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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한국의 신흥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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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916회 작성일 16-05-14 00:40

본문

 

한국의 신흥종교


강일순 [ 姜一淳 ]

1871∼1909. 증산교의 창시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 일반적으로 증산 또는 강증산으로 불린다. 전라북도 고부 출신. 아버지는 흥주(興周)이다.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 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인 권씨의 태몽에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 몸을 덮고 하늘과 땅이 밝아짐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잉태하게 되어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선조들이 이조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일찍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남의집살이와 나무꾼생활도 하였으며, 21세에 결혼한 후 처가에서 훈장생활도 하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불·선 등의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고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널리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인 김경흔(金京?)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 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01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 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과 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成道)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사에서 성도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그 해 겨울 증산교 교리의 핵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는데,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 모악산 근방을 중심으로 하여 포교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이외에도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하였을 뿐,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일컬어진 것이다.

1907년 추종자 20여 명과 함께 고부경무청에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 만에, 강일순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은 뒤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추종자 몇 사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 뒤 강일순의 교단은 다시 부흥하게 되어 민족항일기에는 한때 6백 만 신도를 호칭하던 보천교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현재에도 수십 개의 교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는 후천세계에 관해서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을 남겼으며, 증산교에서는 교단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대상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참고문헌

「甑山天師公事記」(李祥昊, 相生社, 1926)
「大巡典經」(李祥昊 -甑山敎本部, 1975)

 

증산교 [ 甑山敎 ]

정의

1902년 강일순(姜一淳)이 창시한 종교.

개설

일반적으로는 그로부터 갈라진 교파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창시자의 호를 따라 증산교라고 부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신도들이 외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가 “훔치훔치…….”로 시작하는 것을 본떠 훔치교(??敎)라고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종교는 동학과 더불어 우리 나라 신종교 가운데 하나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종교유산을 거의 모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한국사상의 원류인 단군사상이 신라의 화랑도(花郎道),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조선의 선비도, 조선 후기의 동학을 거쳐 증산교의 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증산교의 발생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동학혁명은 조선 말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농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대표적인 사회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결국 그 이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가담하였던 하류계층은 혁명의 진행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혁명 이전보다도 심한 욕구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급진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 혁명이 실패한 다음, 쉽사리 자기의 본래생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사회를 개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는데, 증산교는 이들이 강일순을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조선 말의 신종교운동이었다.

창시자 강일순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을 따라다니며 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볼 뿐, 이 혁명의 실패를 미리 알아차리고 싸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자,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세상을 구원할 길이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명(神明)에 의한 도술(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천주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유교의 인도적(人道的)인 것에 그쳐 있어 신도적(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세상과 인간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유교·불교·선교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였다. 또한 신명을 부리며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 술법을 써서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도술과, 과거나 현재를 가릴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는 도통공부를 하였다.

그 뒤에 그는 사회실정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1897년부터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고향에 돌아온 뒤, 세상을 구원할 권능을 얻고자 1901년 전라북도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수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극심한 수도생활을 하던 중 같은 해 7월 하늘과 땅의 근본이 되는 바른 길, 즉 ‘천지대도(天地大道)’를 깨닫게 되고, 욕심·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일순이 도를 깨쳤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1902년부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켰으며,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한약처방에 의한 약물치료와 함께 주문을 외우게 하거나 또는 부적을 사용하고 안수치료를 같이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기어 따르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가지고 있으며, 조화로 천지를 개벽하고 선경(仙境)을 열어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설교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강일순이야말로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내려온 구세주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이후의 혼란과 함께 당시 정감록신앙과 불교의 미륵불출세사상,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풍설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강일순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 동안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포교지역은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하였던 전라북도의 7개 군이었지만, 주활동지는 자신이 광제국(廣濟局)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 부근이었다.

당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전라북도 사람들로서 동학혁명에 직접 가담하였던 농민들을 비롯한 하류계층이었으며, 성격은 대체로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강일순은 포정소(布政所)·대학교(大學校)·복록소(福錄所)·수명소(壽命所) 등의 조직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종교명칭의 사용이나 조직구조의 체계화작업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교리와 사상을 가르칠 뿐이었다.

강일순이 포교활동을 시작한 지 5년 뒤인 1907년, 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의병을 모의한다는 혐의로 고부경무청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들은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강일순의 권능에 대한 회의는 점차 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믿던 자들 가운데서는 그가 평소에 말하던 천지개벽이 늦음을 원망하거나, 그에게 조속히 선경을 이루어주도록 요구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그는 1909년 사망하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실망한 채 그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고, 차경석(車京石), 김형렬(金亨烈) 등 몇몇 제자들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는 강일순이 평소 말하던 것처럼 그가 재림할 것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2년 뒤인 1911년, 강일순의 아내였던 고부인(高夫人)이 강일순의 생일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여 4, 5시간 만에 깨어난 일이 있었다.

