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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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8일 [양력 7월 16일]<병신>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의논하면서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지냈다.
6월 초9일 [양력 7월 17일]<정유> 맑다.
곧장 천성·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두세번 수색 하고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6월 초10일 [양력 7월 18일]<무술>은 맑았다.
임진년 7월 (1592년 7월)
7월 초4일 [양력 8월 10일]<신유>
<장계에서>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이하여 낱낱이 무찌르고자 서로 공문을 돌려서 약속하며 배를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 를 탐문하였는데, "가덕·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 열 여 척, 혹은 서른 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고 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나 주시 금성동)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 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 같이 일어나건만, 한번도 적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깊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본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오늘 저녁 때에 약속한 그 장소에 도착하였다.
7월 초5일 [양력 8월 11일]<계해>
<장계에서> 서로 약속하다.
7월 초6일 [양력 8월 12일]<임술>
<장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출항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 계인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일곱 척을 거느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만나 재삼 약속하고 진주땅 창신도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다.
7월 초7일 [양력 8월 13일]<갑자>
<장계에서> 샛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 땅 당 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 김천손(金千孫)이 우리 함대를 바라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하였다.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일흔 여 척이 오늘 낮 두 시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였다.
7월 초8일 [양력 8월 14일]<을축>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 여섯 척과 중선 스무 네 척, 소선 열세 척(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 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야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 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같고 우레같 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 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현양현 감 배흥립(裵興立)이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李奇男)은 왜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좌별도장 본영 군관 전 만호 윤사공(尹思恭)과 가안책(賈安 策)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섯 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 운(鄭運)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세 급을 베었고,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머리 두 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宋應珉)은 머리 두 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崔 天寶)는 머리 세 급을 베었고,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는 머리 한 급을 베었고,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朴以良)은 머리 한 급을 베었고, 내가 타고 있는 배에서 머리 다섯 급을 베었고, 유군일령장 손윤문(孫允文)은 왜의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 에까지 추격하였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崔道傳)은 우리나라 소년 세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의 왜대선 스무 척, 중선 열일곱 척, 소선 다섯 척 등은 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 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사백 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한 척·중선 일곱 척·소선 여셧 척(모두 열네 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7월 초9일 [양력 8월 15일]<병인>
<장계에서>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마흔 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탐망군이 보고했다. 즉시 본도 우수사 및 경상 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한 바, 이 날은 날이 이미 저물고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여 앞으로 나갈 수 없으므 로 거제땅 온천도(거제도 하청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7월 초10일 [양력 8월 16일]<정묘>
<장계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 오라"고 약속하고,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 우수사는 내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대선 스무한 척·중선 열다섯 척·소선 여섯 척(모두 마흔두 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 삼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한 척과 이층으로 된 대선 두 척이 포구에 서 밖을 향하여 물에 떠 있었고, 나머지는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뭍이 드러날 것이고 판옥대선으로는 쉽게 드나들 수가 없으므로 여러번 유인 해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선운선(先運船) 쉰아홉 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목베었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뭍으로 내려갈 계획으로 험한 곳에 배를 매어둔 채 두려워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드나 들면서 천자·지자·현자 총통과 여러 총통 뿐아니라 장전과 편전 등을 빗발 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적에,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 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삼층방 대선과 이층방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어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을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였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부수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갔는데, 뭍으로 간 왜적들은 다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무척 많은 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워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그 백성들이 오히려 비참한 살륙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 일 리 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7월 11일 [양력 8월 17일]<무진>
<장계에서>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왜적들이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틈타 도망갔으므로 전일 싸움 하던 곳을 탐색해 보니, 전사한 왜적들을 열두 곳에 모아 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바닥에 그득하여 곳곳이 붉은 빛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적들의 사상자를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다. 낮 열 시쯤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를 모두 수색하였으 나, 왜적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그래서 가덕 바깥에서부터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게 한 다음 "적의 많고 적음을 탐망해서 보고하라"고 가덕도 응봉과 김해의 금단곶 연대 등지로 탐망군을 정하여 보내었는데, 밤 여덟 시 쯤에 그 탐망군인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와서 보고했다. "연대에서 탐망할려고 올라갈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한 늙은 중이 있기에 같이 연대로 올라가서 양산과 김해의 두 강의 으슥한 곳과 그 두 고을 쪽을 바라보니, 적선이 나뉘어 정박해 있는 수는 거의 백 여 척쯤 되는데, 그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 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날마다 쉰 여 척이 떼를 지어 드나 들며, 11일 본토에서 그 강으로 들어왔다가 어제 안골포 접전 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는 간 밤에 거의 다 도망가고 다만 배 여 척 이 남아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왜놈들은 너무 두려워서 도망친 꼴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저물녘 에 천성보로 나아가서 잠깐 머물면서 적에게 우리들이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렸다.
