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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삶에 대한 비순응주의자, 자연주의자 - Scott Nearing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andres00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19-12-24 00:13

본문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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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Nearing (1883 ~1983)

자연주의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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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사람의 소망이란 게 각양각색이겠건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바라는 바가 어쩌면 이렇게 나와 같을 수가 있는 건지..


물론, 시에 견주어 말하자면 한 편의 시는 모든 이들의 시가 되기도 하는 거지만


죽음을 대하는, <스콧 니어링>의 마음을 읽으니 그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죽음은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의 결정結晶>이며 <영원永遠을 향한 새로운 출발>임을 느끼게 된다

진실되고, 성실한 자세로 평생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따뜻한 人間들이 사라진 이 황량한 세상에 남기는

<아름다운 유언遺言>이라 할까

반면에 전혀 성실하게 살아오지 못한 나는, 단지 죽음이나마 그를 닮고 싶음이겠다

                                                                                                                                                  - 熙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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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순응주의자’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훌륭한 일생을 살고 훌륭한 죽음을 맞으라” 

- 장석주 전업작가


반자본주의자, 반전운동가,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의 고독한 길…
모두가 기득권과 행복을 지키는 데 급급한 세상에서 공동체의 행복과 복지, 공동의 가치와 선을 드높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광야에서 홀로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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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화가 로버트 쉬트리의 작품 <스코트 니어링의 초상>.
스코트는 미국에서 사회경제학 교수로 활동하다 귀농해 자급자족 경제를 일구며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다.
우리는 세계라는 이름의 ‘극장’에서 각자 맡은 배역에 따라 살아간다.
누군가의 자녀, 형제 혹은 부모로 말이다. 대학생, 전업주부, 회사원, 자영업자, 예술가라는 직업도 각자의 배역이다.

내면의 인격 역시 우리가 어떤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를 드러내는 요소다.
이 ‘극장’에서 받은 배역은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인간은 저마다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극장에 기투(企投)돼 살아간다.
우리가 늙어서 죽음에 이를 때 이 세계에서의 배역은 끝난다. 죽음이라는 막이 내리면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배역에 머물러 있는 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삶의 방식이 배역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역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한다.
여기서 배역은 철저히 상호 존재적 관계 안에서 타인의 눈에 비친 대상화된 자기일 뿐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인간은 항상 배역 이상의 존재였다.
세계가 우리에게 정해준 배역대로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망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다.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배역을 반납하고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극장’의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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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과 동떨어져 살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했다.
한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세계라는 이름의 극장에서 주어진 배역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사회라는 커다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더 낫게 바꾸려는 노력,
다시 말해 남다른 비전으로 실천적 투쟁에 나서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미국에서 태어나
저술가, 농부, 사회 운동가로 일생을 산 사람이다.

“니어링은 ‘어떤 일의 가치는 그것의 난이도나 성패 가능성에 있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비전과 투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삶은 획득이나 축적보다는 꿈과 노력으로 풍요로워진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존 살트마쉬, <스코트 니어링 평전> 중)

그는 탐욕과 이기주의로 얼룩진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시골에 내려가 자급자족 경제를 일구며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어린이 노동 착취, 불평등한 노동조건, 국가 간의 전쟁 도발에 반대하며
미국 주류 사회에서 소수자의 올곧은 목소리를 냈다.
그게 빌미가 돼 두 번이나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기도 했다.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지만 자신의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난 자연 속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펼쳐 보였다.
시골에서 삶을 꾸리며 자신의 위대한 철학과 사상을 펼쳐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코트의 위대함은 근본주의자로서 자신의 윤리와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한 점에서 돋보인다.
그의 삶은 사회구원, 초월주의, 실용주의, 자연주의, 유토피아주의, 19세기 사회주의,
20세기 공산주의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스코트는 1883년 미국의 탄광도시 펜실베니아에서 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1864년 가족을 데리고 펜실베니아에 정착한 뒤 광산 회사를 운영했다.
스코트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광산 노동자의 삶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아버지 역시 사업가였으며 어머니는 교양과 기품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어린 스코트는 자애로우면서 활동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자연, 책,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09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본의 분배문제에 대해 활발한 저술과 강연에 나섰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인생 배역은 전망이 꽤나 밝은 대학교수와 저술가로 고착될 듯 보였으나
스코트는 아동의 노동력 착취에 관심을 갖고 그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을 펼쳤다.
그의 진보 사상이 나아간 곳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비판하며 반전 사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글을 쓰고 강연했다.
그게 빌미가 되어 대학 당국과 마찰을 빚고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1917년에는 반전(反戰)에 대한 논문을 내놓은 뒤 기소됐다.
2년 뒤 연방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고심 끝에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고원무립의 처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스코트는 1917년 7월 사회당에 가입했다. 사회당 가입은 그의 정치적 실천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스코트는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의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가 부와 기득권을 내려놓고
낮은 자리로 옮겨 앉는 실천의 자세에 감동받았다.