이 때부터 고부인은 강일순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옮겨졌다고 하며 강일순의 언행과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과거 강일순을 따랐던 자들은 다시 고부인에게로 모여들게 되었다.

고부인을 중심으로 하나의 집단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1914년 강일순을 교조로, 고부인을 교주로 하고 교명을 선도교(仙道敎, 일명 太乙敎)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차 번창하게 됨에 따라, 고부인의 이종사촌동생이며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은 고부인과 일반신도들과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차경석의 실권이 강화되자, 고부인은 김제시 백산면 조당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1919년 별도로 태을교라는 교명을 가지고 교단을 분리하였다.

차경석이 고부인과 갈등을 보이고 있을 때, 강일순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이 교단을 떠나거나 또는 각자 강일순으로부터 교통(敎統)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강일순을 가장 먼저 따랐던 김형렬(金亨烈)은 1915년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별도의 교단을 세운 뒤 1921년 ‘불교진흥회’라고 부르다가 1922년에는 ‘미륵불교’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안내성(安乃成)은 1914년 여수에서 ‘태을교’를 세운 다음 1925년에는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개명하였고, 이치복(李致福)은 1916년 금구(金溝) 원평(院坪)에서 ‘제화교(濟化敎)’를 조직한 다음 다시 경상남도 하동에서 ‘삼덕교(三德敎)’를 세웠다.

박공우(朴公又)는 태인에서 ‘태을교’를, 문공신 (文公信)은 정읍·김제·고창·부안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단을 만들었고, 김광찬(金光贊)은 남원에서 ‘증산교도리원파교단(甑山敎桃李園派敎團)’을 세웠다.

증산교단이 이와 같이 난립하게 된 것은 강일순이 살아 있을 때 추종자들에 대한 서열 규정이나 후계자 선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기성종교의 교리통합과 민족사상의 재정립에 주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후계자들의 관점에 따라 불교계·선도계·유교계 등으로 교리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증산교가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신자수는 크게 늘어가게 되었다. 특히 차경석의 보천교는 그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활동에 있어서도 많은 사회적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교세가 늘어가게 되자 1919년 ‘60방주(方主)’라는 전국적인 교구를 두었고, 그 뒤 5, 6개월 사이에 신자의 수효가 수십 만에 이르자 각 방주 밑에 몇 단계에 걸친 하부조직을 두었다.

이때 보천교에는 간부만도 55만7700명이나 되었는데, 신자의 총수효는 600만 명이라고 선전되었다. 보천교신자들은 교단에서 발급하는 인장(印章)과 교첩(敎帖)을 얻기 위하여 포교활동에 열중하면서 많은 헌금을 바치려고 노력하여, 항간에서는 보천교의 재산이 당시 우리 나라 전국토의 10분의 1을 살 수 있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확장되자 보천교의 교명을 사용하기 1년 전인 1921년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 명칭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國號)를 선포하면서 자신이 우리 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될 것처럼 선전하였다. 이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폐하(陛下)’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보천교의 교세가 커지고 교주인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전국 각지의 보천교신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경상도에서는 보천교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수천 명의 교인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1919년의 만세 사건으로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던 만큼 100만이나 되는 신도를 거느린 대집단을 무력으로 탄압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보천교에 대하여 강력한 탄압책을 구사하는 한편, 차경석을 회유하여 친일시키려는 노력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에 제주도 신도들의 교무금을 압수당한 경험이 있던 차경석은 교단 재산과 교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1924년부터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는 등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후 보천교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신도들을 구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총독부는 이를 묵인하는 태도로 나갔다.

또한 1929년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본부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립한 중앙교당 십일전(十一殿)의 준공식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것이 차경석의 천자 등극식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관청에서는 소요 가능성을 내세워 끝내 불허함으로써 차경석의 천자등극은 무위로 끝나고 교단 분열의 발단을 만들었다.

결국 보천교에 대한 총독부의 정책은 회유하여 친일로 돌아서게 한 다음,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한편, 차경석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강일순의 가르침이나 권위를 무시하게 되자, 보천교에서는 심한 갈등과 대립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보천교의 간부를 비롯한 일부 신자들은 보천교를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태을교·동화교(東華敎)·서울대법사(大法社)·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증산교객망리교단(甑山敎客望里敎團)·수산교(水山敎)·홍로교(烘爐敎)·보화교·선도교·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은 보천교에서 분파된 교단들이다.