7월 12일 [양력 8월 18일]<기사>
<장계에서> 낮 열 시쯤에 한산도에 이르니, 이 곳에 하륙했던 왜적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피곤하여 바닷가 에서 졸고 있었다.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를 세 급 을 베었고, 그 나머지 사백 여 명의 왜적은 탈출해도 도망갈 길 이 없는 초롱 속의 새와 같았다. 나와 본도 우수사는 다른 도에 주둔하는 군사로서 군량이 벌써 떨어졌을 뿐 아니라 "금산의 적 세가 크게 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잇달아 도착 하므로 그섬에 하륙한 적들은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합력하여 목을 베고 그 급수를 통고하도록 그 도의 우수사와 약속했다.
7월 13일 [양력 8월 19일]<경오>
<장계에서> 본영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의 문초 내용이 비록 낱낱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배를 정비하여 전라도로 향한다"는 말만은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이들중에, 첫째 부대의 왜선 일흔세 척은 거제도 견내량에 와서 머물고 있다가 이미 섬멸되었고, 둘째 부대의 왜선 마흔두 척은 안골포 선창에 벌여 진치고 있었으나, 역시 우리에게 패하여 무 수한 사상자를 내고 밤에 도망하였으니, 다시 그 무리를 데리고 와서 병력을 합세하여 바로 몰아 침범해 오면, 마침내는 우리가 앞뒤로 적을 받게 될 것이므로 병력이 분산되고 형세가 약한 것 이 극히 염려스럽다.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여 창을 베개로 삼아 변을 기다려 다시 통고하는 즉시로 수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라"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하고 진을 파하였으며, 포로되었다가 도로 잡혀 온 사람은 각각 그 빼앗은 관원에게 명하여, "구휼하 고 편히 있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 보내 라"고 알아 듣도록 타일렀다.
7월 15일 [양력 8월 21일]<임신>
<장계에서>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제몸을 돌아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전하여 여러번 승첩을 하였다만 조정이 멀 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 등급을 만약 조정 의 명령을 기다려 받은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 케 할 수 없으므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2·3 등으로 별지 에 기록하였으며, 당초의 약속과 같이 비록 왜적의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은 내가 본 것으로 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서 함께 기록하였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7월 16일 [양력 8월 22일]<계유>
<장계에서> 본영과 본도 소속 각 진포의 군량은 원 수량이 넉넉 하지 못하였는데, 세번이나 적을 무찌르느라고 해상에서 여러 날 을 보내게 되어 많은 전선의 군졸들이 굶주리므로 원 군량은 벌 써 다 나누어 주었다. 적은 물러가지 않으므로 잇달아 바다로 내 려가 출전해야 하고 군량은 달리 변통하여 마련할 길이 없어 순 천부에 두었던 군량 오백 여 섬을 본영과 첩입한 방답진에, 흥양 군량 사백 여 섬을 여도·사도·발포·녹도 등의 네 개 포구에는 백 섬 씩을 먼저 옮겨다가 뜻밖의 일에 대비토록 하고, 도순찰사 에게 공문을 보냈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임진년 8월 (1592년 8월)
8월 24일 [양력 9월 29일]<신해> 맑다.