결국 그는 더 과감하게 제 안의 윤리를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그럴수록 미국의 주류사회와 대립하고 불화를 일으켰다.
주류사회로부터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과격분자’로 낙인 찍혀 본래의 직업인 교수직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오라, 자유의지를 따른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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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리비아 내전을 반대하는 미국의 한 시위 현장. 스코트도 생전에 전쟁을 비판하며 반전을 주장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대학과 마찰을 빚고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마음만 먹었다면 선대에서 이룩한 물질적 부를 누리며 정치학·경제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평탄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진보 성향과 반전 활동으로 학계에서 쫓겨나면서 그의 삶의 여정은 가파르고 고단해졌다.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면서 그의 반전운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간첩 혐의마저 따라붙었다.

주류사회에서 내쳐진 채 소외당하던 스코트는 1928년 스무 살 연하의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났다.
이 만남으로 그의 인생은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 경제를 등지고 자연으로 돌아가 살기로 결심했다.

니어링 부부는 미국이 대공황으로 불황과 실업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뉴욕에서 버몬트의 시골로 이사했다.

그들이 귀농을 선택한 것은 불평등한 노동 착취적인 사회구조, 천박한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평화주의와 채식주의를 실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귀농은 물질적 부의 추구 대신에 자연과의 조화, 자유, 그리고 땅에 뿌리를 박는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 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는 거친 산골짝의 땅뙈기를 일궈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채소와 과일, 꽃을 가꿨다.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집짐승의 똥오줌으로 땅을 일궜다.
그리고 자신이 살 집을 손수 지었다. 모든 생필품을 자급자족했으며 단순한 생활 양식을 실천했다.

노동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여유 시간을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에 썼다.
그는 문명의 병폐에 물들지 않은 매우 건강하면서도 의미가 충만한 대안적 삶을 살았다.

스코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은 버몬트에서 산 기록을 엮어 1954년 에세이 <조화로운 삶>을 펴냈다.
이어 니어링 부부는 1979년에는 메인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에세이 <조화로운 삶의 지속>를 펴냈다.
한편 스코트는 저서 <진보주의자의 양심>을 비롯해 수많은 책을 써내며 근본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제 삶의 방식을 알리려고 애썼다.

헬렌 니어링의 에세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녀의 남편 스코트가 죽음 앞에 보여준 의연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헬렌은 스코트가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든이 되기 전 사람들이
그를 노인이라고 부르면 화가 났다고 했다.

스코트가 아흔 중반이 됐을 때조차 그의 육체와 정신, 영혼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하지만 아흔여섯 살이 되자 육체는 쇠약해지고, 생명이 소진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긴 항해를 한 배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배를 움직이는 기관들은 노후화돼
더는 항해를 나가지 못 하기 마련이다.

평생의 반려자로서 스코트를 지켜본 헬렌은 이렇게 썼다.

“스코트는 자신의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 했다.
그는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다. 의식을 갖고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죽음으로서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왔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208쪽)
스코트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다.
죽음은 삶이 감추고 있는 내밀한 비밀이다. 스코트는 그 죽음의 경험을 두려움 때문에 피하려 하지 않았다.
죽음의 경험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생명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죽기로 결심했다.
자유의지에 따라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능동적으로 겪어 내고자 했다.

문명 세계를 등지고 귀농을 실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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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인 주에 위치한 스코트 니어링 부부의 옛집. 현재 전시관 겸 복지시설인 ‘굿 라이프(Good life)’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원한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장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영혼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5.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21~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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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링 부부는 미국이 대공황으로 불황과 실업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뉴욕에서 버몬트의 시골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모든 생필품을 자급자족했으며 단순한 생활양식을 실천했다.
스코트가 맑은 정신으로 써내려 간 이것은 일종의 유언이다. 성숙한 인격을 갖춘 그에게 죽음은 삶이라는 항해를 마무리하는 것이고, 삶의 완성을 위한 관문이었다. 스코트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의학적인 수단에 의존해 생명 연장하는 것을 거절했다.