뿐만 아니라 강일순을 따르던 자들의 제자들도 태극도(太極道)·순천교(順天敎) 등 새로운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의 한창 때에는 증산교의 교파가 100여 개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증산교는 보천교에서의 차경석의 천자등극의 실패와 그에 따른 분열, 그리고 1938년 조선총독부가 선포한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점차 위축되거나 해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총독부의 강경한 정책과 탄압은 증산교 각 교파의 많은 신도들이 투옥되어 옥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복이 되자, 침체상태에 있던 증산교의 각 교파들은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써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 교파간 교리해석의 차이 때문에 증산교 각 교파간의 통합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

교리

강일순은 과거에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종교의 이념만으로도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여졌으므로 하나의 종교이념만으로는 혼란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천세계의 기틀을 마련하는 길은 모든 종교의 장점을 뽑아 모아 새롭게 통합시키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증산교의 교리는 이러한 강일순의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종교의 이념을 통합시키려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전개되어 온 민간신앙과 유교·불교·기독교 및 동학의 교리를 나름대로 새롭게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이들의 교리는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선도사상(仙道思想) 및 음양·풍수·도참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 덕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성(誠)·경(敬)·신(信)을 인격수양의 방법으로 삼으며, 불교의 미륵불출세사상과 동학의 주문 및 가사, 그리고 기독교의 재림사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교사상의 통합도 각 교파가 강조하는 입장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증산교 각 교파의 공통된 교리는 이들이 경전으로 사용하는 ≪대순전경 大巡典經≫과 증산종단친목회에서 간행한 ≪증산종단개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세계관:이 종교에서는 세계의 기원을 돌아다 보기 전에 그 존재양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를 ‘운도(運度)’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이 운도는 원래 음양상수(陰陽象數)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예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보면서도, 상제(上帝)인 강일순의 권능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이러한 운도의 조정을 ‘개벽(開闢)’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운도의 예정된 세계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이러한 선천과 후천이 교체되는 시기를 말세(末世), 즉 현대라고 보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선천시대는 부조리와 부정이 심한 시대이고, 후천시대는 평등과 정의 그리고 복지가 실현되는 시대이다.

또한 선천에서 후천으로 교체되는 말세에는 선천에서 쌓여온 모든 사실들이 거짓없이 드러나게 되며 모든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되기 때문에 사회의 긴장과 투쟁 및 혼란이 급격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강일순이 행하였다는 ‘천지공사’는 후천세계에로의 개벽을 위한 운도의 조정작업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후천세계에서는 모든 갈등과 대립이 해소되고 지상선경 (地上仙境)이 이루어져서 새로운 이상세계가 건설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② 신관 및 인간관:증산교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신명계(神明界)와 인간계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 종교에서는 인간의 외경(畏敬)의 대상인 신(神)·영(靈)·선(仙)·귀(鬼) 등을 인간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인성(人性)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신성(神性)은 모두 인성의 꼴바꿈이며, 신격(神格)은 인격의 꼴바꿈이므로 신이란 곧 인간 영체(靈體)의 다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증산교 교리의 독특한 신론(神論)인 ‘신인합발(神人合發)’이라는 교리에서 보다 명확하게 나타난다.

즉, 이들은 인간끼리 싸우면 천상에서 선령신(先靈神)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천상에서 싸움이 끝나야만 인간의 싸움도 바르게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신이란 인간의 마음에 응하는 것이므로 마음은 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여 신명계와 인간계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신명계의 사정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고, 신명계의 상황은 인간계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증산교의 신관은 신이란 인간과 마찬가지의 성격과 형상을 가졌다는 ‘의인간적 다신관(擬人間的多神觀)’ 또는 신의 환경조건은 인간의 그것과 다를 수 없다는 ‘신인동형적 신관(神人同形的神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천상의 옥황상제(玉皇上帝)나 구천상제(九天上帝)를 비롯한 명부제신(冥府諸神)도 인간계의 정치기구와 같이 죽은 영으로 선출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신앙대상으로 삼는 교조 강일순은 천상의 주재신(主宰神)이지만 유일신이라기보다는 신명계에서의 지도적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③ 천지공사:증산교 교리의 독특한 핵심은 천지공사이다. 증산교에서는 교조인 강일순을 옥황상제 또는 구천상제로 신앙한다.

강일순은 자기가 천상의 대권 (大權)을 주재하는 신으로서 구천에 있었는데 “이마두(利瑪竇:중국에서 선교하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를 가리킴)가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로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에 하소연하였다.