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 영감(충청수사 정걸)과 같이 먹고 곧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 데 정 조방장 도 함께 먹었다. 오후 네 시쯤에 배를 출항하여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정박하다. 한밤 열두 시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땅 모자랑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 어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8월 25일 [양력 9월 30일]<임자> 맑다.
오전 여덟 시쯤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 산포만호가 공장(수령이나 찰방이 감사·병마사·수사등에게 공 식으로 만날 때에 내는 관직명을 적은 편지)을 바쳤다. 당포 가 까이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만나 배를 매 놓고 이야기했다. 오후 네 시쯤에 당포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자정에 잠깐 비가 왔다.
8월 26일 [양력 10월 1일]<계축> 맑다.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서 우수사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 권준(權俊)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乎寺:거제 시 사등면)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8월 27일 [양력 10월 2일]<갑인> 맑다.
영남수사(원균)과 같이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漆乃 島)에 이르렀다.웅천현감 이종인(李宗仁)이 와서 말하는데, "왜 적의 머리 서른다섯 개를 베었다."고 한다. 어두울 무렵에 제 포(濟浦)·서원포(西院浦)를 건너니, 밤이 벌써 열 시쯤이 되어 자려는데, 하늬바람이 차겁게 부니, 나그네의 회포가 어지럽 다. 이 날 밤 꿈자리도 많이 많이 어지러웠다.
8월 28일 [양력 10월 3일]<을묘> 맑다.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 날짜는 알수 없으나, 8월 28일 이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삼가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전일 승평에서 받들었던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것이었습니다. 줄이고. 일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비록 추운 겨울이 되어도 날씨 는 늘 따뜻한데, 지금까지 흉한 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땅에 머물 러 있어도 풍속에 익숙되지는 않습니다. 한 겨울이 되면, 추위로 지내기 괴로우며, 가난할 뿐 아니라, 군량은 이미 다 떨어지고, 용기와 힘도 다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난 왕실이 바로 이 때인데 한해가 새해로 바뀌었어도 아직 적을 없앴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 다. 한 구석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 다행이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옮기는 것 모두 이 전라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해를 다 없애어 국권을 회복하 는 것도 이 도(전라도)의 계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라도 감사가 다시 임금에게 충성하러 부임했고, 절도사는 오 랫동안 남의 땅(경상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예하게 여거 하는데, 군기·군량은 이가운데서 다하여 돌아가고, 진과 보(鎭堡) 에 이르러 방어군사를 정하는 것 또한 각각 반으로 나누어 뽑아 거느렸습니다. 그런데 장수는 늙어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아울러 들이닥쳐 반 이상은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비록 혹 흩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손 해도, 굶주림과 추위가 이미 극에 달하여 죽음이 잇달았습니다. 큰 고을이면 300여 명, 힘차고 왕성한 사람을 조급히 가리어 채우기를 강요하며 독려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 니다. 더구나 소모사(召募使)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를 징발하니, 각 진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읍의 초병도 뽑아 그 수를 채우는 데, 한 도가 소동한 것은 알지 못하는 바, 이 도의 보전도 어려워 꼭 길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지난 9월에 유지에, 각 고을의 떠돌이 군사일지도 일족 가까이 있는 자에게는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라고 하신 정녕한 서신이 있었거늘, 백성을 풀어 비상한 고난을 견줄데 없이 급하였던 것입니다.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차, 아무 죄없는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독한 해를 입었습니다. 종사(宗社)와 도성(都城)도 보전할 수 없었고, 말과 생 각이 이에 미치어 고통이란 불타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달 10명의 군사가 방비하는 고을에 부임하니, 한번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다음 달 방비에 들어가는 사 람이 겨우 서너 명인데, 어제는 10 명의 유방군이 오늘은 너댓 명 미만이니, 몇 달 가지 않아서 바닷가의 진(鎭)은 하나같이 텅 비어 진(鎭)의 지휘관은 홀로 빈 성을 지키게 되니, 어떻게 알지 못하 겠습니다. 만약 옛 전례를 다른다면, 임금의 분부를 어기게 되고, 옛 명령을 따르면, 적을 방어하는데, 계책이 없으니, 이 두 가지 중 편리한대로 밤낮으로 생각하여 보고했더니, 관찰사의 공문에 일족 의 대충징발하는 폐단이 백성을 심하게 병들게 합니다. 