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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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을 뒤늦게 DVD로 보았다 - 영화, 한번 빨리도 본다
영화를 본 소감은 완전 실망
최민식의 오버된 연기도 눈에 거슬리고..
이 시대에서 영화가 장군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 (감독의 자질, 역량 탓?)
영화에서 조선 수군은 초라한데, 일본군은 왜 그리 멋지게 만들어 놓은 건지 알 수 없다는..
장군의 일기를 보니, 장군은 무척 병약했던 거 같다
그런 몸으로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했다
친일파 자손들이 분탕질을 치는 지금 같은 난세에 충무공 같은 분이 계셨더라면..
영화를 본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아서, 난중일기를 읽어본다
임진년 1월 (1592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13일]<임술>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가지 물건을 바치러 가지고 왔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4일]<계해> 맑다. 나라의 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김인보(金仁甫)와 함께 이야기했다. 1월 초3일 [양력 2월 15일]<갑자> 맑다. 동헌(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뒷쪽)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월 초4일 [양력 2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5일 [양력 2월 17일]<병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6일 [양력 2월 18일]<정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7일 [양력 2월 19일]<무진> 아침에는 맑았다. 늦게부터 비와 눈이 번갈아 종일 내렸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남원에서 전문(箋文: 임금께 바칠 일종의 글월)을 받들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월 초8일 [양력 2월 20일]<기사> 맑다. 객사에 나갔다가 동헌에서 공무를 봤다. 1월 초9일 [양력 2월 21일]<경오> 맑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다음, 동헌에 나가 전문을 봉하여 올려 보냈다. 1월 초10일 [양력 2월 22일]<신미> 종일 비가 내렸다. 방답(전남 여천군 돌산면)에 새 첨사로 이순신(李純信)이 부임하여 들어왔다. 1월 11일 [양력 2월 23일]<임신>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봉수(李鳳壽)가 선생원(전남 여천군 율촌면 성생원)에 돌 뜨는 곳을 가 보고 와서 보고하기를 "이미 큰 돌 열일곱 덩이에 구멍을 뚫었다."고 했다. 서문 밖 해자(성 주위를 파서 물을 채운 곳)가 네 발쯤 무너졌다. 심사립(沈士立)과 이야기했다. 1월 12일 [양력 2월 24일]<계유> 궂은 비가 개이지 않다. 식사한 뒤에 객사 동헌에 나갔다. 본영 및 각 포구의 진무들에게 우등을 가리는 활쏘기를 시합했다. 1월 13일 [양력 2월 25일]<갑술> 아침에 흐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14일 [양력 2월 26일]<을해>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1월 15일 [양력 2월 27일]<병자>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1월 16일 [양력 2월 28일]<정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와 색리(고을의 아전) 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지방 병마사영이나 수영에 첨사아래에 있는 무관)·가수(假守: 임시 직원)도 역시 점검하지 않아 이 지경에까지 된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공무를 어줍짢게 여기고, 제 몸만 살찌러 들며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 날의 일을 알만하다. 성밑에 사는 박몽세(朴夢世)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1월 17일 [양력 2월 29일]<무인> 맑다. 춥기가 한 겨울 같다. 아침에 순찰사와 남원의 반자(아전의 별칭)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녁에 쇠사슬 박을 구멍낸 돌을 실어오는 일로 배 네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김효성(金孝誠)이 거느리고 갔다. 1월 18일 [양력 3월 1일]<기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의 제1호선이 돌아갔다. 우등계문(優等啓聞)과 대가단자(代價單子)를 순찰사 영(營)으로 봉하여 보냈다. 1월 19일 [양력 3월 2일]<경진>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뒤 각 군대를 점검했다. 1월 20일 [양력 3월 3일]<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21일 [양력 3월 4일]<임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감목관(목장의 감독관)이 와서 잤다. 1월 22일 [양력 3월 5일]<계미> 맑다. 아침에 광양현감(魚泳潭)이 와서 인사했다. 1월 23일 [양력 3월 6일]<갑신> 맑다. 둘째 형 요신(堯臣)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사복시(司僕寺)에서 받아와 기르던 말을 올려 보냈다. 1월 24일 [양력 3월 7일]<을유> 맑다. 맏형 희신(羲臣)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답장을 보니, 고부군수 이숭고(李崇古)를 유임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린 것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1월 25일 [양력 3월 8일]<병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를 쏘았다. 1월 26일 [양력 3월 9일]<정해>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흥양현감(裵興立)과 순천부사(權俊)이 와서 이야기했다. 1월 27일 [양력 3월 10일]<무자> 맑다. 오후에 광양현감이 왔다. 1월 28일 [양력 3월 11일]<기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29일 [양력 3월 12일]<경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30일 [양력 3월 13일]<신묘>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첫여름 같이 따뜻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임진년 2월 (1592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4일]<임진>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가랑비가 잠간 뿌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선창(여수시 연등동 입구)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방천안에 몽어 떼가 밀려 들어 왔기로, 그물을 쳐서 이천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쾌했다. 