그래서 내가 서천서역대법국천계탑(西天西域大法國千階塔)에 내려와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에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大道)를 세우게 하였다.

그랬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眞法)을 들쳐내어 신도 (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나는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을 열어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그의 설교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증산교에서는 강일순을 이 세상을 구원한 제세주(濟世主)로 신앙하며, 그의 권능은 신명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큰 것으로 믿는다.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한 구원사업이 바로 천지공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공사란 강일순이 구천상제의 권능으로 천지의 운도를 뜯어고쳐 말세의 재앙과 불행을 제거하고 후천세계를 개벽한 일을 말한다.

증산교의 교리에 비추어보면,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갈등과 혼란,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문란현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운도에서 볼 때 현대는 선천운(先天運)에서 후천운(後天運)으로 교체되는 말세이므로 개벽이 있어야 하는 운도에 처하여 있다.

둘째, 신명계와 인간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는 것인데, 현대에는 신명계의 상황이 극도로 혼란하여 신과 인간간의 화목한 협력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혼란한 신명계의 상황이 그대로 인간계에 반영되어 있다.

셋째, 서로 시비만 따지는 기성종교들은 이 시대의 혼란된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잃어 인간의 참다운 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공사는 이러한 현대사회에서의 세 가지 불안요소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강일순이 행한 인류구원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일순은 천지공사를 행하기 위하여 모든 신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천지의 모든 일을 의논하는 ‘조화정부(造化政府)’를 결성한 다음, 이 조화정부에서 천지신명과 더불어 천지공사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천지공사의 내용은 운도의 조정을 올바로 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말세의 혼란과 불행을 면하게 하고 정교통일(政敎統一)의 후천세계를 개벽하는 운도공사(運度公事)와 혼란된 신명계를 정화·통일시켜 신명과 인간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신명공사(神明公事),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심신의 수련에 의하여 신명과 동화하여 말세의 불행을 면하고 후천세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는 인격수양의 도법(道法)을 지시하는 인도공사(人道公事)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증산교의 사상은 교조인 강일순의 호를 따서 ‘증산사상(甑山思想)’이라고 불린다.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는 한편, 그것을 새롭게 체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인존사상(人尊思想)·해원사상(解寃思想)·민족주체사상의 세 가지이다.

① 인존사상:인간이 신이나 그밖의 어떠한 사물보다도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이 사상은 증산교의 사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상에 속한다. 강일순은 선천에는 하늘만 높이고 땅은 높이지 않았지만, 후천에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보다도 가장 높임을 받는 인존시대가 열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지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보다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인간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인간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라는 사상은 후천에는 “하늘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謀事在天成事在人).”라는 사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존사상 속에는 계급타파사상과 남녀평등사상 등이 포함된다.

② 해원사상:강일순은 현대사회에서의 모든 긴장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원인을 선천시대의 특성인 원한관계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는 “선천에는 상극지리(相克之理)가 인간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人事)가 도의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三界)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나와 세상의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이제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뜯어고치며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한을 풀고 조화정부를 세워 하염없이 다스림과 말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화(化)하여 세상을 고치리라.”고 하였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앙은 선천시대에서 쌓여온 원한 때문이고, 후천세계가 열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한들이 깨끗이 해소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가 말하는 지상선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쌓여온 개인과 집단·계급·민족 그리고 국가간의 모든 원한을 해소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원한의 시초인 최초의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그 뒤로 쌓여온 모든 원한을 풀 수 있다는 ‘원시반본사상(原始返本思想)’을 제시한다.

③ 민족주체사상:강일순은 자기 자신이 구천상제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왔다고 강조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제세주를 영접한 선택받은 나라임을 강조한다.

더욱이 그는 우리 나라가 앞으로 세계상등국(世界上等國)이 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밝힐 진법(眞法)이 우리 나라에서 나오게 되며,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세계가 한 집안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강렬한 민족의식과 선민의식(選民意識)을 나타낸다.

증산교에서의 신앙대상은 ‘상제’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왔다는 창시자 강일순이다. 그러나 강일순 이외에도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 등 우리 나라의 시조신과 각 민족의 민족신, 공자·석가·예수 등과 같은 문명신(文明神), 모든 사람의 조상신인 선령신(先靈神), 그리고 최수운과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진묵대사(震默大師) 등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양한 숭배의 대상은 각 교파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증산교의 종교의식도 교파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강일순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 사용한 송주(誦呪:주문을 외우는 것)와 소부(燒符:부적을 태우는 의식)는 어느 교파의 의식에서나 사용되는 공통적인 내용이다. 송주는 자기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기원문을 주문으로 하여 외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수련 때와 치성을 드릴 때 행한다. 이들은 주문을 외우면 개안(開眼)이 되어 신명계와 인간계의 모든 현상을 보게 되고 과거와 미래의 일을 알게 되는 한편, 강신(降神:신이 몸에 내리는 것)이 되어 몸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주문은 교파에 따라 대단히 다양하다.

