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초고_1605-29] 지옥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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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초고_1605-29] 지옥의 문 / 시앙보르
남대문로 구 삼성본관 근처에
지옥의 문을 짊어매고 끙끙거리며
로댕 영감이 방문한 적이 있다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어머니 회갑용 짝퉁 금시계 하나 사고
사무실에 돌아가기 싫어 땡땡이를 치다가
까만 문으로 들어가는데
지옥의 지옥은 천국이 아닐까 싶어져서
문 앞에서 수첩에 간단한 스케치를 했다
정신병원에서 30년을 보낸 애인은
이제 무덤조차 찾질 못하는데
영감탱이는 구석쟁이에서 돈을 헤아리며
구새먹은 이를 내보였다
붓쟁이와 달라 돌을 쪼으고 청동을 주무르는 조각가는
문화센터에서 흉내낼 수 있는 값싼 예술이 아니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예수처럼 발이나 손을 보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짝퉁 시계지만 시간은 잘 맞는다
장난삼아 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았다
흉터 하나 없는 내 손이 카미유 클로델에게 편지를 쓴다
천국을 그려서 미안합니다
예수는 내 편이 아니고 당신 편입니다
사실, 진짜 시계를 훔쳤거든요
지닌 게 모두 짝퉁이라서 뭔가 드리고 싶은데
허락하시면 문간에 걸어놓겠습니다
영감이 훔쳐간 작품은 잊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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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미유 클로델의 후기 30년,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많이 젖었지요.
예술이란 아무나 떠드는 말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조각가들은 붓쟁이들을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더군요.
가지못한 길이라서 늘 미련이 남습니다.
어쩌면 그 길을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겨질 때도 있지요.
갔다면 일류 짝투니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천국 없이는 살아도, 지옥 없이는 살아남지 못했던 이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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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희선님의 댓글

시를 읽으며...
시인으로서의 삶과 현실인으로서의 삶 사이엔
메꿀 수 없는 단절의 늪이 있음을 느끼게 되네요
늘, 천국을 그리지만 항상 지옥의 문 앞을 서성이는..
어쩌면, 기구한 운명의 모든 시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시 한 편
잘 감상하고 갑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꽤 오래 전인데 장소가 서울 한복판이라서 그런지 기억나는 여흥은 없습니다.
다만 지옥의 문, 작업은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의 합작품인데, 찬사는 로댕이 먹고,
요즘에도 그렇지만 잘 아시다시피 당시 여성의 권리는 현재 애완견공만 못했죠.
저는 조각품 하면 희랍 어쩌구저쩌구 사람들이 떠듭니다만,
클로델의 '벽난로가에서의 꿈' 만큼 충격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지 시편에 약해서, 좀 농익거들랑 시 한 편 끄적이고 싶습니다만.
편한 오후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