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잘쓰는 방법 어떻게 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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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선님의 댓글

시를 잘 쓰는 방법..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한 목숨 걸고 죽기 살기로 쓰는 거 이외엔
지름길은 없습니다
굳이, 한 말씀 드리자면
시를 잘 쓰는 법에 그 무슨 정도 (定道, 正道)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억지, 권해 본다면..
삼다 三多를 권해 봅니다
즉, 많이 생각(사유 思惟)하고 - 多思
많이 읽고 - 多讀
많이 써 보기 - 多作 (물론, 習作이겠습니다)
안희선님의 댓글

버섯 시인님이 whgdk12님께 드린 조언과 관련하여 한 말씀..
(그렇다고 해서 아래 제 댓글이 버섯 시인님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다만, 스승 (선생님) 말씀을 하셔서 제 나름의 한 추억을 더듬어 본다는 - 그러니까, 그냥 넋두리)
시에 있어 제 스승이라면, 저 같은 함량 미달의 물건을 95년도에 <詩와 意識 : 現 문예한국>을 통해
문단에 추천해 주신 故 김경린 金璟麟시인님밖엔 없습니다
실상, 스승님과 전 사이가 아주 안 좋았지만요 (스승이 주창했던 케묵은? 모더니즘과의 격심한 견해 차라 할까 - 웃음)
아무튼 저란 인간은 스승님이 바라는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을 걸어온,
정말 싸가지 없는 아주 나쁜 제자란 생각입니다
스승님도 그런 저를 두고, " 넌 그 타령조 때문에 좋은 시인이 되기는 애초에 글렀어"라고 하셨죠
어쨌거나, 그런 저런 이유로 저는 이때껏 시라는 깜깜한 밀림 속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여, 어떤 면에선 이때껏 시를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래의 요건 버섯 시인님께 드리는 말씀)
버섯시인님은 시에 관한 한.. 나름의 한 예지 叡智가 있으신듯 합니다
앞으로, 게시판에서 시인님의 좋은 시를 감상하면 합니다
이제 곧 추석인데요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안희선님의 댓글