정녕 명령을 내리신다면, 이른바 명령을 이행할 틈이 없거니와, 그 보고 내용 또한 일거리가 있으니, 백성을 어루만지고, 적을 방어하는데에 둘 다 그 편리한 일을 얻는 것이라 답하여 왔습니다. 각 고을에는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지면, 도목장(都目狀)에서 빼버리라고 공문을 내 보냈습니다. 대개 본도(전라도)는 나누어 방비할 군사가 경상도의 예와는 같지 않으며, 좌·우 수영에는 320여 명이고, 각 진포에는 혹 200 혹 150여 명씩 나누어 방비하였거늘, 그중에서 멀리 도망갔거나 죽은자가 오래 되었다. 아직 본래대로 정하지 않은 자 는 10에 7∼8이며, 현재 나타나 있는 사람을 거두어 주는 것도 모두 늙고 쇠잔하여 방비업무에 알맞지 않습니다. 힘이 부득이 하면 물론 일족에게 숫자만 채우려 입방할지라도 탈이 났다고 소송하는 자가 많고, 아직 방비에 도착하지 않은 자는 혹 이름을 대어 힘을 합하는 가운데 이것 저것 엇갈리게 한다면, 끝내 점고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사이의 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 방비하는 일이 무척 급하고 예나 다름없이 병에 걸려 방어하는 것은 줄이기 때 문에, 전례를 따라 재촉하고 분발하면, 하나는 배의 사부를 채우게 되고, 하나는 성을 지키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5번 출동에 적을 맞아 14번이나 싸워 이겼던 것은 이미 8달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국방이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은 중앙에까지 곧 미치게 됩니다. 이 것은 실로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계책은 먼저 옛 전례를 따라 변방을 방어해야 하겠습니다. 차츰 차츰 조사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급한 일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호남에 달려 있는 것은, 마치 제(齊)나라의(山東省 地方의) 거현( 縣)이나 즉묵현(卽墨縣)과 같이 항복하지 않다가 공격해온 연(燕)나라를 파하고 국토를 회복하였던 것)처럼 (곧 전 쟁이 끝나지 않고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과 같으니, 몹쓸 병있는 자가 겨우 한쪽 다리의 구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허다하게 군사와 말을 지경밖으로 쓸어내 버렸습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汝松)이 수십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개성·서울 세 곳의 도적을 토멸했으며,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와 남김없이 소탕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 9월 (1592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5일]<정사>
<장계에서> 닭이 울자 출항했다. 낮 여덟 시에 몰운대를 지날 무렵 샛바람이 갑자기 일고파도가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아홉 척,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두 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스 락을 의지하여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삼도의 수사가 거느 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丁傑)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깨어 부수고, 배 안에 만재한 왜놈의 물건과 전쟁 기구도 끌어내 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태웠으나, 왜놈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 보며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했다. 그리고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 로 즉시 소선을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 케 하였더니, "대개 오백 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의 언덕아래 줄지어 대었으며, 선봉 왜대선 네 척이 초량 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원균(元均)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 군 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 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말하고 독전기 를 휘두르며 진격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중위장 순천부사 권준(權俊)·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적도들이 헤엄쳐 뭍으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 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 을 치면서 "장사진"으로 돌진했다. 이 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오 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사백일흔 여 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 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산위·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거의 다 산으 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 처럼, 우레 처럼 쏘는 것이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 가 모과만 하며, 혹 수마석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 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 어 돌진하면서, 천자·지자 총통에다 장군전·피령전·장전과 편 전·철환 등을 일시에 일제히 쏘며, 하루종일 교전하니 적의 기 세는 크게 꺾이었다. 