그렇지만 대체로 강일순이 전국을 돌며 구도생활을 할 때에 얻었다는 태을주(太乙呪), 동학의 시천주(侍天呪), 그리고 칠성주(七星呪)·오주(五呪)·진법주(眞法呪)·도통주(道通呪)·갱생주(更生呪)·절후주(節候呪)·개벽주(開闢呪) 등이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소부는 여러 가지의 기묘한 글자나 문구를 종이에 써서 불사르는 의식을 일컫는다.

이들은 소부를 하면 귀신을 내쫓는다든지, 병을 낫게 한다든지 또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부적도 교파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강일순이 남겼다는 ≪현무경 玄武經≫이 주로 사용된다.

증산교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는 교파의 수효가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100여 개에 이른 적도 있으며, 현재에도 증산교본부(甑山敎本部)·보천교(普天敎)·법종교(法宗敎)·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삼덕교(三德敎)·태극도(太極道)·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보화교(普化敎) 등 약 60개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증산미륵도(甑山彌勒道)·용화교(龍華敎) 등 불교적 색채를 띤 교파와, 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홍익교(弘益敎) 등 단군계통과 같은 인상을 주는 교파, 그리고 선도교와 같이 선도의 성격을 보이는 교파들도 있다.

이들 증산교의 교파들은 주로 전라북도에 있는 모악산 주변에 흩어져 있지만, 서울·부산·충청도·경상도·제주도 등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증산진법회, 대순진리회, 증산도 등 1970년 초에 창립된 개혁교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층을 대상으로 활동의 방향을 정립하고 있다.

이러한 증산개혁운동을 시작으로 1980년대부터 다시 부흥기에 접어들었지만, 전체 종교영역을 두고 보면 교세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1996년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현재 증산계 신종교 교파의 수는 약 50여 개이며 200여만 명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증산교는 각 교파에 따라 교리·경전·의식 등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팔파연합회(八派聯合會)와 같은 연합체를 만들어 교파간의 친목과 교리의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도 이들은 증산교단통정원(甑山敎團統整院)·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동도교(東道敎)·증산종단친목회·증산종단협회·증산종단연합회 등과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직체를 구성하여 자체의 연합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자체의 교리개발과 교단간의 친목에 기여할 뿐, 교파통일에는 별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증산사상연구회와 증산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여 증산사상에 대한 발굴과 체계화, 그리고 민족사상으로서의 증산사상이 가지는 의미 등을 학문적으로 분석하여 민족신앙의 체계화와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고 있다.

참고문헌

「大巡典經」
「玄武經」
「大巡哲學」(李正立 -大法社編輯局, 1947)
「韓國의 新興宗敎」-資料篇 第1部―甑山敎系總論(李康五, 『全北大學校論文集』7, 1966)
「甑山宗團槪論」(甑山宗團親睦會, 1971)
「韓國新興宗敎」(柳炳德, 圓光大學校 出版局, 1974)
「甑山宗敎思想」(張秉吉,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6)
「甑山敎史」(李正立 -甑山敎本部, 1977)
「甑山敎發生背景에 대한 社會學的 硏究」(盧吉明, 『甑山思想硏究』2, 1976)
「한국신흥종교총람」(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신종교조사연구보고서」(한국종교연구회, 1996)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고려한림원, 1997)

 

차경석 [ 車京石 ]

 

1880(고종 17)∼1936. 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창시자인 차경석의 호는 월곡(月谷). 차천자(車天子)라고도 불렸다. 전라북도 고창 출생. 동학접주를 역임한 아버지를 따라 동학운동에 가담하였고, 천도교(天道敎) 전남북 순회관(巡回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강증산(姜甑山)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면서 교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1909년 증산이 사망하자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역시 당시 훔치교라고 불리고 있던 증산교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금산사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1년 증산의 부인인 고씨가 증산탄신기념치성을 드리던 중 졸도하였다. 그 뒤부터 고부인이 증산의 평소 언동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자, 증산의 영이 감응되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차경석은 고부인을 앞세워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선도교(仙道敎, 太乙敎)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단이 커짐에 따라 실권을 장악한 그는 1918년 고부인이 이 곳을 떠나자 교주가 되었다.

