘만향(晩香)’이다. 만향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쯤의 함흥 기생이었다. 함흥의 기생이 무슨 연유로 멀고 먼 충청 땅에 와서 묻혔을까. 기생의 이름 앞에 ‘열녀’란 칭호를 붙여준 연유는 또 무엇일까. 비석 뒷면에 새긴 글과 조선 영조 때 발간한 ‘여지도서’, 그리고 1926년에 발간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 (朝鮮解語花史)’의 내용을 간추려보자.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 출신 벼슬아치 황흠이 함경도 관찰사가 돼서 함경도에 부임했는데, 함흥의 기생 만향은, 관찰사 황흠의 아들 황규하와 사랑에 빠졌다. ‘열녀는 평양 기생으로 황규하의 애인이었다…’로 시작하는 비석의 비문은 한 기생의 처연한 사랑 이야기로 이어진다. # 비극으로 치달은 사랑 이야기 함흥에 관찰사로 간 지 1년 만에 아버지 황흠이 한양의 내직으로 발령이 나면서, 만향은 황규하와 이별한다. 함흥에 홀로 떨어진 만향은 정절을 지키며 애인 황규하를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이 도령을 기다리던 ‘춘향전’ 의 춘향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만향의 스토리는 춘향전과는 달리 배신과 비극의 결말로 치닫는다. 한양으로 간 황규하는 무심했다.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만향을 잊은 황규하는 한양에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도 나갔고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만향은 정절을 지키며 이제나저제나 애인을 기다렸다. 기별 없는 애인을 기다리는 일은 고통이었다. 절망한 만향이 집 앞 우물에 투신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일까지 있었다. 헤어진 지 10년째 되던 해에 만향은, 애인 황규하를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한양에 도착하고 보니 황규하는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 홍주로 낙향한 후였다. 만향은 한양에서 또다시 수백 리 길을 걸어 홍주의 중원마을까지 찾아왔는데, 황규하는 그만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제야 황규하가 결혼까지 하고 아들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배신감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법도 하건만, 만향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연을 이야기하고 황규하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는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 춘향전의 현실적 결말은 이렇지 않았을까 시묘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만향은 무덤 앞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마을 사람들은 만향이 저승에서라도 오매불망하던 애인 옆에 머물라며 황규하 묘 옆에 무덤을 만들어줬다. 죽은 뒤에야 만향은 비로소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황규하의 아들이 장성해 아버지의 산소를 용인으로 이장하면서 만향의 묘를 두고 간 것이었다. 황규하의 묘를 이장하던 날, 만향의 산소에서 무지개가 떠오르며 상여 행렬을 따라갔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만향의 묘가 있는 봉긋한 언덕을 ‘무지개 말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연고 없는 곳으로 와서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난 만향의 묘는, 황규하의 문중에서 관리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가문의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천한 신분의 기생이지만, ‘열녀’라는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한식날에 제사를 올리며 가엾은 죽음을 위로했다. 그렇게 만향의 묘를 지켜온 게 300년이다. 그사이에 황규하의 직계는 대가 끊어졌고, 방계 후손들이 묘를 돌봐왔는데 이제는 힘에 부친다. 무심한 애인의 변심에도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믿었던 기생의 처연한 죽음과 애인의 후손이 그 기생을 300년 동안 기리며 묘를 돌봐온 사연이 뭉클하다. ‘춘향전’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통상적인 결말은, 어사 출두의 해피 엔딩이 아니라 이런 비극이 아니었을까. 만향의 묘 앞에서 뒤늦게 ‘술 한 병이라도 챙겨가야 했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비인 복한효자비. # 비석에 새겨진 따스한 효행과 서슬 퍼런 시(詩) 열녀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효자 이야기. 홍성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비가 있다. 효(孝)의 개념은 이전부터 있어 왔겠지만, 효가 충(忠)과 함께 통치 이데올로기로 사회 전반에 퍼져나간 건 조선 초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우면서부터였다.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 안쪽에 세조 4년, 그러니까 1458년에 세운 ‘복한효자비’가 있다. 지금으로 치면 특수부 검사쯤 되는 벼슬인 사헌부 장령을 지낸 복한이란 이의 효의 행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부모를 모시기 위해 미련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부친이 병이 나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동네의 샘에 가서 물을 떠서 약을 달였다. 샘까지 거리가 멀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집 앞에서 물이 솟았다. 그걸 두고 마을 사람들은 복한의 효성이 지극해 샘물이 솟아올랐다고 해서 ‘효자샘’이라 불렀다. 하루는 어머니가 병이 나서 ‘모쟁이(숭어의 새끼)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구할 길이 없어 기도를 하다 꿈속에 나타난 노인에게서 ‘효자샘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가보니 샘에 모쟁이가 있어 푹 고아 어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단다. 