그래서 적선 백 여 척을 삼도의 여러 장수 들이 힘을 모아 쳐부순 뒤에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으로써 토굴 속에 끌려 들어간 놈은 그 스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 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는 없었다. 여러 전선의 용사들 을 뽑아 뭍으로 내려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무릇 성 안 팎의 예닐곱 곳에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 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은지라, 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벼 이 뭍으로 내리게 한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 아니며, 날도 저 물었는데,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 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를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그런데, 양산과 김해에 정박한 왜선이 혹은 말하기를 "점차 본도 로 돌아간다"고 한다마는, 몇달 이내로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모두 부산으로 모이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 산성 안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백 여 호 이상이나 되며, 성 밖의 동서쪽 산기 스락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도 거의 삼백 여 호이며, 이것 이 모두 왜놈들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중의 큰 집은 층계와 희게 단장한 벽이 마치 불당(절간)과도 비슷한 바, 그 소행을 따 져보면 매우 분통하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6일]<무오>
<장계에서> 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불태우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부수려고 하였는데,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널리 가득차 있으므로 그들의 귀로를 차단한다면, 궁지에 빠진 도적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해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풍랑이 거슬러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많이 있으므로 전선을 수리하면서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고 또 육전에서크게 물러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여야 하기 때문에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14일]<병인>
<장계에서> 원균(元均)은 그 뒤 적선이 많이 온다고 잘못 듣고서 포위한 적을 풀고 가버렸기 때문에 뭍으로 올라간 왜인들이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 는 바,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다. 이 내용을 갖추어서 장계하였다.
9월 11일 [양력 10월 15일]<정묘>
<장계에서>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격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 하므로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鄭運) 등 두세 사람이다. 세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해전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으며,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鄭運)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을 경계해야 겠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번이나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을 서서 분격하였으며, 당항포 접전을 할 때에는 왜 장을 쏘아 목을 벤 그 공로가 월등하다. 뿐만아니라, 사살하는데만 전력하고 목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하였는데,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李純信)의 이름만 들어 있지 않으니 해괴하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어영담(魚泳 潭)·배흥립(裵興立)·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權俊)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 되었으나, 오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 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린다. 이 내용을 사실대로 잘 아뢰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9월 12일 [양력 10월 16일]<무진>
<장계에서> 당항포 승첩계본을 받들고 올라간 전생서(典牲署:궁 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는 종6품의 主簿) 이 봉수(李鳳壽)가 가지고 내려온 우부승지(이국)의 서장 내용에, " 전쟁이 일어난 이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패퇴하였는데, 이번 당항포 싸움에서 비로소 대승리를 하였으므로, 특히 경을 `자헌대부'로 승진시키니, 끝까지 스스로 힘써 하라" 하신 것과, "경의 장계를 보니, 각 목장의 말들을 몰아내어 길들이고 먹여서 육전에 쓰도록 해 달라고 건의하였는데, 경이 그 수를 급히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성공을 기다려서 그대로 영구히 주도록 하라" 하신 분부의 서장 등을 본영에서 받았다.