1920년에는 천지운도(天地運度)에 따라 자기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盟主)가 되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제도를 혁신하여 전국의 신도를 60방주로 나누어 묶고 이를 통솔하기 위하여 많은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 일본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을 뚫고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 천제를 지내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고 선포하였다.

그 뒤 신도들간에는 그가 천자(天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를 차천자로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서울 창신동에 보천교라는 간판을 걸게 되면서 보천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해 정읍 본부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하여 사용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교세가 커지자 일제는 회유정책으로 전환하였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성향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총리대신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한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동아단결을 강조하는 친일행각을 하였다.

많은 교단간부들은 차경석의 이와 같은 행동에 크게 반발하여 보천교를 탈퇴, 따로 교파를 만들어 독립하면서 교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甑山宗團槪論」(甑山宗團親睦會, 1971)
「甑山敎史」(李正立 -甑山敎本部, 1977)
「甑山敎槪說」(洪凡草, 創文閣, 1982)

기산조합 [ 己産組合 ]

정의

1924년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신도의 노동조합적 성격을 띤 자치기구.

내용

1919년 보천교가 60방주라는 전국교구를 갖추고 수십만 신도를 확보함에 따라, 교주 차경석(車京錫)은 이러한 교세확장을 기반삼아 천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로 바꾸고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여, 신세계의 조화정부건설을 꾀했다. 이때 보천교 본부건설을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였고, 이 노동자들을 바탕으로 기산조합이 형성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대흥리 노동자들에게 편익을 주고 직조 등의 수공업을 통해 산업진흥을 꾀하는 자치기구라고 하지만, 1924년의 갑자년은 천자등극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위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기산조합장에 이름난 장사 서상근이 선임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차경석의 천자등극에 반대하면서 일부 보천교 간부들이 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가 일종의 근위대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이 기산조합은 일종의 노동보급대 및 신변호위대 성격을 가미한 노동조합적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각 부서까지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진 것은 서상근이 1924년 8월 보천교 혁신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함에 따라 자연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보천교(普天敎)」(이강오, 『전북대학교논문집』8, 1966)

이상호 [ 李祥昊 ]

1888(고종 25)∼1967. 종교인. 전라남도 해남 출신. 증산교(甑山敎 : 大法社)의 창시자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만주·북경 등을 유랑하다가 28세 때 용화동에서 증산교를 알게 되었다.

1919년 차경석(車京石)이 보천교(普天敎)의 60방주를 조직할 때 중요직책을 맡게 되어 보천교 총령원장까지 피임되었으나 차경석과 뜻이 맞지 않아 탈퇴하였다.

1925년 김형렬(金亨烈)의 미륵불교(彌勒佛敎)로 옮겨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미륵불교 간부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1928년 임경호(林敬鎬)·이정립(李正立) 등과 함께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를 세우고 통정(統正)에 올랐다.

1929년에는 동생 이정립과 함께 ≪대순전경 大巡典經≫을 수집, 간행하였다. 1931년 당시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서 태을교(太乙敎)를 영도하고 있던 고부인(高夫人)을 맞이하여 동화교와 통합종단을 만들고 대보(大保)에 올랐다. 그러나 이 교단이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자, 잠시 고향에 머물다가 1937년 정읍으로 이주하였다.

광복이 되자 이정립·최위석(崔偉錫) 등 145인을 모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대법사를 조직하여 증산교운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최위석과 헤어져 별파를 만들고 이름을 증산교라 하였다. 1948년 17개의 증산교 교단이 모여 증산교단 통정원을 조직할 때 부통교가 되었다.

6·25동란 후 김제 용화동에 본부를 정하여 1967년 죽을 때까지 증산교 교주로 있었다. 동생 이정립과 함께 ≪증산천사공사기≫를 발행하였고, 또한 ≪대순전경≫을 발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증산사상의 정립에 힘썼다.

참고문헌

「甑山敎」(李鉉澤, 『韓國宗敎』8, 1983)

대순철학 [ 大巡哲學 ]

정의

이정립(李正立)이 증산사상(甑山思想)을 체계화하여 엮은 책.

내용

1947년 대법사(大法社)에서 발간하였다. 총론과 전문 10장으로 되어 있다.

이정립은 그의 형 상호(祥昊)와 함께 강증산(姜甑山)의 언행록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을 편집, 발행하는 등 증산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뒤, 이 책을 저술하였다.

