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볼 때는 오직
보는 대상에 깨어있어라
무언가를 들을 때는 오직
들리는 것에 집중하라
무언가를 먹을 때는 오직
먹는 것에
무언가에 닿을 때는 오직
닿는 것에 깨어있어라”
부처님께서
지치고 흥분한
바히야를 위해 들려준
아주 짧은 법문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성취해
진짜 아라한이 됐지만 …

출가하지 않은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빨리 아라한과를 성취한 인물은 ‘바히야’이다.
그는 비구가 되지 못했으나 ‘존자’라고 불린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고 안타깝게도 출가하여 입을 가사를 만들기 위해
천을 구하러 가던 중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깎지 않은 아라한으로 불렸고
부처님으로부터 ‘빠르게 최상의 지혜를 얻은 자 가운데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 전 재산 잃고 거지 된 상인
바히야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다.
그는 커다란 배를 타고 인더스강부터 바다를 오가며 무역을 하였다.
바히야의 항해는 일곱 번이나 무사히 성공하였고 그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여덟 번째로 무역선을 띄웠을 때, 그 배에는 바히야의 성공을 듣고 모여든 여러 상인들도 함께 탔다.
그런데 배가 강을 지나 바다로 나아갔을 때, 그만 거대한 풍랑을 만나고 말았다.
거센 파도를 견디다 못한 배는 부서졌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단 한 사람, 바히야만이 널빤지 한 조각에 의지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숨이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널빤지를 붙들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동안 바히야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차라리 풍랑을 만났을 때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바히야와 널빤지는 파도를 타고
마침내 숩빠라까 부근의 해안가에 도착했다.
바히야에게는 돈도, 옷이나 신발도, 신분을 증명한 어떠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았다.
배가 난파하면서 전 재산을 잃었고 바다를 표류하는 동안 옷은 모두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목숨과 널빤지 한 조각뿐이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날들이 며칠이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일단 뭐라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벌거벗은 몸으로 구걸을 다니면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을 지도 몰랐다.
바닷가에 앉아 천천히 기운을 차린 바히야는 바닷가에 널려있는 나무껍질과
그가 타고 온 널빤지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숩빠라까 성 안으로 들어갔다.
- 사람들의 공양을 받다
며칠 동안이나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한 그의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길었으며 몇 번이나 삶과 죽음을 오간 눈빛은 형형했다.
느닷없이 성 안에 나타난 반 벌거숭이 바히야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바히야는 본디 매우 잘 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부유한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널빤지와 나무껍질로 간신히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전혀 거지같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도타행을 하는 고귀한 수행자처럼 보였다.
구걸을 하기 전, 바히야와 눈이 마주친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예배를 올리며 음식을 바쳤다.
깜짝 놀란 바히야가 예배와 음식을 거절하자 이를 본 사람들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어렸다.
사람들의 눈에는 바히야가 홀로 고행을 하고 정진을 하며 깨달음을 얻은 대수행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바히야에게 종종 밥과 쌀죽 등의 음식을 바쳤고,
그가 나타나면 아라한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바히야는 일단 굶지 않게 되어 만족했고, 차츰 구걸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은 그에게 음식을 바치던 사람 중 한 명이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나무껍질과 널빤지로 간신히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히야는 이를 거절하였다. 옷을 입으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음식을 바치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무판자로 아랫도리만 가린 바히야는 고귀한 수행자이자 아라한이라고 불리며
점차 숩빠라까에서 유명해졌다.
- 천신의 가르침을 받고
바히야가 숩빠라까에서 가장 유명한 수행자로서
사람들의 공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때, 천신이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천신은 과거생에 바히야의 친구로 그와 더불어 죽을 각오로 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천신은 아나함과를 성취하였고 바히야는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천신은 바히야를 보면서 그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신은 바히야에게 다가가 말했다.
“바히야여, 그대는 아라한도 아니요 아라한이 될 자격을 갖춘 자도 아니다.