그 길로 전선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우후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새 봄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2월 초2일 [양력 3월 15일]<계사>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봤다. 쇠사슬을 건너매는 데 필요한 크고 작은돌 여든 여 개를 실어 왔다. 활 열순을 쏘았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6일]<갑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하는 일로 배타고 나갔다. 공무를 마친 뒤 활을 쏘았다. 탐라 사람이 자녀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나와 금오도(여천군 남면)에 머물다가 방답 경비선에 잡혔다고 심부름꾼을 보냈기로 문초를 하고서 승평(순천)으로 압송하고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에 화대석 네 개를 실어 올렸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7일]<을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북쪽 봉우리의 연대(신호대)쌓는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무너질 염려가 없으매 이봉수(李鳳壽)의 애썼음을 알겠다. 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에야 내려와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2월 초5일 [양력 3월 18일]<병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열여덟 순을 쏘았다. 2월 초6일 [양력 3월 19일]<정유> 종일 바람이 세게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에게서 편지가 두 번이나 왔다. 2월 초7일 [양력 3월 20일]<무술> 맑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발포만호가 부임했다는 공문이 왔다. 2월 초8일 [양력 3월 21일]<기해>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 날 거북함에 쓸 돛베 스무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 방답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매우 칭찬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2월 초9일 [양력 3월 22일]<경자> 맑다. 새벽에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는 일로 이원룡 (李元龍)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두산도(돌산도)로 보냈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3일]<신축> 안개비, 개었다가 흐렸다가 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김인문(金仁問)이 순찰사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중원(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기까지 했을 뿐아니라 중원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는가 의심하게까지 했으니, 그 흉칙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2월 11일 [양력 3월 24일]<임인>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배 위에서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검했다. 2월 12일 [양력 3월 25일]<계묘> 맑고 바람도 자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서 해운대 (여수시 동북쪽에 있는 작은 섬)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沈獵雉)라는 운자(韻字)를 띄워 봤더니 너무 조용했다. 나중에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趙而立)이 시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2월 13일 [양력 3월 26일]<갑진> 맑다. 전라우수사(李億祺)의 군관이 왔기로 화살대 큰 것 ·중치 백 개와 쇠 쉰근을 보냈다. 2월 14일 [양력 3월 27일]<을사> 맑다. 아산 어머니께 문안차 나장(고을이나 병마사·수사의 영문에 있는 使令) 두 명을 내어 보냈다. 2월 15일 [양력 3월 28일]<병오> 비바람이 매우 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석수(石手)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2월 16일 [양력 3월 29일]<정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신구번의 군사를 점검했다. 2월 17일 [양력 3월 30일]<무신> 맑다. 나라제삿날(世宗의 祭祀)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2월 18일 [양력 3월 31일]<기유> 흐렸다.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왔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미(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이르니 영주(고흥)현감(裵興立)과 여도 권관(黃玉千)이 마중했다. 방비를 검열하는데 흥양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2일]<신해> 맑다.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웬간히 완비되었다. 늦게야 떠나서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의 꽃과 들가의 봄풀이 한폭의 그림 같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 2월 21일 [양력 4월 3일]<임자> 맑다. 공무를 본 뒤에 주인(감영과 고을의 연락을 취하는 營邸吏)이 자리를 베풀어 활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丁傑)도 와서 보고 능성현 감 황숙도(黃叔度)도 와서 함께 술취했다. 배수립(裵秀立)도 나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신홍헌(申弘憲)으로 하여금 술을 걸러 지난날에 심부름하던 삼반하인(軍奴·使令·及唱 등)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했다. 2월 22일 [양력 4월 4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본 뒤에 녹도로 갔다. 황숙도(黃叔度)도 같이 갔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집기류을 몸소 점검했다. 그 길로 녹도로 가서 곧장 봉우리 위에 새로 쌓은 문다락으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이 근방에서는 으뜸이다. 만호의 애쓴 흔적이 손닿지 않은 곳이 없다. 흥양현감(裵興立)과 능성현감 황숙도(黃叔度) 및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봤다. 촛불을 밝혀 이슥해서야 헤어졌다. 2월 23일 [양력 4월 5일]<갑인> 흐렸다. 늦게야 배를 타고 발포로 가는데, 맞바람(逆風)이 세게 불어 배가 갈 수가 없다. 