서론에서는 종교 일반에 대한 견해가 개관되어 있고, 본론 서두에서 증산의 생애와 성도(成道)를 약술하고 있다. 이어 증산사상에 나타난 신관(神觀), 증산의 천지공사(天地公事)ㆍ도덕관ㆍ경제관ㆍ여성관ㆍ실천범주ㆍ이상(理想)ㆍ의통(醫統)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신관은 한국 전래의 무속(巫俗)에 나타난 신의 개념을 구체화시켜 신명(神明)의 존재근거를 밝히고, 증산의 교설에 나타난 신명들을 분류하여 조상신ㆍ지방신ㆍ문명신 등으로 나누고 있다.

또, ‘천지공사’장에서는 강증산이 9년 동안 행한 천지공사의 내용을 신정정리공사(神政整理公事)ㆍ세운공사(世運公事)ㆍ교운공사(敎運公事)로 분류하고, 신정정리공사에 다시 해원공사(解寃公事)ㆍ신단통일공사(神團統一公事)ㆍ기령발수통일공사(氣靈拔收統一公事) 등으로 나누어 정리해놓고 있다.

‘이상’장에서는 멀지 않아 다가올 후천선경세계(後天仙境世界)와 그 주도적 구실을 담당할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증산이 가르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의통’장에서는 후천선경이 다가오기 전에 인류가 겪어야 할 병겁(病劫)과 이에 대처할 처방으로서의 의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증산사상의 전반에 걸쳐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최초의 저술이라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이정립(李正立)의 대순철학사상(大巡哲學思想)」(김홍철,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84)

고부인신정기 [ 高夫人神政記 ]

정의

이정립(李正立)이 지은 증산교의 교서(敎書).

내용

증산교 초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서적으로, 증산교의 전신인 증산대도회본부(甑山大道會本部)에서 1963년에 발간하였다. 134면. 프린트판. 1909년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姜一淳)의 사망 후, 추종자들은 그가 예언하였던 후천선경(後天仙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부인(高夫人)이 강일순의 탄신기념치성을 드린 뒤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게 되었다. 이 책은 강일순의 사망 이후 해체된 교단이 이와 같이 재정비되고, 다시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내용은 고부인이 강일순을 만나 그의 종교활동에 참여하던 봉사시대(奉仕時代), 1911년부터 1918년까지 교단을 새롭게 정비하던 선도교시절(仙道敎時節)의 제1교단시대, 1918년부터 고부인의 이종동생인 차경석(車京石)이 교권을 장악하여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으로 교세를 떨침에 따라 새롭게 분파, 태을교(太乙敎)로 활동하던 1931년까지의 제2교단시대, 1931년 이상호(李祥昊)가 세웠던 동화교(東華敎)와 병합하여 동화교수양소(東華敎修養所)로 활동하던 1933년까지의 제3교단시대, 그리고 1933년 은퇴하여 1935년 사망할 때까지의 은거(隱居)와 선화(仙化) 등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참고문헌

「보천교(普天敎)」(이강오 -전북대학교, 『논문집』제8집, 1967)
「한국(韓國)의 신흥종교(新興宗敎)·자료편(資料篇)―제1부 증산교계총론(甑山敎系總論)」(이강오, 『논문집』제7집, 전북대학교, 1966)

 

보천교 [ 普天敎 ]

정의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내용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接主) 중의 한 명으로 관군(官軍)에 의해 처형당한 차지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高判禮)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

강일순의 사망에 따라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仙道敎:뒤에 太乙敎라 함.)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 時國>, 교명을 <보화 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하였다.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보광 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홍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6백만 신도를 호칭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친일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 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분파는 신현철(申鉉喆)의 태을교를 비롯하여 동화교(東華敎)·삼성교(三聖敎)·수산교(水山敎)·보화교·선도교·무을교(戊乙敎)·임무교(任務敎)·서상근파(徐相根派)·금산사미륵불교포정소(金山寺彌勒佛敎布政所)·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었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이어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선포함에 따라 교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8·15광복 후 다시 조직화되었지만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있다. 신파는 차경석의 아들 용남(龍南)이 주축이 되어 차경석의 교의를 신봉하고 교조로 받드는 반면, 구파는 강일순을 교조로 하고 본부에서 떨어져 나와 같은 마을에 별파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신파와 구파를 합하여 1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

신앙대상은 초기에는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칠성성군하감지위(七星聖君下鑑之位)를 써 붙이고 경천(敬天)이 위주였으나 지금은 삼광영(三光影)을 받든다.

삼광영이란 일(日)·월(月)·성(星)을 말하며 이는 모든 조직의 기본이 된다. 기본교리는 인의(仁義)이다. 즉, 인으로 생하고 의로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시종(始終)이 된다고 한다. 또, 경천·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의 4대 강령과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한다. 의례행사는 4절후 치성과 다섯 차례의 정례치성을 지낸다.