그대는 아라한이 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아라한이 되기 위한 길목에 있지도 않다.
스라바스티에 계신 고타마 부처님을 찾아가라! 그 분이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며
사람들과 신들의 섬김을 받는 스승이자 진정한 아라한이시다.”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아라한 노릇을 하는 것에 어느 새 익숙해져 있었던 바히야는
천신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천신의 말이 끝나자 바히야는 곧바로 숩빠라카를 떠나
스라바스티로 향했다.
인도의 북서쪽에 있는 숩빠라카에서 북동쪽에 있는 스라바스티까지는 장장 수천 킬로미터가 넘었다.
하지만 부처님을 뵙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난 바히야는 천신의 보호를 받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며칠 만에 스라바스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세존이시여, 법을 설해 주소서”
간신히 기원정사에 도착한 바히야는 경행을 하고 있는 스님들을 붙잡고 부처님이 계신 곳을 물었다.
마침 부처님께서는 시자 아난존자와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탁발을 하러 성 안으로 가셨을 때였다.
스님들의 대답을 들은 바히야는 성안으로 향했다.
나무껍질로 엮은 널빤지를 걸친 바히야의 모습은 단박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밤을 새워 쉬지도 않고 달려온 바히야는 부처님을 뵙자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올린 뒤 말했다.
“부처님,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제자에게 긴 세월 동안 이익을 줄 수 있는 담마를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의 두 발에 이마를 대고 가르침을 청하는 바히야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탁발을 하는 중이니 법을 설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며
바히야의 청을 거절하셨다.
그러자 바히야는 더욱 달뜬 목소리로 부처님을 설득하며 법을 청했다.
“부처님, 사람의 앞날은 어찌될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탁발과 공양을 하는 사이 제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제발 법을 설해 주십시오.”
밤새도록 잠 한 숨 자지 않고 길을 달려온 바히야의 몸은 피곤으로 가득했고,
부처님을 뵌 기쁨으로 잔뜩 흥분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도 바히야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거듭 거절하셨음에도 굴하지 않고 바히야는 법을 청했다.
지금 당장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바히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부처님은
그에게 아주 짧은 법문을 해주셨다.
- 갑작스럽게 죽음을…
“바히야여, 이렇게 수행하라. 무언가를 볼 때는 오직 보는 대상에 깨어있어라.
무언가를 들을 때는 오직 들리는 것에 집중하라.
무언가를 먹을 때는 오직 먹는 것에, 무언가에 닿을 때는 오직 닿는 것에 깨어있어라.”
부처님께서는 지치고 흥분한 바히야를 위해 아주 짧은 법문을 들려주셨다.
바히야는 이 몇 마디 법문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가짜 아라한이 진짜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어서 바히야는 부처님께 출가 허락을 구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출가를 허락하며 가사를 만들 천과 발우 등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가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천을 구하기 위해 바히야가 자리를 비웠을 때
부처님은 비로소 다시 탁발을 시작하셨다.
이윽고 부처님과 스님들은 공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바히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바히야는 이미 살아있는 몸이 아니었다.
가사를 만들기 위한 천을 구하러 가던 중 암소에게 받혀 치명상을 입고 결국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시체더미 위에서 바히야를 발견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바히야의 시신을 도시 바깥으로 가져가 정중하게 다비하고
그를 기억할 만한 탑을 세워 주거라. 그는 너희들과 같은 비구 대중 중 한 사람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비구 스님들은 바히야의 시신을 잘 화장하고 유골은 탑에 안치하였다.
바히야의 다비식과 장례식을 마친 후 기원정사로 돌아온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이미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으며 열반에 들었다고 공표하며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바히야는 법에 의해 법을 실천하였고
법에 대한 논쟁으로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바히야는 아라한과를 얻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말씀 덕분에 미처 출가하기 전 세상을 떠난 바히야는
비구 스님 중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불교신문3355호/2017년12월20일자]
글 조민기 삽화 견동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