9월 18일 [양력 10월 22일]<갑술>
<장계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 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
9월 25일 [양력 10월 29일]<신사>
<장계에서> 순천에 사는 전 훈련원봉사 정사준(鄭思竣)은 사변이 일어난 뒤에 상제의 몸으로 기복된 사람인데, 충성심을 분발하였으므로 경상도와 접경한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정하여 보낸 뒤, 무릇 매복하여 적을 막는 일에 있어서 기특한 계책을 마련하여 적들로 하여금 감히 경계선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정사준(鄭思峻)은 순천부의 외로운 선비이며, 전훈련봉사였던 이의남(李義男)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義捐穀)을 모아서 모두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향했다. 비변사의 공문에 "전죽(箭竹)을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 나, 부산 승첩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육로로 올라가야 하는 먼 길에 가져 가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올려보내지 못했는데, 비로소 이번에 정사준(鄭思峻) 등이 올라갈 때에 장편죽전과 종이 등의 물품을 함께 봉하여 같은 배에 함께 싣고 물건의 목록은 따로 적어 올렸다. 순천부사 권준(權俊)과 낙안군수 신호(申浩)·광양현감 어영담(魚 泳潭)·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도 수군 위부장으로서 본영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사변에 대비하면서 각각 공문으로 보고한 내용에 "연해변 각 고을의 관원들이 사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량 을 원 수량 이외에 별도로 쌓아 두었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지 벌써 여섯 달이 되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양식을 계속 지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신하된 자의 정의에 통곡함을 이기지 못하여 위에 별도로 쌓아 둔 군량 등 물품을 각각 배에 싣고 자원해 들어온 사람에게 맡겨 주어 올려 보낼려 했으나, 수령들로서는 진달할 길이 없으니, 이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함께 장계하도록 공문을 보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권준(權俊)은 원 수량 이외에 군량 백 섬과 다른 잡물을 함께 정사준(鄭思峻) 등이 의연곡을 싣고 가는 배에 같이 실어 우선 올려 보내다. 신호(申浩)·어영담(魚泳潭)·배흥립(裵興立) 등이 올려 보내는 군량과 군기 등 물건은 각각 그들의 배에 싣고 각 고을에서 자원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맡기어 올려 보내므로 물목을 만들어 주어 올려 보냄을 차례로 아뢰었다.
임진년 10월 (1592년 10월)
10월 30일 [양력 12월 3일]<병진>
<편지에서> 아래 의주에서 보내온 글은 꿈도 아닌 정이 아닌가. 펴 보기를 두번 세번 한 것은, 종이에 간절한 정이 가득하기에, 실상 나의 친구 위서(渭瑞)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알지는 못하나, 요사이 노장의 건강은 어떠하오. 멀리서 호소하여 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용졸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여 오랑캐가 두 번 움직이니, 이에 이 전쟁사이에 근심 한 자 뿐인데, 다행히 별장 최균·강 두분의 힘을 입어 크게 웅천의 도적을 이기고, 또 바다에 뜬 두목을 잡았다. 어찌 마음이 크게 패한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 에 돌아 오시게 하는 것 뿐이다. 남은 것은 군무가 어지럽고 매 우 바쁘므로 다 갖추지 못한다.
임진년 10월 (1592년 10월)
10월 30일 [양력 12월 3일]<병진>
<편지에서> 아래 의주에서 보내온 글은 꿈도 아닌 정이 아닌가. 펴 보기를 두번 세번 한 것은, 종이에 간절한 정이 가득하기에, 실상 나의 친구 위서(渭瑞)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알지는 못하나, 요사이 노장의 건강은 어떠하오. 멀리서 호소하여 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용졸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여 오랑캐가 두 번 움직이니, 이에 이 전쟁사이에 근심 한 자 뿐인데, 다행히 별장 최균·강 두분의 힘을 입어 크게 웅천의 도적을 이기고, 또 바다에 뜬 두목을 잡았다. 어찌 마음이 크게 패한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 에 돌아 오시게 하는 것 뿐이다. 남은 것은 군무가 어지럽고 매 우 바쁘므로 다 갖추지 못한다.
임진년 12월 (1592년 12월)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 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 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 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 내는데, 소모 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 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 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 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 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 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 지 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 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 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 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 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 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 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 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 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 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 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11월은 기록에없음
임진년 12월 (1592년 12월)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 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 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 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 내는데, 소모 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 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 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 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 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 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 지 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 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 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 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 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 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 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 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 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 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 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1월기록에없음
계사년 2월 (1593년 2월)
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2월 초1일 [양력 3월 3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발포만호(황정록)·여도권관(김인영)·순천부사(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崔已)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률로써 처벌했다.
