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깨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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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깨었을 때 / 최원규
지난 여름 강의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서려는 그때 잠깐 동안 현깃증이 지나가고 뜻밖에 아주 뜻밖에 우물 속에 갇힌 달 너의 모습을 본다 이십년이나 아니 한 삼십년 전쯤 내가 소년이던 그때 저녁비가 내리고 무너진 하늘 아래 비 속으로 사라지는 새들의 푸득이는 날개소리를 멀리 뒤에 둔 채 아슴히 걸린 무지개 그 너머 너의 모습을 본다 여름날 모래밭 내려 쪼이는 불씨 꿈은 알알이 타고 입술에 파인 그늘 번져오는 웃음 햇빛을 끌어 당기면 여름 과원에서 잘 익은 배나 자두 하나씩 주워 떠있는 낮달에 걸면 살과 뼈를 돌아 가르는 잠 속에서 눈뜨고 황홀히 타오르는 노을 그 속에서 너의 모습을 본다 아름다워라 동글동글한 것 풀잎과 풀잎 바람과 바람 그런 것들처럼 여울과 여울 꽃과 꽃 그런 것들처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아지랑이 그런 것들처럼 너의 모습을 본다 배를 만지는 것은 싫더라 안아 올리는 것은 싫더라 너의 머리결은 잠들고 맑고 더운 너의 살에서 풍기는 새벽숲의 내음 뿌리에서부터 젖어오는 들판의 햇빛 그 선율 흩어진 여름의 잎새들 너의 혀 속에 포개어 질 때 아름다워라 죽음처럼 고요한 잠 뜨거운 고뇌의 쇳덩이가 녹아 흐르고 꽃잎은 재가 되어 뼈 속의 성애로 남을 때 너의 모습을 본다 아스란히 먼 산빛이 되어 넘어갈 번개 작약꽃은 햇살을 어루만지고 뼈는 뼈끼리 살은 살끼리 서러운 모습으로 잠들고 있을 때 너의 모습을 본다 꽃은 술로 익어 타오르고 잎은 흔들려 바람에 취하고 날개는 꿈밭을 날아 하늘로 하늘로 솟구칠 때 너의 모습을 본다 너의 속에 네가 갇혀있을 때 나의 속에 네가 갇혀 있을 때 겨울 소나기는 번개처럼 지나가고 너의 눈썹은 꽃잎속에 파묻혀 뜻밖에 아주 뜻밖에 우물 속에 갇힌 달 너의 모습을 본다
崔元圭 시인 . 충남대 교수 역임 1961 <<자유문학>>에 詩 <나목>이 당선 1978 <<한국근대시론>>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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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생각> 꽤나 긴, 장시(長詩)이다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특별히 난해한 시어를 깔아둔 것도 아닌데, 군데 군데 등장하는 <너>가 선뜻 동일한 주체로 이해되지 않는다 시인 자신을 말함일까, 아니면 시인을 돌아보게 하는 그 어떤 대상(對象)일까 하긴 詩가 뭐, 시험지의 단일(單一)한 답안지를
요구하는 게 아닌 이상에 詩에 대한 느낌과 해석은 독자마다 다양하겠으나, 아무튼 삶이라는(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바탕의 고단한 꿈에서 안식(安息)의 은총처럼 문득 깨어났을 때, 궁극적으로 도달하고픈 그 어떤 구원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거 같다 생각하면, 生의 경험이란 건 삶의 시발점인 탄생과 종착점인 죽음을 지나 (죽음 이후의) 또 다른 生으로 이어지는 순환이기도 할진데, 그 같은 순환적 원형(圓形)에서 벗어난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건 아닐지 이를 섣불리 불가의 깨달음 류(類)에 연결할 필요까진 없겠으나, 詩 전체를 관류하는 자각과 자아의 발견 혹은, 구원에의 지향(指向)은 그런 걸 말하는 것도 같고 어쨌던 나 역시 그 어느 날, 인생이란 고단한 잠을 깨었을 때 우주의 모든 빛깔은 슬프도록 황홀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비록, 낡은 영혼에 누더기 같은 업(業)만 잔뜩 걸치고 있더라도...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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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샤워님의 댓글

언제인가, 눈이 부신 햇살을 한 몸에 받으며 스치는 바람에 꽃비되어 내리던 날, 왜 그리도 서러운지.....눈물이 흐르더이다. 어떤 이성도 개입되지 않은 절대 순수감성에 도달한 듯 ,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더이다..그렇게 흐르던 눈물이 그치더니, 밀물처럼 몰려오는 삶에 대한 물음들..,, 이승의 삶은 그 자체가 고행이더이다..해서 더는 욕심을 버리기로 맘을 먹고 그렇게 한 세월 보냈더이다...세상 만물이 모두 측은하여 차라리 봉사가 되고도 싶었더이다...엊그제 친구가 묻더이다, 예전에 벛꽃을 보고 왜 울었는지를...난 그냥 웃어 주었더이다..안면 근육에 모든 힘이 빠져서 부드러워진 얼굴로 그냥 웃었더이다...!, 윗 시를 읽다 보니 문득 옛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지 싶어서, 그래서 생각이 나더이다...!, 굳세어라 금순이도 나이고,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도 나 이기에, 네기 닐 민니서 서로 고생했노라 다독거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옛일이 문득 떠오르는 것 같더이다./잘 감상하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안희선님의 댓글

이 게시판에 꽃맘 샤워님이 꽃들을 올리시면서,
그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혈육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꽃 아가들을 키우시기 시작했다구요..
- 어떤 혈육을 여의셨는지 알 길은 없지만요
저도, 근자에 사랑하는 동생들
그리고 아들처럼 키우던 좋은이 모두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지만..
사랑과 이별한다는 일은 참 아픈 일입니다
그러면서 갖게 되는 한 생각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는 탄생할 당시 부터
각자의 조그만 손아귀에 하늘로 부터 허락된 시간이라는
한가닥의 끈을 부여잡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그 부여된 시간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건 결국 다름 아닌, 모든 가능성의 묶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선택 의지에 의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일..
사람들은 그 과정에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하고, 형제의 연을 맺기도 하고,
친구나 연인의 연을 맺기도 하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한편으로, 시간은 우리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대상이기도 해요
- 왜?
그 시간이라는 끈은 (반드시) 어느 시기엔가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뚝 ! 끊어져 버리기에
그건 근자에 사랑하는 동생들과 아들내미를 떠나 보내며 들었던,,, 한 생각요..
사실, 전혀 우연한 장소와 시기에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들은
다시금 이렇다 할 필연성도 없이 이 세상에서 쫓겨나게 되어있죠
그래서, 그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 자신의 무력감과
존재의 허무감 내지 한계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구
아, 그럴 때 밀려드는 까닭없는 슬픔이란...... !
- 아마도, 샤워님의 눈물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이리라 생각요 (희서니의 짐작)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쌓았던 生의 고운 추억들
그건 언제까지나, 삶의 소중한 경험으로써 내 영혼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는 그 어떤 위로 같은 것도 해 봅니다
주신 좋은 말씀에 생각, 머물다 갑니다
늘 (무조건) 건강하세요 - 명령조 당부라 할까
암튼, 사람은요~
갈 때 가더라두, 사는 동안엔 건강할 일입니다
저처럼 아프지 말구요
그건 정말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