<위 댓글에 연결지어, 제 은사 시인님에 관한 회고에 따른 사족>
스승님이 작고하셨을 때는 매우 슬프더군요
(그때는 제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남의 땅에 있었는지라, 스승의 영전에 문상도 못한 죄송함이 있습니다)
- 저 같은 박절한 인간쪼가리도 그런 아픈 심회 心懷가 들더군요
스승님의 말이 나온 김에..
스승님의 발자취를 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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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린(1918.4.24∼2006.3.31)은 함경북도 종성(鐘城)에서 태어나, 5세에서 8세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초등학교까지는 고향에서 성장했지만 중학교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학 때부터 당시 시작한 시 잡지『맥(貘)』 동인들과 만나 습작을 시작하여, 조연현 등과의 『詩林』동인에도 가담했다.
1939년 조선일보의 학생시단에 투고하여 「偶吟三題」(「車窓」「꽁초」「晝眠」)이 당선되어 선후평(4월 17일)까지 받았다. 이것이 모더니스트 시인의 첫 출발이었다.
1940년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부속 고등공학교(高等工學校) 토목과(야간)에 입학, 1942년에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원래 3년제인 것을 앞당겨서 졸업했다.
그 동안에 기타조노 카쓰에(北園 克衛)가 결성한 VOU클럽에 가입하여, 기관지 『VOU』를 개칭한 『신기술(新技術)』에 시 8편, 평론 2편, 또 『문예법론(文藝汎論)』에 시 1편, 『납인형(蠟人形)』에 시 1편을 발표했다. 그 동안 한국에서 폐간되었던 『맥』을 일본에서 재간하려고 인쇄하던 중 도쿄의 첫 폭격(1942. 4. 18)으로 인해, 원고마저 소실되었다.
해방 후 “비록 모더니즘의 시라도 일본말로 시를 썼다는 자책감 때문에 근신하는 자세로 글 쓰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7년 가을, 뜻밖에 박인환이 찾아와서 모더니즘 운동을 제안해 왔다. 뒤이어 김수영, 양병식 등을 알게 되면서 모더니즘 운동을 다시 하게 되었다. 우선 동인 ‘신시론’을 결성하고 동인지 발간을 구상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과거 “李箱은 다이나미즘을 김기림, 김관균, 장만영 등은 의식적인 바탕을 자연주의적 요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지적 언어의 감각으로 시도한 이미지즘적이었던 것에 반하여, 우리들은 20세기의 특질인 과학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도시집중화에서 오는 불안의식을 모티브로 하면서 방법론으로는 이미지즘을 발전시킨 「포티시즘」4)에 이론 근거를 두었다” 한다. 기관지 『신시론』1집은 1948년 4월, 장만영이 경영하던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에서 출간됐다. 창간호에는 김경린의 「현대시의 구상성」, 박인환의「사르트르의 실존주의」등 동인들의 시와 시론이 실려 있다고 하나, 『신시론』제1집은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한다. 1949년 4월『신시론』제2집 격으로 낸 것이 시화집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이다.
6·25가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 간 김경린은 거기서 박인환, 김규동, 이봉래, 조향, 박태진 등 소위 「後半期」동인들과 다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특집’ 이 발표된 이후 모임이 와해되었고, 환도 후에는 박태진, 김원래, 이활, 이영일 등과 「DIAL」이란 이름의 동인을 결성하고, 합동시집 『현대의 온도』(1957. 2)을 발간하였고, 김수영, 김규동, 김훈수 등과의 9인 합동시집『평화에의 증언』(1959. 12)을 냈다. 기타 많은 시론을 각 紙誌에 발표하기도 했다.
1957년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을 복구하는 데 과학적인 기술 도입의 필요로 정부에서는 당시 건설부 직원이었던 김경림을 선진기술 습득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했다. 미국 체재기간 동안 건설 기술 공부와 함께 일본유학시절부터 사숙했던 에즈라 파운드를 찾아갔다. 그는 그 때 워싱턴에 있는 성· 엘리자벳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파운드는 제2차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편을 들었다는 죄로 1945년 미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함께 체포되어, 피사의 수용소를 거쳐 워싱턴에 보내졌다. 정신감정 결과, 재판에 견디지 못한다고 판정을 받아 정신병이란 병명으로 입원을 시켰다고 한다. 그 후에 엘리어트나 프로스트 등 후학들의 진정서로 자유의 몸이 되어 석방되었는데, 이탈리아에 귀국한 것은 1958년이었다. 김경린은 파운드에 의해 미국 현대시인 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기관지 『poetry』도 구독하게 되어 본격적인 모더니즘 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귀국 후 간간히 시와 시론을 발표하다가 1960년 말부터 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공백기간을 두고 모더니즘 선상에서 새로이 일고 있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여, 시소설, 대화시, 산문시 등을 창작하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의 저서로는 앞에 언급한 여러 앤솔로지 이외에, 『韓國詩人全集』수록 金璟麟詩集(1980),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1985) , 『서울은 야생마처럼 』(1987), 『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1988),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1994), 그리고 『한국모더니즘 운동 대표동인시선』(1994), 『알기 쉬운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1994) 등의 저서가 있다. 김경린은 시 「차창」(1939)을 발표한 이래 20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가까이를 오로지 모더니즘 운동에 평생을 걸었던 시인이었다.
......... 새삼 저에게 엄격하기만 했던, 차갑게만 느껴졌던, 스승님이 오늘 따라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눈물)
흰망태버섯님의 댓글

등단 시인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단을 하신 시인님께서 이렇게 글을 올리시는 모습은 신선해 보입니다. 이런 경우는 드믑니다. 처음 보았습니다. 시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라면, 김경린 시인님께서도 매우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미지즘에 대해서 공부한 것은 부산에서였습니다. 부산 초읍에 시립도서관을 지었는데요, 창고 열람실에 일본 서적을 번역한 낡은 책 한 권밖에 없었습니다. 모더니즘 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파장은 적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미지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이미지에 대한 글만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하나의 문예 사조에 너무 빠져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씀을 문우님들 앞에서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배를 탔습니다. 사실은 죽으려고 탔습니다. 하룻밤에 세 번씩 꿈속에서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하루에 일만 번씩 어머니를 부르면서, 저는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5년이 지나고 나서 저는 이름도 잊어버린 폐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다시 육지에서 생활을 하면서 시집을 사서 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다리가 떨려서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시가 판박이처럼 산문화 되어있었습니다. 이미지가 시의 전부인 것으로만 알고 있던 저로서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당시의 인터넷에서는 많은 정보가 없었습니다.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이미지즘에 반발하여 나타난 시 운동'이라는 글이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모더니즘에 대해서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시인님들께서는 어떤 문예사조나 시론을 말씀하실 때, 아주 쉽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시인님들께서 지나온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읽어보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조금씩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간이 흐르면 이해가 되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내용은 제가 글공부를 했던 모습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성인용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성인 시를 쓰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커다란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동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동시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시인님께서 신분을 밝히셨으니까 저도 이름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만,
내 놓을 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이름 하나 달랑 말씀드리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늘이 하루 종일 먹먹하더니 소나기가 내리려고 합니다. 빨래 걷으러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을 올립니다.^^
안희선님의 댓글의 댓글

기어이 오해하실 줄 알았다는 (웃음)
버섯 시인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 그냥, 제 넋두리에 불과할 뿐
또, 제가 그럴 자격도 없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