조정에서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첩을 내렸고, 이런 효행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지면서 명나라 황제의 칭송이 담긴 국서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명나라 황제가 여러 곳에서 올라온 효자첩을 물에 넣었는데, 그중에서 유독 복한의 효자첩만 젖지 않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뒷얘기도 있다. 복한의 생가와 모쟁이 샘은 1992년 홍주향토문화연구회가 찾아냈는데 효자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형 양계장인 신곡농장 문 안쪽의 논둑 아래에 있다.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홍주 출신의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홍주성 외벽을 빙 둘러서 성삼문, 최영, 한용운, 김좌진 등 지역의 위인들의 동상과 비석을 세워두었는데, 거기에 뜻밖에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스승인 손곡 이달의 시비(詩碑)가 있다. 강원 원주의 손곡에 묻혀 살았던 이달의 고향이 바로 홍성이다. 서출 출신이라 과거를 볼 수 없어 그는 평생을 은거하며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여느 시와는 다르다. 서릿발처럼 매섭고 번득인다.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읽어보자. 시의 제목은‘보리 베는 노래(刈麥謠·예맥요)’다. 시골집 젊은 아낙이 저녁거리가 없어서(田家少婦無夜食)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수풀을 지나 돌아오네(雨中刈麥林中歸) 생나무 가지는 습기 머금어 불도 붙지 않고(生薪帶濕煙不起) 문에 들어서니 어린아이들은 옷을 끌며 우는구나(入門兒子啼牽衣). 산수와 자연을 노래한 선비들의 음풍농월의 시와는 차원이 아예 다르다. 이 시를 두고 제자 허균은 “먹을 것이 없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렸다”고 평했다. 참혹한 가난의 풍경과 속수무책의 비극을 담담하게 그려내서 더 측은하다. 읍내·천수만 내려다 보는 백월산 정상아래까지 車로 편하게 올라 일출무렵 안개낀 내포평야 일품 기암으로 이뤄진 용봉산도 명소 남당항서 배로 10분 거리 죽도 어른 키 넘는 신우대 군락 가득 안회당·여하정 품은 홍주읍성 충청 內浦의 중심 위세 느껴져 홍성 용봉산 노적봉의 암릉 구간. 뾰족뾰족한 기암들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 바쁘게 돌아보는 홍성의 명소들 이번에는 경관에 대한 이야기. 홍성에는 용봉산(381m)이 있다. 불과 해발 400m에도 못 미치는 산인데도 ‘용(龍)’과 ‘봉(鳳)’, 둘을 다 이름으로 가졌다. 산행 안내도에는 산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산세가 운무 사이를 휘도는 용의 형상과 달빛을 길어 올리는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봉산이라 부른다.” 작은 산임에도 이게 그다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산 정상부에 펼쳐지는 왕관 같은 기암들 때문이다. 악귀봉 일대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는 성주 가야산의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산세의 비범함은 용봉산에 비할 수 없지만, 홍성의 주산(主山)은 백월산이다. ‘홍성 군민의 노래’가 ‘백월산 상봉의 정기를 받아…’로 시작하는 것이나 ‘홍성의 노래’에서 “아침에 뜨는 해는 조양문으로 들어오고, 저녁에 뜨는 달은 (백)월산에 안기네…’라는 가사를 보면 백월산이 주산이라는 사실이 명확하다. 백월산은 홍성의 주산이란 지위답게 홍성읍 일대를 내려다보는 시야의 한가운데 솟아 있다. 정상은 드넓은 홍성읍과 천수만 일대의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자리다. 용봉산보다 높긴 하지만, 백월산의 높이는 394m로 해발 400m를 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그렇지만 백월산 정상의 풍경은 해발 높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쾌하다. 백월산은 정상의 바로 아래까지 도로가 나 있어 차로 오를 수 있다. 교행이 불가능한 길이라 오르내릴 때 각별하게 주의해야 하지만,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차에서 내려 산정을 밟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이즈음 일출 무렵에 백월산에 오르면 발밑으로 안개가 넘실거리는 광경을 만날 수 있다. 내포 평야 일대를 안개가 휘감고 있는 모습이 자못 감동적이다. 용봉산에 천년고찰 용봉사와 미륵불, 마애여래입상이 있다면 백월산 정상에는 ‘홍가신 사당’이 있다. 조선 시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주목사 홍가신을 비롯한 다섯 명의 공신과 함께 백월산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던 홍가신이 홍주를 떠난 뒤 홍주에 질병이 돌고 괴변이 잇따르자 백월산에 홍가신의 목상을 세우고 제를 지낸 것이 사당의 기원이다. 사당에는 지금도 나무로 깎은 홍가신을 비롯한 청난공신과 백월산신의 목상이 있다. 홍성 남당항에서 배로 10분이면 닿는 죽도 전경. 홍성에 간다면 꼭 가보라고 소매를 끌어 권할 만한 곳이 홍성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인 죽도다. 천수만에 자리 잡은 죽도는 봉긋봉긋한 부속 섬이 본섬과 하나로 이어진 자그마한 섬으로, 죽도란 이름처럼 섬 전체에 어른 키의 두 배쯤은 될 법한 신우대 군락으로 가득하다. 대하축제로 흥청거리는 남당항에서 죽도까지는 자그마한 여객선으로 10분 거리. 봉긋한 언덕마다 세워놓은 전망대를 겨눠 걸으면 되니 이곳에서는 지도나 표지판 없이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새소리와 파도 소리, 댓잎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의 합주 속에서 걷는 맛이 훌륭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 홍성의 순교지 1791년 신해박해 때 충청 지역 첫 순교자가 나온 홍성에서는 모두 212명이 순교했다. 서산 해미 다음으로 순교자가 많았다. 홍주읍성 안에 신앙증거터, 순교터, 참수터가 있고, 성 밖에도 생매장터 등 6개의 순교지가 있다. ‘내포천주교순례길’ 5코스를 따라 걸으면 홍주읍성을 중심으로 당시 참혹했던 박해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 박경일 기자 문화일보 문화부 / 전임기자 글 사진: 문화일보 트래블에서 옮김 옮긴이: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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