간신히 성머리에까지 이르러 배에서 내려 말을 탔다. 비가 몹시 쏟아져 일행 모두가 꽃비에 흠뻑 젖은 채로 발포로 들어가니, 해는 벌써 저물었다. 2월 24일 [양력 4월 6일]<을묘>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 지척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고흥군 포두면 마복산) 아래의 사량에 이르러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고흥군 점암면 금사리)에 이르니, 흥양현감이 먼저 와 있다. 전선을 점검하고 나니, 날이 저물므로 그대로 눌러 잤다. 2월 25일 [양력 4월 7일]<병진> 흐렸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에 탈난 곳이 많다.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줬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고을 수령 아랫 벼슬아치)를 내어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최하인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조차 하지 못했으니 우습다.맞바람이 세게 불어 출항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잤다. 2월 26일 [양력 4월 8일]<정사> 아침 일찍 출항하여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에 이르니, 여도진의 배와 방답진의 마중하는 배가 나와서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를 마치고서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과 편전은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어 고민이다. 전선은 좀 온전한 편이니 기쁘다. 2월 27일 [양력 4월 9일]<무오> 흐렸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깎아지른 외딴 섬인지라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무척 근심이 된다. 첨사가 애쓰기는 했으나, 미쳐 시설을 못했으니 어찌하랴. 저녁나절에야 배를 타고 경도(여수시 경호동 대경호도)에 이르니, 여필(汝弼)과 조이립(趙而立)이 군관·우후들이 술을 싣고 마중나왔다. 이들과 함께 마시고 즐기다 해가 넘어간 뒤에야 관청으로 돌아왔다. 2월 28일 [양력 4월 10일]<기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2월 29일 [양력 4월 11일]<경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위장을 순천부사로 고쳐 임명했다고 하니 한심하다. 임진년 3월 (1592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12일]<신유> 망궐례를 했다. 식사를 한 뒤에 별방군과 정규군 하번군을 점검 하고서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3월 초2일 [양력 4월 13일]<임술>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라제삿날(中宗 章敬王后 尹氏 祭祀)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승군 (僧軍) 일백 명이 돌을 주웠다. 3월 초3일 [양력 4월 14일]<계해) 비가 저녁내 오다. 오늘은 삼짇날 명절이건만 비가 이렇게 내리니 답청도 못하겠다. 조이립(趙而立) 우후·군관 등과 동헌에서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3월 초4일 [양력 4월 15일]<갑자> 맑다. 아침에 조이립(趙而立)을 배웅하고 객사 대청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서문밖 해자와 성을 더 쌓는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줍 는 것을 성실히 하지 않으므로 책임자(首僧)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안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 하니 다행이다. 3월 초5일 [양력 4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증손전 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을 보니 수 전·육전·화공전 등 모든 싸움의 전술을 낱낱이 설명했는데, 참 으로 만고의 훌륭한 책이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7일]<병인> 맑다. 아침밥을 먹고난 뒤 출근하여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갑옷· 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진 것이 많아 색리·궁장·감 고 등을 문책했다. 3월 초7일 [양력 4월 18일]<정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3월 초8일 [양력 4월 19일]<무진> 종일 비가 내렸다. 3월 초9일 [양력 4월 20일]<기사> 종일 비가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21일]<경오> 맑으나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3월 11일 [양력 4월 22일]<신미> 맑다. 3월 12일 [양력 4월 23일]<임신> 맑다. 식사한 뒤에 배있는 곳으로 나가 경강(여수시 봉산동)의 배를 점 검했다. 다시 배를 타고 소포(여수시 종화동 종포)로 나가는데 때 마침 샛바람이 세게 불고 격군(보조사공)도 없어 도로 돌아왔다. 곧바로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3월 13일 [양력 4월 24일]<계유> 아침에 흐렸다. 순찰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3월 14일 [양력 4월 25일]<갑술>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순찰사(李洸)를 만나러 순천으로 가는데, 비가 몹시 퍼부어서 길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서 다시 해농창평(순천시 해룡면)에 이르니, 길 바닥에 물이 석 자나 괴었다. 겨우 겨우 순천부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찰사와 격조를 터 놓고 이야기했다. 3월 15일 [양력 4월 26일]<을해> 흐리며 가랑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다락 위에 앉아서 활쏘고, 군관들에게는 편을 갈라 활을 쏘 게 했다. 3월 16일 [양력 4월 27일]<병자> 맑다. 순천부사가 환선정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3월 17일 [양력 4월 28일]<정축> 맑다. 새벽에 순찰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인 뒤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3월 18일 [양력 4월 29일]<무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19일 [양력 4월 30일]<기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20일 [양력 5월 1일]<경진> 비가 몹시 쏟아지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관방의 회계를 밝혔다. 순천 관내를 수색하는 일이 제 날짜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대 장·색리·도훈도 등을 문책했다.