2월 초2일 [양력 3월 4일]<정해> 늦게야 개었다.
녹도가장·사도첨사(김완)·흥양현감(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2월 초3일 [양력 3월 5일]<무자> 맑다.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이 미쳐 오지 못했다. 동쪽 상방으로 나가 앉아 순천부사·낙안군수·광양현 감과 한참 동안 의논했다. 이 날 경상도에서 옮겨온 공문에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金水男) 등이 명부에 올린 수군 여든 여 명이 도망 가버렸다고 하며, 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李鳳壽) ·정사립(鄭思 立) 등을 몰래 파견하여 일흔 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金浩乞)·김수남(金水男)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오후 여덟 시쯤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2월 초4일 [양력 3월 6일]<기축> 늦게야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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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선님의 댓글

이충무공전서는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 ( 李舜臣 )이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일기. 7책 205장. 필사본. 국보 제76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 ≫ 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 난중일기 ’ 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5부터 권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순신의 친필 초고와 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친필 초고를 정자로 베껴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한 때문인 듯하다.
또, ≪ 이충무공전서 ≫ 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 현재 남아 있는 친필 초고에는 언제 잃어버렸는지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수 있다. 예컨대 1592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의 부분, 1595년 1년 동안의 부분, 1598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부분 등이다.
따라서 〈 난중일기 〉 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친필 초고를 표준으로 삼고, 초고의 망실로 인해 ≪ 이충무공전서 ≫ 에만 수록되어 있는 부분은 그것으로서 보충할 수밖에 없다.
전 7책 중
제1책은 〈 임진일기 壬辰日記 〉 로 27매(1592.5.1. ∼ 1592.5.4., 1592.5.29. ∼ 1592.6.10., 1592.8.24. ∼ 1592.8.28., 1593.2.1. ∼ 1593.3.22.),
제2책은 〈 계사일기 癸巳日記 〉 로 30매(1593.5.1. ∼ 1593.9.15.),
제3책은 〈 갑오일기 甲午日記 〉 로 52매(1594.1.28. ∼ 1594.11.18.)로 되어 있다.
제4책은 〈 병신일기 丙申日記 〉 로 41매(1596.1.1. ∼ 1596.10.11.),
제5책은 〈 정유일기 丁酉日記 〉 로 27매(1597.4.1. ∼ 1597.10.28.),
제6책은 〈 정유무술일기 丁酉戊戌記 〉 로 20매(1597.8.4. ∼ 1598. 1.4.),
제7책은 〈 무술일기 戊戌日記 〉 로 8매(1598.9.15. ∼ 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 ( 狀啓 ) · 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5책과 제6책의 〈 정유일기 〉 중에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중복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다시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앞 책의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점과 내용에서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더 많이 적힌 것으로 보아, 시간적 여유를 타서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 번 더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엄격한 진중 생활과 국정에 관한 솔직한 감회, 전투 후의 비망록과 수군 통제에 관한 비책, 시취(時趣)의 일상 생활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 가족 · 친지 · 부하 · 장졸 · 내외 요인들의 내왕, 부하들에 대한 상벌, 충성과 강개의 기사, 전황의 보고, 장계 및 서간문의 초록 등이 실려 있어, 임진왜란의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 조선사료총간 ≫ 제6으로 〈 임진장초 壬辰狀草 〉 와 함께 영인, 간행되었고 부산대학교에서 간행한 영인본 등이 있다. 1968년 이은상 ( 李殷相 )이 친필 초고본을 대본으로 삼고, 망실된 부분은 ≪ 이충무공전서 ≫ 의 내용으로 보충해 이를 번역, 원문과 함께 현암사 ( 玄岩社 )에서 간행하였다. → 이충무공전서
≪ 참고문헌 ≫ 正祖實錄, 李忠武公全書, 난중일기(李殷相 譯註解, 玄岩社, 1968).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