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쭘시-초-1605-13] 아름다운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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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쭘시-초-1605-13] 아름다운 외면 / 시앙보르
* 소설.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틀니를 빼자 두 아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가 틀니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를 항상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 3권 중에서
1.
노골적인 것과, 은근한 것의 차이를 숙고한다
낮이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과 색깔을,
밤이 낮으로 돌아오는 행간을,
낮과 밤이 뒤엉기며 길을 지우거나
동이 틀 때의 그 낯설음과 신선함
노을이 사라진 후 그 기이함과 쓸쓸함 따위
2.
은밀했던 시간과 부끄러웠던 장소가 떠오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쓰러지는 순간은 찰라였을지라도
뒤돌아서면 철로는 한없이 길어지고
마치 무한이라는 터널을 거슬러
숨가쁘게 달겨들 것만 같은 완행열차
밀려가는 풍경에 손을 흔들면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파리하거나 초췌했다
속도의 냄새가 싫어져 커튼을 내렸다
3.
아버지도 삽질을 하거나 혹은
두엄을 뿌리다가 잠시 멈춰서서
울컥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노란 부음이 구름을 따라오고
약해진 종아리와 휘어지던 숨소리 탓에
돌짝밭에 박힌 호미날처럼 오두커니 홀로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부쩍 커버린 새끼들 송사리로 흩어질 때
4.
너희들은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빠진 젖니는 지붕 위에 몰래 던지렴
동구밖은 늘 멀기만 했을 것이다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혀를 말던 보릿고개처럼
목간통에서 새로 걸어나와 검은 수박씨를 뱉어냈던 것처럼
뭔지도 모르면서 그 무엇인가를
담장 너머로 날려버릴 때
무렴하게 멀어지던 감꽃이나 아카시아꽃이여
5.
돌아눕는 게 어려웠을까
차라리 마주보지 않았다면 좀 더 나았을까
눈치가 없다고 여겼던 어른들은
훌룡하셨고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시치미를 떼며 싱겁지만 즐겁게 웃었을 것이다
보지 않은 것을 보았노라 우겨대던 나를
보고도 못 본 척,
아마도 깊은 속말을 삼켰을 것이다
겉나이가 아니라 속나이를 먹는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아무나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나이가 아니란다
얼굴을 파묻는 나를, 나는 못 본 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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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골 아픈 카뮈를 몇 줄 읽었다. 우중충한 날씨도 한몫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정거장이
단막극으로 펼쳐질 때가 있다. 이번 카뮈의 한 구절이 그랬다. 그래서 그냥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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