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 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고흥군 봉래면)와 대평두·소평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엉터리 거 짓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일로 흥양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3월 21일 [양력 5월 2일]<신사> 맑다. 몸이 불편하여 아침내 누워 앓다가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 를 봤다. 3월 22일 [양력 5월 3일]<임오> 맑다. 성 북쪽 봉우리 아래에 도랑을 파내는 일로 우후 및 군관 열 명 을 나누어 보냈다. 식사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23일 [양력 5월 4일]<계미> 아침에 흐리고 저녁나절에는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에서 올 널빤 지가 아직 안 들여 왔기 때문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어 독 촉했다. 순천에서 심부름꾼을 보내 온 소국진(蘇國進)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내었는데 보니, "발포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만한 재목이 못 되기로 갈아 치워야 하겠다"고 하 므로 아직 갈지 말고 그대로 유임하여 방비에 종사하게 해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3월 24일 [양력 5월 5일]<갑신> 나라제삿날(世宗 昭憲王后 沈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우후 가 수색하고 탈없이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都事)의 답장을 송 희립(宋希立)이 아울러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대마도주(종의지)가 공문을 보냈는데, 벌 써 대마도 배 한 척을 귀국(조선)에 보냈는데, 만일 도착하지 않 았다면 풍랑에 깨졌을 것이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 무하며, 말을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3월 25일 [양력 5월 6일]<을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경상병마사가 평산포에 도착하지 않고 곧장 남해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다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새로 쌓은 성을 순시해 보니, 남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져 있었다. 3월 26일 [양력 5월 7일]<병술> 맑다. 우후와 송희립(宋希立)이 남해로 갔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3월 27일 [양력 5월 8일]<정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일찍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여수시 종화동 종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것을 바라 보았다. 겸하여 거북함에서 대포 쏘는 것 도 시험했다. 3월 28일 [양력 5월 9일]<무자>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모조 리 다 맞고, 두 순은 네 번 맞고, 세 순은 세 번 맞았다. 3월 29일 [양력 5월 10일]<기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 貞憙王后 尹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아산 고향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 니 참으로 다행이다. 임진년 4월 (1592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11일]<경인> 흐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별조방을 점검했다. 4월 초2일 [양력 5월 12일]<신묘> 맑다.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 온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4월 초3일 [양력 5월 13일]<임진> 맑다.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4월 초4일 [양력 5월 14일]<계사> 맑다. 아침에야 비로소 겨우 통증이 가라앉았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5일]<갑오>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4월 초6일 [양력 5월 16일]<을미> 맑다. 진해루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汝弼)을 배웅했다. 4월 초7일 [양력 5월 17일]<병신> 나라제삿날(中宗 文定王后 尹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낮 열 시경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는데, 영남관찰사와 우병마사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4월 초8일 [양력 5월 18일]<정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에 여필(汝弼)이 떠나갔다. 객창에 홀로 앉았으니 만단의 회포가 어리어 온다. 4월 초9일 [양력 5월 19일]<무술>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방응원(方應元)이 방비처에 갈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보냈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광양현감(어영담) 이 수색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4월 초10일 [양력 5월 20일]<기해>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11일 [양력 5월 21일]<경자>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순찰 사의 군관(남한)이 가져 왔다.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4월 12일 [양력 5월 22일]<신축>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 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 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 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4월 13일 [양력 5월 23일]<임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4월 14일 [양력 5월 24일]<계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15일 [양력 5월 25일]<갑진> 맑다. 