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삶에 대한 비순응주의자, 자연주의자 - Scott Nearing
페이지 정보
작성자 andres00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19-12-24 00:13본문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 스콧 니어링
Scott Nearing (1883 ~1983)
자연주의자, 작가
--------------------------------
<생각>
사람의 소망이란 게 각양각색이겠건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바라는 바가 어쩌면 이렇게 나와 같을 수가 있는 건지..
물론, 시에 견주어 말하자면 한 편의 시는 모든 이들의 시가 되기도 하는 거지만
죽음을 대하는, <스콧 니어링>의 마음을 읽으니 그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죽음은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의 결정結晶>이며 <영원永遠을 향한 새로운 출발>임을 느끼게 된다
진실되고, 성실한 자세로 평생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따뜻한 人間들이 사라진 이 황량한 세상에 남기는
<아름다운 유언遺言>이라 할까
반면에 전혀 성실하게 살아오지 못한 나는, 단지 죽음이나마 그를 닮고 싶음이겠다
- 熙善,
------------------------------------------------------------
‘비순응주의자’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훌륭한 일생을 살고 훌륭한 죽음을 맞으라”
내면의 인격 역시 우리가 어떤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를 드러내는 요소다.
배역에 머물러 있는 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인간은 항상 배역 이상의 존재였다.
우리는 ‘세계극장’의 배우들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미국에서 태어나
“니어링은 ‘어떤 일의 가치는 그것의 난이도나 성패 가능성에 있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비전과 투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탐욕과 이기주의로 얼룩진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시골에 내려가 자급자족 경제를 일구며
스코트 니어링은 어린이 노동 착취, 불평등한 노동조건, 국가 간의 전쟁 도발에 반대하며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지만 자신의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스코트의 위대함은 근본주의자로서 자신의 윤리와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한 점에서 돋보인다.
스코트는 1883년 미국의 탄광도시 펜실베니아에서 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역시 사업가였으며 어머니는 교양과 기품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인생 배역은 전망이 꽤나 밝은 대학교수와 저술가로 고착될 듯 보였으나
1917년에는 반전(反戰)에 대한 논문을 내놓은 뒤 기소됐다.
스코트는 1917년 7월 사회당에 가입했다. 사회당 가입은 그의 정치적 실천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더 과감하게 제 안의 윤리를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오라, 자유의지를 따른 삶이여
주류사회에서 내쳐진 채 소외당하던 스코트는 1928년 스무 살 연하의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났다.
니어링 부부는 미국이 대공황으로 불황과 실업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뉴욕에서 버몬트의 시골로 이사했다.
그들이 귀농을 선택한 것은 불평등한 노동 착취적인 사회구조, 천박한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그는 거친 산골짝의 땅뙈기를 일궈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다.
노동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여유 시간을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에 썼다.
스코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은 버몬트에서 산 기록을 엮어 1954년 에세이 <조화로운 삶>을 펴냈다.
헬렌 니어링의 에세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처음 읽었을 때
스코트가 아흔 중반이 됐을 때조차 그의 육체와 정신, 영혼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평생의 반려자로서 스코트를 지켜본 헬렌은 이렇게 썼다.
“스코트는 자신의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 했다.
죽음으로서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왔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문명 세계를 등지고 귀농을 실천하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4.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5.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오히려 죽음의 과정을 온전하고 예민하게 느껴보고자 했다. 이 지침이 감동적인 것은 자신의 죽음을 슬프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에게 죽음이란 옮겨 감이거나 깨어남이고, 환영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음과 관련하여 일체의 장식과 치장을 거부했다. 지극히 소박한 형태로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랬다.
죽음은 끝이 아닌 ‘깨어남’
오랜 친구로 지내온 불가지론자 로저 볼드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죽음은 변화지.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을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07쪽)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받아들이지만 스코트는 달랐다.
스코트는 100세 생일 한 달 전 지인과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얼마 뒤엔 그것마저 거부했다.
“스코트는 훌륭한 일생을 살았으며 훌륭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평온하게 죽었다.
그가 잘 해온 것에 기쁜 느낌을 느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헬렌의 노래는 스코트가 맞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코트는 나무처럼 높은 이상을 갖고 걸었다. 타락한 세상의 무리들과 타협하지 않고 산처럼 올곧게 살았다. 스코트나 죽은 자를 떠나 보내는 헬렌도 고요하고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죽음은 몇 십 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밤이 잠의 축복을 가져다 주듯이, 죽음은 더 큰 날의 시작일 수 있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36~237쪽)
“나무처럼 높이 걷고, 산처럼 강하게 살라”
자신의 죽음을 맞을 시간을 정하고 그 방식을 자신의 자유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완전한 인격에 도달한 사람일 테다.