오히려 죽음의 과정을 온전하고 예민하게 느껴보고자 했다. 이 지침이 감동적인 것은 자신의 죽음을 슬프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에게 죽음이란 옮겨 감이거나 깨어남이고, 환영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음과 관련하여 일체의 장식과 치장을 거부했다. 지극히 소박한 형태로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랬다.

죽음은 끝이 아닌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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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미국인이 스코트 정신에 따라 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추구하고 있다.
채소를 직접 기르고 친구들을 초대해 소규모 파티를 열어 직접 구운 빵을 선물한다.
스코트와 헬렌 두 사람은 평소에도 죽음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알기를 원했다.
그들은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고 긴 시간을 들여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죽음이 단절이나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의 옮겨 감이라고 믿었다.

오랜 친구로 지내온 불가지론자 로저 볼드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을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07쪽)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받아들이지만 스코트는 달랐다.
그는 낮이 가고 밤이 오는 것이 우주의 순환에 따른 결과이듯이 삶에서 죽음으로 변화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란 그저 몸의 소멸일 뿐이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새로운 삶이 죽음 뒤에도 이어진다.

스코트는 100세 생일 한 달 전 지인과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뒤로 그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곡기를 자발적으로 끊은 뒤 사과, 오렌지, 바나나, 포도 같이 삼킬 수 있는 것을 주스로 만들어 마셨을 뿐이다.

얼마 뒤엔 그것마저 거부했다.
그는 일체의 생명 연장에 필요한 음식 섭취를 마다하고 물만 조금씩 마셨다.
스코트는 정신이 맑은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나날이 그의 몸은 수척해졌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그는 자신의 침상에서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을 마감했다.

“스코트는 훌륭한 일생을 살았으며 훌륭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평온하게 죽었다.
그가 바라던 대로 집에서, 약물이나 의사 없이, 병원에서처럼 제한을 받지 않고 내가 자리를 함께한 가운데 갔다.

그가 잘 해온 것에 기쁜 느낌을 느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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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식 밥상의 모습. 스코트는 일생 동안 채식주의를 실천했다.
직접 기른 곡물을 섭취해야 자연과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헬렌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옛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래를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헬렌의 노래는 스코트가 맞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코트는 나무처럼 높은 이상을 갖고 걸었다. 타락한 세상의 무리들과 타협하지 않고 산처럼 올곧게 살았다. 스코트나 죽은 자를 떠나 보내는 헬렌도 고요하고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죽음은 몇 십 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밤이 잠의 축복을 가져다 주듯이, 죽음은 더 큰 날의 시작일 수 있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36~237쪽)

“나무처럼 높이 걷고, 산처럼 강하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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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링 부부의 모습. 스코트의 아내 헬렌이 피리를 불고 있다. 그녀는 명상과 우주질서에 관심이 많던 음악도였다.
그렇다. 그들에게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전환점이고, 끝이 아니라 더 큰 날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맞을 시간을 정하고 그 방식을 자신의 자유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완전한 인격에 도달한 사람일 테다.
스코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쁘게 살고, 그 삶을 떠날 때도 기쁜 마음으로 떠나고자 했다.

비굴하게 삶의 시간들을 구걸해서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불꽃에 기름이 떨어진 뒤에/ 나를 살게 하지 마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는 자기가 죽어야 할 시간에 맞춰 곡기를 끊고 평온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헬렌 니어링, 앞의 책, 228쪽)

그것은 자연 생태주의를 따르는 방식이다.
늙은 코끼리는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알고 무리에서 외톨이로 떨어져서 무리가 없는 멀고 깊은 숲 속에 들어가 섭생을 중단하고 죽음을 맞는다.

스코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음식 일체를 거부함으로써 육체를 고갈에 이르게 해서 죽음을 맞았다.
그가 맞은 죽음은 바로 그런 자연이 취하는 죽음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흔다섯 살이 됐을 때 그는 주변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한 친구는 내가 말하는 것이 그전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참 유감스럽다.”
그리고 1983년 8월 23일, 죽기 몇 달 전에 그는 “대중을 움직이기 위해 한 세기 내내 뭔가 하려 했으나,
그 노력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아마 그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성장 엔진으로 삼은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 상황을 목격했다면 더욱 절망했을 테다.