나라제삿날(成宗 恭惠王后 韓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 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왜선 아흔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병마사(최원)·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4월 16일 [양력 5월 26일]<을사> 밤 열 시쯤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4월 17일 [양력 5월 27일]<병오> 흐리고 비오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영남우병마사(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서는 수군(仍番=上番)과 번을 새로 드는 수군(奔番=下番)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4월 18일 [양력 5월 28일]<정미>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낮 두 시쯤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울산(이언함) 두 군수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한다. 이건 정말로 통분하여 말을 할 수가 없다. 병마사(이각)와 수사(박홍)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뒷쪽까지 이르렀다가 그만 즉시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가슴 아프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병방이 석보창(여천군 쌍 봉면 봉계리 석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잡아 가두었다. 4월 19일 [양력 5월 29일]<무신> 맑다.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내고, 일찌기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몸소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입대하러 온 군사) 700 명을 만나 보고 역사하는 일은 점검했다. 4월 20일 [양력 5월 30일]<기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많은 적들이 휘몰아 쳐들어 오니 이를 막아낼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가 마치 무인지경을 드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하여 와서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정에 장계하였다"고 하였다. 4월 21일 [양력 5월 31일]<경술> 맑다.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부사(권준)가 달려 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4월 22일 [양력 6월 1일]<신해> 새벽에 정찰도 하고 부정사실도 조사할 일로 군관을 내어 보냈다. 배응록(裵應祿)은 절갑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 성(宋日成)은 금오도(여천군 남면 금오도)로 갔다. 또 이경복(李 景福) ·송한련(宋漢連) ·김인문(金仁問) 등으로 하여금 두산도(여천군 돌산도)의 적대목(敵臺木)을 실어 내리는 일로 각각 군인 쉰 명씩을 데리고 가게 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품방에서 역사를 시켰다. 4월 26일 [양력 6월 5일]<을묘> <장계에서> 이 달 20일 성첩한 좌부승지(민준)의 서장이 왔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 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개의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 관찰사 이광(李洸)·방어사 곽영(郭嶸)·병마절도사 최원(崔 遠) 등에게도 분부한 사연을 낱낱이 알렸으며,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우수사 원균(元均) 등에게는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 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급히 회답해 달라."고 통고 하고 각 관포에도 "전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렸다. 4월 27일 [양력 6월 6일]<병진>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 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 (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 어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 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 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 4월 29일 [양력 6월 8일]<무오>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다. "적산 500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 도)의 수군을 뽑아 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마사를 끌여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영) 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소속 수군으로,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 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 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에 발포가장·영군관·훈 련원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에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후 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金仁 英),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에 영군관·급제 최대성(崔大晟), 참퇴장에 영군관·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등을 모두 배치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 선봉장은 우수사 원균(元均)과 약속할 때 그도의 변장으로써 임명할 계획이며, 본영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방답·사도·여도·녹도·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담략이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하여 보냈다. 나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4월 30일 새벽 네 시에 출전할 예정으로 경상우도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곡포·평산포 등 네 개 진영이 이미 거듭 들어왔으므로 그 현령·첨사·만호 등이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길 중간까지 나와서 대기하라"고 새벽에 공문을 만들어 사람을 달려 보냈다. 