비굴하게 삶의 시간들을 구걸해서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불꽃에 기름이 떨어진 뒤에/ 나를 살게 하지 마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28쪽)
그것은 자연 생태주의를 따르는 방식이다.
스코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음식 일체를 거부함으로써 육체를 고갈에 이르게 해서 죽음을 맞았다.
“한 친구는 내가 말하는 것이 그전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참 유감스럽다.”
많은 이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세상을 더 이롭게 할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세계화가 촉진하고 있는 소비문화는 점차 도시적으로 변한다. 경제성장은 농촌 경제를 붕괴시켰고,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경제의 규모는 커졌지만 더 많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인다.
인류는 예전보다 훨씬 삭막하고 불행한 처지로 몰리고 인류 미래는 암담해졌다.
스코트는 불로소득을 얻으려고 기웃대거나 그 어떤 도박에도 손댄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큰돈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악덕과도 연루되지 않은 정당한 투자였다.
100세 채우고 자발적 죽음을 맞다
|
스코트 니어링은 내 마음으로 기리는 삶의 사표(師表)다.
그는 평생 채식주의 원칙에 충실했다.
하루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 한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일에 썼다.
“내년 1년을 그럭저럭 버티는 데 최소한의 필요한 현금이 얼마지?” 한 해의 모든 계획과 목표를 고려해 필요한 현금 액수를 정한 뒤
그 액수를 벌어들일 만큼만 현금작물을 생산한다.
그 목표가 채워지면 생산을 중단한다. 한 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니어링 부부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가롭게 책을 읽거나 명상하고, 여행을 다녔다.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의 태도는 아래 열한 가지의 목록으로 압축돼 있다.
이 목록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1.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2.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3.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4.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5.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 밑에 땅을 느껴라.
6. 농장일 또는 산책과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7. 근심을 떨치고, 하루를 살아라.
8.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누라. 혼자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9.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10.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11.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
마음으로 스코트의 길을 따르고자 하지만 내 삶과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꿈이다.
나 역시 마흔 중반에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겼지만 내 삶이 이룬 꼴은 그와 닮지 않았다.
다만 시골 생활을 하면서 추구한 내면 가치들, 즉 단순함, 고요한 생활, 가치 있는 일에서는 겹친다.
생활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의 자서전이나 존 살트마쉬가 쓴 평전, 니어링 부부가 함께 쓴 <조화로운 삶>,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는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얻고 마음이 더워지며 커다란 기쁨을 일굴 수가 있다.
스코트 니어링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인이다.
그는 미국의 소수 권력층에 속하는 집안에서 인생을 시작했으나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다.
그는 반전 논문을 쓰고 스파이 혐의로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으나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강연을 통해 평화를 얘기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동시대인에게 위험분자로 낙인 찍히고 교수와 공직을 박탈당했다.
강연은 취소되고 감옥에 수감됐으며 책은 재판에 부쳐져 판매금지 처분이 됐다.
신문사들은 그의 책에 대한 유료광고 게재조차 거절했다.
그가 무기를 들고 폭력을 선동했을까?
그는 무기를 손에 쥔 적이 없다. 다만 책을 읽고 사유한 학자며 정직한 언어를 구사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와 기득권 세력은 그를 사회와 체재를 파괴할 수 있는 과격인물로 배척하고 철저히 고립시켰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그늘들
|
자본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저 혼자 제 정신을 갖고 이성의 목소리를 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습관, 도덕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해 거슬러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고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그는 제 규범에 따라 세상을 변화하는 데 평생을 바치고 그에 반대하는 사회에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는 스코트 니어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스코트 니어링은 반자본주의, 친사회주의, 반전운동가, 평화주의자, 저술가, 채식주의자다.
모두가 제 기득권과 행복을 지키는 데 급급한 세계에서 공동체의 행복과 복지, 공동의 가치와 선을 드높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매진했던 그는 광야에서 홀로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외친 사람이다.
스코트 니어링, 그는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뤄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을 외쳤다.
이어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을 꿈꾸고 외쳤다.
그는 타고난 비순응주의자로 이 삶을 살다 갔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