많은 이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세상을 더 이롭게 할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세계화가 촉진하고 있는 소비문화는 점차 도시적으로 변한다. 경제성장은 농촌 경제를 붕괴시켰고,
이 때문에 인구의 단지 2퍼센트만이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에 살게 되었다. 세계화는 엄청난 수의 인구를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켰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성장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별다른 대안도 마련해주지 않고 사람들을 끝없이 도시로 이주시켰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치, <행복의 경제학>, 22~23쪽)

세계경제의 규모는 커졌지만 더 많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인다.
오늘날 카지노 자본주의 세계에는 스코트가 살았던 시절에 견줘 자연생태계의 파괴, 쓰레기의 과잉 생산, 기후변화,
가족 해체, 청년실업, 사회 빈곤층의 증가, 사회양극화, 분열과 폭력, 유혈 테러의 위험 따위의 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인류는 예전보다 훨씬 삭막하고 불행한 처지로 몰리고 인류 미래는 암담해졌다.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사태는 결국 스코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옳았다는 증거다.

스코트는 불로소득을 얻으려고 기웃대거나 그 어떤 도박에도 손댄 적이 없다.
그는 인생을 즐기거나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은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뒤 독일 공채를 800달러에 샀다. 독일이 경제부흥을 이루자 공채는 6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결과적으로 큰돈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악덕과도 연루되지 않은 정당한 투자였다.
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이 공채 증서 전부를 난로 속에 집어 던져 소각해버렸다.
자신이 취득할 이익이 누군가의 정당한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거나 불로소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는 주식, 채권, 저당권에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100세 채우고 자발적 죽음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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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선을 드높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매진했던 스코트는 광야에서 홀로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외친 사람이다.
그는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을 주문했다.

스코트 니어링은 내 마음으로 기리는 삶의 사표(師表)다.  

그는 평생 채식주의 원칙에 충실했다.

하루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 한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일에 썼다.

“내년 1년을 그럭저럭 버티는 데 최소한의 필요한 현금이 얼마지?” 한 해의 모든 계획과 목표를 고려해 필요한 현금 액수를 정한 뒤

그 액수를 벌어들일 만큼만 현금작물을 생산한다.

그 목표가 채워지면 생산을 중단한다. 한 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니어링 부부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가롭게 책을 읽거나 명상하고, 여행을 다녔다.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의 태도는 아래 열한 가지의 목록으로 압축돼 있다.

이 목록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1.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2.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3.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4.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5.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 밑에 땅을 느껴라.
6. 농장일 또는 산책과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7. 근심을 떨치고, 하루를 살아라.
8.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누라. 혼자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9.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10.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11.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

마음으로 스코트의 길을 따르고자 하지만 내 삶과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꿈이다.

나 역시 마흔 중반에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겼지만 내 삶이 이룬 꼴은 그와 닮지 않았다.

다만 시골 생활을 하면서 추구한 내면 가치들, 즉 단순함, 고요한 생활, 가치 있는 일에서는 겹친다.

생활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의 자서전이나 존 살트마쉬가 쓴 평전, 니어링 부부가 함께 쓴 <조화로운 삶>,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는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얻고 마음이 더워지며 커다란 기쁨을 일굴 수가 있다.

스코트 니어링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인이다.

그는 미국의 소수 권력층에 속하는 집안에서 인생을 시작했으나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다.

그는 반전 논문을 쓰고 스파이 혐의로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으나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강연을 통해 평화를 얘기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동시대인에게 위험분자로 낙인 찍히고 교수와 공직을 박탈당했다.

강연은 취소되고 감옥에 수감됐으며 책은 재판에 부쳐져 판매금지 처분이 됐다.

신문사들은 그의 책에 대한 유료광고 게재조차 거절했다.

그가 무기를 들고 폭력을 선동했을까?

그는 무기를 손에 쥔 적이 없다. 다만 책을 읽고 사유한 학자며 정직한 언어를 구사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와 기득권 세력은 그를 사회와 체재를 파괴할 수 있는 과격인물로 배척하고 철저히 고립시켰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그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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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뤄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을 스코트는 강조했다.
유년 시절부터 자연과 호흡하여 원초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자본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저 혼자 제 정신을 갖고 이성의 목소리를 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습관, 도덕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해 거슬러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고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그는 제 규범에 따라 세상을 변화하는 데 평생을 바치고 그에 반대하는 사회에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는 스코트 니어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스코트 니어링은 반자본주의, 친사회주의, 반전운동가, 평화주의자, 저술가, 채식주의자다.

모두가 제 기득권과 행복을 지키는 데 급급한 세계에서 공동체의 행복과 복지, 공동의 가치와 선을 드높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매진했던 그는 광야에서 홀로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외친 사람이다.

스코트 니어링, 그는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뤄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을 외쳤다.

이어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을 꿈꾸고 외쳤다.

그는 타고난 비순응주의자로 이 삶을 살다 갔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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