경전은 ≪대도지남 大道指南≫·≪이사전서 二師全書≫·≪교조약사 敎祖略史≫ 등을 신구파가 공동으로 쓰고 있으며, 각기 다른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普天敎沿革史 上·下」
「續編」(普天敎 中央總整院, 1948·1958)
「甑山敎史」(李正立 -甑山敎本部, 1977)
「道訓」(普天敎, 1986)
「日帝下의 甑山敎運動 」-普天敎를 중심으로한 序說的 硏究(盧吉明, 『韓國近代宗敎思想史』, 圓光大學校 出版局, 1984)
「보천교운동연구」(안후상,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보천교 연구의 현황과 과제」(安厚相 -韓國宗敎史學會, 『韓國宗敎史硏究』6, 1998)
「甑山敎槪說」(洪凡草, 創文閣, 1982)
「韓國新興宗敎總鑑」(李康五 -韓國新興宗敎硏究所, 1992)
「韓國民族宗敎總覽」(社團法人 韓國民族宗敎協議會, 1992)
「韓國新宗敎實態調査報告書」(金洪喆·柳炳德·梁銀容 -圓光大學校 宗敎問題硏究所, 1997)

인도교 [ 人道敎 ]

정의

1930년 채경대(蔡慶大)가 창교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내용

1914년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한 채경대는 탁월한 식견과 비범한 언행으로 교주인 차경석(車京石)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최고위 간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2년 14명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보천교를 탈퇴하여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 사당을 짓고 별도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30년 사당(祠堂)에 선도종장증산신성(仙道宗長甑山神聖) 불도종장진묵대사(佛道宗長震默大師) 유도종장회암선생(儒道宗長晦菴先生) 등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삼성교(三聖敎)라는 이름으로 포교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 특히 보천교의 이탈자들이 몰려들었다. 교세가 커지게 되자, 그는 1931년서울 정릉 부근으로 본부를 옮기고 교명을 천인교(天人敎)라 하면서 신도들에게 본격적인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36년 4월 조선총독부가 증산계 각 교단에 가한 폭압령에 따라 교단 간부들은 구속되고 교단은 한때 해산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출소한 채경대는 1936년 신농사(神農社)라는 개척단을 조직하여 만주 봉천성 강평현 박인촌(博仁村)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농농장(神農農場)을 세우는 한편, 통화성 유화현 대전자촌(大甸子村)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인촌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0년 9월 그의 사망을 계기로 교단이 여러 갈래로 분파되었으며, 교단 간부들마저 일경(日警)에 체포됨으로써 교세는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8ㆍ15광복 후 김종수(金鐘洙) 등 20여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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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희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국은 외래종교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한국은 헌법에 (명목상)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므로,
기독(천주)교 + 불교 + 이슬람교의 전도와 포교엔 아무런 법적 제한도 없으며
이 외래종교들을 신앙하는 한국 인구 머릿수도 가히 압도적이다 
(모두 합해 3500만 내외? - 종교 자유 없는 북한 제외, 남한 인구 대략 5000만 중에)

(If.. 그니까 만약에)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神이 있다면,
이런 한국을 놔두고 어디를 축복하겠는가  - 신에게도 양심이 있다면

한편, 우리나라에도 토속종교라는 게 있으므로
이런 것들도 있단 의미에서 글을 옮겨본다

하나, 아쉬운 건 신흥종교들의 교주라는 작자들이 제대로 된 잉간 剩間들이 드물어 (그 모두 사리사욕에만 올인)
하나 같이 사이비 종교화 되고 있다는 거 (그 대표적 例 : 대순진리회 및 증산도 등등)

이는 후천 5만년의 선경을 열기 위해 우주창조자이자 주재신임에도 (지구라는 보잘 것 없는
태양계 행성에 빌붙어 사는)  진멸지경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부득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몸으로 化하여 천지공사를 하신, 강증산님께서 땅을 치며, 통곡할 일

(제 아무리 난법 후에 진법을 드러내기 위한 그분의 도수 度數라고 해도 말이다)

- 지난 110여년간,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증산님을 팔아 먹는
이들 악다구니 교주놈들의 농간에 휩쓸려 패가망신 하였던가

뭐, 그건 예수님을 팔아 먹는 먹사님들이나 부처님을 팔아 잡숫는 중님들,
알라를 외치며 살상을 밥 먹듯 하는 IS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튼.. 실로, 안타까운 현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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