낮 두 시경 본영의 진무이고 순천 수군인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현 성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었고, 집안에서 밥짓는 연기마자 별로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물은 흩어진채로 있고 무기고의 병기마저 모두 없어지고 비어 있는데,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적의 세력이 급박해지자 온 성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달아났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돌아오다가 또 한사람을 보았는데, 쌀 섬을 진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 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전을 살펴 보니, "곡포(曲浦)"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며,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하인들 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宋漢連)에 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 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대체로 보아 흉악한 적의 세력이 크져 부대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는데, 한 부대는 육지 안으로 향하여 먼 곳까지 석권하고, 한 부대는 연해안으로 향하여 닥치는대로 함락하고 있으나, 육지나 바다의 여러 장수들이 한 사람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바다의 진영으로서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우수영과 남해의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뿐이지만, 이제 들으니 우수영마저도 함락되었고, 남해의 온 섬들은 벌써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바, 이른바 우수영은 내가 지키는 진영과 일해상접이고, 남해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은 사람의 모양마저 똑똑히 세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본도로 침범해 올 시기가 곧 박두하였으니 매우 한심할 뿐 아니라, 본도 내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의 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정예의 사졸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에 남은 진보에는 병기를 가진 사람조차 너무 적어 다만 맨손으로 모인 수군을 거느리게 되므로 그 세력이 매우 약하여 달리 방어할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중위장이며 순천부사인 권준(權俊)도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 갔다. 더구나, 오랫동안 임지에 있던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서도 가족을 데리고 짐을 지고 길가에 잇달았으며, 혹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고 혹은 틈을 타서 이사 하는데,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도 또한 이같은 무리들이 있으므로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거니와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라."는 분부가 이같이 정녕할 뿐 아니라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분노가가 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속에 사무쳐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곡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합력하여 무찔러서 적의 무리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런데 남해에 첨입된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아니하고 먼저 도피하였으므로,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 밖의 실 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 척 미만 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李洸)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 우수사(이억기)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신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발선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 하겠다. 흉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벌써 새재를 넘어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의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 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어루 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없애고자 하니,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서 함부로 하가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써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이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습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 오르지 못 하도록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반드시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분함을 더 참을 수 없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에 하나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 되고 못 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 |
댓글목록
용담호님의 댓글

안희선 시인님 <명량>을 보셨네요
난중 일기를 살펴보니 그날의 일들이 생생하네요
저는 영화로 보았지만 안희선 시인님은 DVD로 보셨군요
이 나라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인물이 나왔으면
하는데 오늘의 현대가 안타깝습니다.
고운 내용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중 일기를 보니 그 당시 얼마나 우리수군이 약했던 것을
알 수가 있네요 좋은 역사의 의미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위인중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바로 충무공 이순신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이러한 시 한수를 남기셨지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칼 옆에 차고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비록 짧은 시이지만 그래도 장군께서 한산섬에 계실 때
읋어 주시던 시이지요.장군의 고뇌를 생각하는 마음
이 시에서 많이 담겨져 있다지요.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역사의 산 교훈 일깨워 주시는 시인님의 마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